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6월19일 전남 여수 돌산도 대미산 동굴에서 신호수의 주검이 발견된 직후 경찰관들이 현장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당시 신호수는 팬티만 입은 상태였고, 목에는 와이셔츠가 묶여 있었으며, 허리띠에 양팔이 묶인 채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김형태 변호사 제공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9) 신호수 ‘자살 위장’ 사건
(19) 신호수 ‘자살 위장’ 사건
“여보시오. 신씨 망자(申氏 亡者). 혼 맞으러 오시시오. 우리 신씨 영 망자씨는 하루 액이 사나왔던가 원맥이 그만친가. 거리 객사 귀신 되옵시고 거리 노중귀가 되야서 좋은 곳에 못가시고. 친구 간 데는 나 못가고 나 가는 데는 친구 못왔다가.
우리 불쌍한 신씨 망자가 좋은 국토 연화대로 이 굿 받아 가신다니. 산신아 산문 열어 오시시고 길신님은 길을 열어 오시시고. 넋 맞으러 왔으니 혼이래도 어서 오시고 넋이래도 오시시오.”
제 양팔을 허리띠로 묶은 채 목을 맸다?
그렇다. 신호수는 아주 오래전 스물둘, 꽃 같은 나이에 저 머나먼 남녘 섬 돌산 삐죽삐죽한 바위굴에서 목이 매인 채로 죽었다. 신씨 망자다. 신씨 망자씨는 하루 액이 사나왔던가, 집에서 못 죽고 거리에서 죽은 귀신이 되었다. 저 간 데 나 못가고 나 가는 데 저 못 온다.
태풍으로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던 날, 나는 <진도 씻김굿>을 들으며 신씨 망자 좋은 국토 연화대로 가시라고 산신님께 길신님께 빌었다. 아니, 그의 혼백은 이미 하늘로 땅으로 흩어져 다 사라졌을 테니, 나 스스로를 위로한 거였다.
가까이는 용산 남일당 망루에서 새까맣게 타죽은 세입자 노인으로부터, 멀리는 60년도 더 전 한국전쟁 당시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가 마을 뒷산에서 군인들 총을 맞고 흙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져 죽어간 수천, 수만의 보도연맹원들까지. 하는 일로, 나는 수없는 억울한 죽음들을 보아왔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도, 그 일이 막상 나나 내 주변에 닥쳐오면 애달파하는 게 인지상정일 터. 그런데 멀쩡한 사람들을 제 잇속을 위해 죽이고 죽는 일이 끝없이 되풀이된 게 이 땅의 역사이니.
이건 뭐, 남과 북,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제 명대로 살려면 뜻을 하나로 모아 어디 지리산 천왕봉쯤에서 씻김굿이라도 한판 벌여야 하렷다!
2001년 의문사 위원회 시절, 나는 신호수의 사진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무슨 악몽이나 환상을 컬러사진으로 찍어 놓은 게 아닌가 싶었다. 여려 보이는 청년이 하얀 팬티 하나만 걸친 채 바위틈에 누워 있다. 얼굴이며 온몸도 희고, 목에는 와이셔츠가 수건처럼 둘둘 말려 걸려 있다. 그리고 양다리. 양말을 신은 발목 바로 위는 둥그렇게 한 바퀴 돌아가며 살이 허옇게 움푹 파였고 그 아래로 피가 빨갛게 흘러내렸다.
