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국회의원모임’과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연 ‘원자폭탄 피해자 증언대회’ 참석자들이 원폭 피해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히로시마 원폭투하 60년, 피해자 증언대회
1945년 8월6일 새벽. 순간이었다. 푸르게 부서지는 여명을 찢으며 빛과 열과 폭풍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일본 히로시마의 한쪽,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판자촌은 그렇게 지상에서 사라졌다. “‘번쩍’ 하는가 싶더니 ‘쾅’ 하는 소리가 났지. 천지가 캄캄해졌어.” 당시 17살이었던 김일조(77) 할머니가 말하는 원자폭탄은 눈과 귀와 온몸의 감각을 흔들어 놓는 공포 그 자체였다. 갓 결혼한 김씨의 뱃속에는 6개월 된 아이가 있었다.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딸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원폭이 떨어진 지 21년 뒤, 일본이 아닌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정숙희(39·여)씨는 ‘히로시마’를 몰랐다. 그런 정씨의 두 다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중학생 때는 빈혈까지 찾아왔다. 30대 중반이 돼서야 찾은 병원에서 ‘양쪽 대퇴부 부위 뼈가 없다’는 어이없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가 4살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씨는 자신의 딸마저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것에 절망했다. 갓 결혼해서 가진 아이 태어나자마자 숨졌어
아버지 피폭상처 딸 · 손자에게 대물림
차별 두려워 숨겨온 나날…특별법 제정 앞장 뜻모아 6일로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지 60년이 된다.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원폭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주최로 ‘원자폭탄 피해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원폭피해자 1세는 물론, 원하지 않는 질병의 고통을 물려받은 원폭 2세와 3세 등 50여명이 참여한 이날 증언대회는 그들의 입으로, 그들의 고통을 전하는 첫 자리였다.
억눌렀던 기억을 60년 만에 되살리는 과정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자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자신을 내던지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미 스러진 수많은 삶과 앞으로 계속될 또 다른 삶을 붙잡기 위한 살풀이기도 했다. 원폭피해자 2세들의 생존권을 처음으로 세상에 들고 나온 뒤 정력적인 활동을 해오다 5월에 숨진 고 김형율 전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의 아버지 김봉대(62)씨는 “형율이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원폭피해자들을 찾아다녔다”며 “이제라도 한국과 일본 정부는 물론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도 원폭 2세들의 생존권 보장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증언대회 참가자들은 원폭 투하 당시의 영상이 흘러나오자 ‘과연 저것이 우리 머리 위로 떨어졌던가’라는 생각에 쉽사리 화면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김 전 회장에 이어 7월부터 원폭2세환우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씨는 “김형율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차별이 두려워 원폭피해자 2세라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며 “한 달을 살아도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몇 세대가 될지 모르는 고통의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 특별법 제정에 앞장서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날 증언대회에 앞서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의 대표 발의로 ‘원자폭탄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발의가 이뤄졌다. 여야 국회의원 22명이 공동발의한 특별법안은 △원폭피해자 실태조사·진상규명 △피해자와 자녀, 유족들에 대한 의료·생활 지원 △피해자 인권보장 및 명예회복을 주요 뼈대로 하고 있다. 조 의원은 “60년간 방치돼온 원폭피해자들에 대해 한국 정부가 최소한의 역할도 하지 못한 점에 사과드린다”며 “원폭피해자 문제를 공론화하고 특별법 발의로 이어지기까지 60년이 흐른 만큼 앞으로도 국회 심의 과정이나 예산 책정 등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법 제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남일 기자, 김연주 인턴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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