1994년 3월30일 필자는 세계일보사 초청으로 방한한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날 행사장인 하얏트호텔에서 강연회를 주최한 김상현 의원(왼쪽부터)과 고르비, 통역, 김진현 전 장관, 필자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9
1994년 3월30일 나는 귀한 역사적 인물을 만났다. 바로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였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이날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환경과 생명을 위한 모임’(회장 김상현 의원) 주최로 특별강연을 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한 자리여서 깊은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고독감과 조용한 자신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뛰어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법. 그는 그런 예언자적 고독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20세기의 냉전 역사를 종식시키고, 세계적 수준의 탈냉전을 통해 평화의 21세기를 열고 있다는 신념을 또한 가슴 깊이 지니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고국 러시아에서 외롭지만, 역사는 그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는 강연을 통해 격동의 20세기 말, 우리가 경청해야 할 주요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첫째, 인류는 20세기 끝자락에서 심각하고 독특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삐뚤어진 관계에서 나온 위기다. 자칫 이 위기를 잘못 대처하게 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지속될 수 없는 위험상황으로 치닫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핵전쟁 못지않게 심각하다. 둘째, 이 위기는 지진이나 해일 같은 지층의 파괴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잘못된 소비구조의 변화로 나타날 수 있다. 셋째,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전통적 인간중심주의 관념을 버리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설정을 통해 생존해 나갈 수 있다. 넷째, 사상이나 체제 그리고 행위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 다양성은 위협이 아니다. 다가올 21세기에 다양성의 존중은 더욱 필요하다. 다섯째, 자원의 활용은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복원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허용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재활용의 일상화가 중요하다. 여섯째,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발전도 자연복원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는 이런 전지구적 위기를 맞아 어느 나라에서나 밑으로부터의 변혁운동, 특히 민간 환경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나는 ‘고르비’의 감동적인 강연을 경청하면서, 그는 단순한 정객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있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적절한 비전을 갖고 있는 정치철학자라고 느꼈다. 이 시대의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이어 4월11일 점심 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인 차인석 박사와 만났다. 그와 나는 여러모로 소통이 잘되는 편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철학에 심취해 있는 양심적 학자다. 그는 오는 9월말 한국 유네스코가 주최하는 국제회의에서 주제 발표 하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주제는 썩 마음에 들었다. ‘관용과 민주주의’. 21세기에 적절한 사회·정치·경제 문제였다. 그는 기조연설자로 남아프리카의 데즈먼드 투투 성공회 주교를 모시고 싶어했다. 적절한 분이라고 나는 동의했다.
4월12일 <한국방송>(KBS)의 끈질긴 요청에 못 이겨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새벽에 일어나 전남 고흥으로 내달았다. 섬마을에 가서 벼를 심을 수 있도록 논을 쟁기로 가는 일을 해야 한단다. 평생 처음 소를 몰아보는데, 쟁기로 논을 가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미처 몰랐다. 농민들은 식은 죽 먹듯 잘하는데, 나는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중간중간 논둑에서 쉬어가며 일했다. 문득 흙을 만져보다 이 흙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곧 돌아갈 고향의 냄새를 미리 맛보는 듯했다.
땅갈이의 힘겨움을 새삼 깨달으면서 나는 문명이 바로 이 땅갈이의 결과물임을 새삼 반추해 보았다. 땅을 갈아 부드럽게 만들어줘야 생명 씨앗이 쉽게 뿌리를 내려 자라게 되는 것이다. 농사짓기가 도시인에게는 이렇게 힘든 일이지만 농민들에게는 자연을 애무하며 생명을 잉태시키는 신나는 창조행위가 된다고 생각했다.
오후 늦게야 점심 겸 저녁으로 농민들과 밥을 달게 먹으며 진심으로 감사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우리 인간의 오만한 모습을 경고한 고르비의 강연을 새롭게, 부끄럽게 떠올렸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겨레 인기기사>
■ 박근혜, 장준하 선생 유족과 화해 시도했지만…
■ 박근혜 경선 캠프 벌써 ‘권력·노선투쟁’ 조짐
■ 안철수쪽 페이스북에 ‘진실의 친구들’ 개설
■ 망막 전달신호 해독…시각장애인 ‘빛볼 날’ 성큼
■ 우리나라서 올림픽 폐막식을 했다면 어땠을까?
■ ‘고의패배’ 배드민턴 대표팀 코치진 제명
■ [화보] 연재가 돌아왔어요!
한완상 전 부총리
■ 박근혜, 장준하 선생 유족과 화해 시도했지만…
■ 박근혜 경선 캠프 벌써 ‘권력·노선투쟁’ 조짐
■ 안철수쪽 페이스북에 ‘진실의 친구들’ 개설
■ 망막 전달신호 해독…시각장애인 ‘빛볼 날’ 성큼
■ 우리나라서 올림픽 폐막식을 했다면 어땠을까?
■ ‘고의패배’ 배드민턴 대표팀 코치진 제명
■ [화보] 연재가 돌아왔어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