애잔한 표정으로 감은 눈에, 고개가 약간 왼쪽으로 기울었는데 머리는 80년대 유행하던 장발.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땅에 내려놓았을 때 모습이 저랬을까. 설핏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1986년 6월19일 오전 10시쯤 방위병 셋이 여수시 돌산읍 대미산에서 산딸기를 따먹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산은 화강암 바위들이 깨져 아래로 밀려 내려가면서 산 중턱을 수북이 덮었다. 온통 삐죽삐죽한 돌덩이들이 엇갈려 쌓인 틈새로 굴이 여기저기 형성되어 있다. 그들은 산비둘기를 쫓아가다가 동굴까지 가게 되었다. 한 친구가 아래쪽으로 뚫린 굴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는 기겁했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어떤 남자가 팬티만 입고 허리띠에 양팔이 묶인 채 서 있었는데 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웬 사람이 팬티만 입고 서 있기에 깜짝 놀라 나왔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사체의 몸통과 양팔이 차렷 자세로 허리띠로 묶여 동굴에 매달려 있었고, 쌀알보다 조금 큰 구더기가 양 발목과 목 부분에 있었습니다. 하얀 양말을 신었는데 붉은 피가 배어 있었습니다. 양 발목은 둥글게 패어 있었고 그곳에 구더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매달려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나중에 경찰로부터 바지와 와이셔츠를 묶어 바지 쪽에 매듭을 지어 바위 틈새에 끼워 고정시키고 와이셔츠 쪽은 목을 매었다고 들었습니다. 바위 틈새에 끼우려면 누가 받쳐주거나 하면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혼자 올라가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경찰은 동네 의사를 불러 동굴 밖 바위 위에 놓인 주검을 잠깐 살펴보게 하고는 그대로 매장을 해버렸다. 의사는 몸에 아무 상처가 없고 스스로 목매 죽은 것이라 결론을 냈다.
당시 염을 해주었던 읍사무소 직원은 절대로 자살일 수 없다고 했다.
신호수는 삐라 때문에 연행됐다
형사는 4시간만에 훈방했다지만
3일간 조사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는 8일 뒤 여수의 바위굴에서
목을 매단 주검으로 발견됐다 컬러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험한 동굴에 갔다 온 날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시커멓고 커다란 무언가가
신음 소리를 내며 덮쳐왔다 일명 장흥공작, 대공계 형사 차덕수의 변명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아버지의 항의로 매장된 지 무려 20일이 지난 7월8일 공동묘지에서 약식부검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때 아들 신호수와 해수욕장에서 분식집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국회 앞에서 400일 넘게 풍찬노숙도 했다. 그리고 2000년 8월 내 사무실에 찾아와 도망가려는 나를 잡아다 의문사 위원회에 끌어 앉힌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금공장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대학 응시 자격을 얻었다. 1984년부터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서 방위병으로 1년간 복무한 뒤 인천에서 가스 배달을 했다. 1986년 6월11일 오후 2시쯤, 신호수는 인천 한 가스충전소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계 차덕수 형사 등 세 명의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었다. 형사들은 영장도 없이 그를 잡아갔다. 그리고 8일 뒤인 6월19일 전남 여수 돌산도 산속 동굴에서 와이셔츠에 목이 감겨 매달린 채 발견된 거였다. 그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차덕수는 6월11일 신호수를 불온 전단(삐라) 34장을 소지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연행해 조사하다가 4시간 만인 그날 저녁 6시 훈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일 뒤 신호수가 머나먼 돌산도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때까지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명 장흥공작. 서부경찰서 대공계는 그 전해 10월부터 신호수를 내사해왔다. 신호수는 방위병 시절 부대 부근에 방을 얻어 동료와 함께 자취를 했다. 병역을 마치고 그 방에서 이사를 한 뒤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도배를 하다가 방바닥에서 ‘전두환 타도’ 같은 글귀가 쓰여 있는 불온 유인물을 수십장 발견했다. 이걸 시작으로 신호수에 대한 은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 전단들은 방위병들이 훈련 도중 인근 야산에서 주운 것으로, 이걸 모아 부대에 제출하면 포상휴가를 갈 수 있다는 기대에서 신호수에게 몰아주었던 거였다. 그런데 신호수가 이걸 방바닥 비닐장판 아래 보관하다가 그만 깜빡하고 그냥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 차덕수를 비롯한 대공계 형사들은 별 볼 일 없는 사건이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한 형사는 이랬다. “이 사건은 C급 공작으로 승인이 났고 1년에 배당된 할당을 채우기 위해서 공작을 하기 때문에 C급 공작이라고 해봐야 가치도 없는 것도 예산을 배당받기 위해 올리기도 합니다. 그때 김정묵 사건으로 여러 명 승진하였습니다. 그때는 어거지로 만든 사건들이 좀 있잖아요.” 당시 납북어부 김정묵은 한달여에 걸친 엄청난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상 간첩죄로 처벌받았다. 2007년 대법원은 과거 잘못된 판결 중 하나로 재심이 필요한 사건이라 밝힌 바 있다. 차덕수는 신호수를 연행 4시간 만에 혐의가 없어서 풀어주면서 지리를 모른다고 해서 차로 서울역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인천에 가는 차비조로 2000원까지 주어 보냈노라고도 했다. 자신들 말마따나 억지로라도 사건을 만들던 시절에, 10개월 공들인 사건을 단 4시간 만에 풀어주었다고? 하다못해 이적표현물 소지죄로라도 엮을 수가 있는데. 신호수는 서부경찰서 관내 응암초등학교를 다녔고, 방위병 시절 그 경찰서 부근을 거쳐 출퇴근했기에 지리를 몰랐다는 건 전혀 진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수금한 돈 12만원을 아직 회사에 입금하지 않은 상태였다. 연행 시 소지품 압수를 통해 이를 알 수밖에 없었던 차덕수가 새삼 차비 2000원을 주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수십년 세월 거리에서 울고 다닌 아버지 2001년, 나는 조사관들과 여수 돌산도 대미산에 가보았다. 가파른 산에 깨진 바윗덩이들이 덮여 있어서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예의 그 동굴. 사진 속 신호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선뜻 굴 안으로 들어가지질 않았다. 자살이라고? 그 자리에 서보니 단박에 ‘아니’ 하고 답이 나왔다. 죽으려고 저 머나먼 인천에서 이 섬뜩한 지형의 동굴까지 찾아온다? 거기 그런 동굴이 있는지 그 누가 알 건가. 죽는 건 좋은데 이 험한 산에까지는 왜 올라온다니. 목에 걸 끈도 준비 않고. 동굴 바닥에 서서 와이셔츠를 말아 끼워넣을 틈이 위에 어디쯤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고 사다리나 무동을 태우지 않는 한 3미터 가까이 되는 그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목을 맨 사람이 어찌 허리띠로 제 양팔을 몸에 묶는다는 건가. 자살하면서 타살로 위장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엇보다도 과거 현장검증 당시 굴 안에 주민등록증 같은 소지품 타다 남은 것들이 있었는데 정작 라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건 확실히 타살이었다. 2002년 의문사위원회 시절, 일본 법의학자는 신호수의 양 발목 깊은 상처는 ‘쇠로 된 족쇄 같은 것이 작용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한 와이셔츠로는 신호수 목에 있다는 표피박탈 색흔이 생길 수가 없다며 다른 끈으로 타살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누가 그랬을까. 의문사위원회는 심증만 있을 뿐, 당일 석방했다는 차덕수의 변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증거를 찾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으로 끝을 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새로운 진술이 나왔다. 차덕수의 동료는 신호수가 연행 당일 석방되지 않았고 분명히 서부서에서 3일가량 더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 훈방되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위원회는 이를 토대로 ‘서부경찰서 수사관 차덕수 등이 장흥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신호수가 사망에 이르자 자살로 위장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한 것인지, 그 진상이 속시원하게 밝혀진 건 아니었다. 그 험한 동굴에 들어갔다 온 날 밤, 나는 밤새도록 무서운 악몽에 시달렸다. 시꺼멓고 커다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나를 덮쳐왔다. 꼭 거기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땀이 난다. 그 시꺼먼 형체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외치는 신호수의 원혼이었을까, 아니면 저 여린 청년까지 제물로 삼켜버린, 증오에 가득 찬 이 땅의 반공 이데올로기 귀신이었을까. 그래, 수십년 세월을 거리에서 울고 다닌 아버지의 아들, 신씨 망자여, 부디 잘 가소. “오늘 불쌍한 신씨 망자씨가 꽃을 받고서 극락가고 꽃을 받고서 세왕가고. 왕생극락 가시시고 청춘상을 가시시고. 꽃은 꺾어서 머리 꽂고 잎은 띄어 채견 보고 왕생극락 가자세라. 땅을 넘어 극락가고 땅을 넘어 세왕가소.”
신호수 주검 발목 부위(위)의 살은 허옇게 움푹 패었고 그 아래로 피가 빨갛게 흘러내렸다. 일본 법의학자는 ‘쇠로 된 족쇄 같은 게 작용해서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아래는 신호수의 옷가지와 신발.
형사는 4시간만에 훈방했다지만
3일간 조사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는 8일 뒤 여수의 바위굴에서
목을 매단 주검으로 발견됐다 컬러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험한 동굴에 갔다 온 날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시커멓고 커다란 무언가가
신음 소리를 내며 덮쳐왔다 일명 장흥공작, 대공계 형사 차덕수의 변명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아버지의 항의로 매장된 지 무려 20일이 지난 7월8일 공동묘지에서 약식부검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때 아들 신호수와 해수욕장에서 분식집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국회 앞에서 400일 넘게 풍찬노숙도 했다. 그리고 2000년 8월 내 사무실에 찾아와 도망가려는 나를 잡아다 의문사 위원회에 끌어 앉힌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금공장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대학 응시 자격을 얻었다. 1984년부터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서 방위병으로 1년간 복무한 뒤 인천에서 가스 배달을 했다. 1986년 6월11일 오후 2시쯤, 신호수는 인천 한 가스충전소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계 차덕수 형사 등 세 명의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었다. 형사들은 영장도 없이 그를 잡아갔다. 그리고 8일 뒤인 6월19일 전남 여수 돌산도 산속 동굴에서 와이셔츠에 목이 감겨 매달린 채 발견된 거였다. 그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차덕수는 6월11일 신호수를 불온 전단(삐라) 34장을 소지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연행해 조사하다가 4시간 만인 그날 저녁 6시 훈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일 뒤 신호수가 머나먼 돌산도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때까지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명 장흥공작. 서부경찰서 대공계는 그 전해 10월부터 신호수를 내사해왔다. 신호수는 방위병 시절 부대 부근에 방을 얻어 동료와 함께 자취를 했다. 병역을 마치고 그 방에서 이사를 한 뒤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도배를 하다가 방바닥에서 ‘전두환 타도’ 같은 글귀가 쓰여 있는 불온 유인물을 수십장 발견했다. 이걸 시작으로 신호수에 대한 은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 전단들은 방위병들이 훈련 도중 인근 야산에서 주운 것으로, 이걸 모아 부대에 제출하면 포상휴가를 갈 수 있다는 기대에서 신호수에게 몰아주었던 거였다. 그런데 신호수가 이걸 방바닥 비닐장판 아래 보관하다가 그만 깜빡하고 그냥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 차덕수를 비롯한 대공계 형사들은 별 볼 일 없는 사건이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한 형사는 이랬다. “이 사건은 C급 공작으로 승인이 났고 1년에 배당된 할당을 채우기 위해서 공작을 하기 때문에 C급 공작이라고 해봐야 가치도 없는 것도 예산을 배당받기 위해 올리기도 합니다. 그때 김정묵 사건으로 여러 명 승진하였습니다. 그때는 어거지로 만든 사건들이 좀 있잖아요.” 당시 납북어부 김정묵은 한달여에 걸친 엄청난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상 간첩죄로 처벌받았다. 2007년 대법원은 과거 잘못된 판결 중 하나로 재심이 필요한 사건이라 밝힌 바 있다. 차덕수는 신호수를 연행 4시간 만에 혐의가 없어서 풀어주면서 지리를 모른다고 해서 차로 서울역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인천에 가는 차비조로 2000원까지 주어 보냈노라고도 했다. 자신들 말마따나 억지로라도 사건을 만들던 시절에, 10개월 공들인 사건을 단 4시간 만에 풀어주었다고? 하다못해 이적표현물 소지죄로라도 엮을 수가 있는데. 신호수는 서부경찰서 관내 응암초등학교를 다녔고, 방위병 시절 그 경찰서 부근을 거쳐 출퇴근했기에 지리를 몰랐다는 건 전혀 진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수금한 돈 12만원을 아직 회사에 입금하지 않은 상태였다. 연행 시 소지품 압수를 통해 이를 알 수밖에 없었던 차덕수가 새삼 차비 2000원을 주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수십년 세월 거리에서 울고 다닌 아버지 2001년, 나는 조사관들과 여수 돌산도 대미산에 가보았다. 가파른 산에 깨진 바윗덩이들이 덮여 있어서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예의 그 동굴. 사진 속 신호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선뜻 굴 안으로 들어가지질 않았다. 자살이라고? 그 자리에 서보니 단박에 ‘아니’ 하고 답이 나왔다. 죽으려고 저 머나먼 인천에서 이 섬뜩한 지형의 동굴까지 찾아온다? 거기 그런 동굴이 있는지 그 누가 알 건가. 죽는 건 좋은데 이 험한 산에까지는 왜 올라온다니. 목에 걸 끈도 준비 않고. 동굴 바닥에 서서 와이셔츠를 말아 끼워넣을 틈이 위에 어디쯤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고 사다리나 무동을 태우지 않는 한 3미터 가까이 되는 그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목을 맨 사람이 어찌 허리띠로 제 양팔을 몸에 묶는다는 건가. 자살하면서 타살로 위장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엇보다도 과거 현장검증 당시 굴 안에 주민등록증 같은 소지품 타다 남은 것들이 있었는데 정작 라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건 확실히 타살이었다. 2002년 의문사위원회 시절, 일본 법의학자는 신호수의 양 발목 깊은 상처는 ‘쇠로 된 족쇄 같은 것이 작용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한 와이셔츠로는 신호수 목에 있다는 표피박탈 색흔이 생길 수가 없다며 다른 끈으로 타살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누가 그랬을까. 의문사위원회는 심증만 있을 뿐, 당일 석방했다는 차덕수의 변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증거를 찾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으로 끝을 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새로운 진술이 나왔다. 차덕수의 동료는 신호수가 연행 당일 석방되지 않았고 분명히 서부서에서 3일가량 더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 훈방되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위원회는 이를 토대로 ‘서부경찰서 수사관 차덕수 등이 장흥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신호수가 사망에 이르자 자살로 위장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한 것인지, 그 진상이 속시원하게 밝혀진 건 아니었다. 그 험한 동굴에 들어갔다 온 날 밤, 나는 밤새도록 무서운 악몽에 시달렸다. 시꺼멓고 커다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나를 덮쳐왔다. 꼭 거기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땀이 난다. 그 시꺼먼 형체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외치는 신호수의 원혼이었을까, 아니면 저 여린 청년까지 제물로 삼켜버린, 증오에 가득 찬 이 땅의 반공 이데올로기 귀신이었을까. 그래, 수십년 세월을 거리에서 울고 다닌 아버지의 아들, 신씨 망자여, 부디 잘 가소. “오늘 불쌍한 신씨 망자씨가 꽃을 받고서 극락가고 꽃을 받고서 세왕가고. 왕생극락 가시시고 청춘상을 가시시고. 꽃은 꺾어서 머리 꽂고 잎은 띄어 채견 보고 왕생극락 가자세라. 땅을 넘어 극락가고 땅을 넘어 세왕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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