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군 옷 빌려입고 항일 대장정-청산리 ‘숨은 영웅’ 양림
광복60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열전 ① 청산리 ‘숨은 영웅’ 양림(1901?∼1936)
광복 60돌, 두 세대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그동안 ‘오른쪽의 외눈박이 독립운동사’만을 배워왔다. 분단과 이념대립의 아픈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는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정부는 올해 비로소 김산과 김철수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유공자로 추서하기로 했다. 그러나 민족 해방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싸우다 숨진 많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한겨레>는 좌우 균형잡힌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기초를 닦는 차원에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10명의 일대기를 그들이 당시 활동했던 현장 취재를 통해 매주 두 차례(화·금)씩 싣는다.
말라붙은 황허(황하)를 수백킬로미터나 따라 돌아 도착한 중국 산시성의 작은 도시 스러우. 지난달 16일 찾은 스러우 끝자락, 길도 없는 황토 언덕 위에 선 ‘홍군동정기념관’은 찾는 이 없이 굳게 잠겨 있었다. 관리인은 “조선인이 한 명 있긴 한데 …”라면서도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비스티’라는 낯선 이름이 붙은 입을 꽉 다문 젊은 군인의 흑백 사진이 있었다. 짧은 사진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비스티 혹은 양림, 양녕, 양주평. 조선인. 1936년 2월20일 늦은 8시. 홍군 제15군단 75사 돌격대 40여명이 참모장 비스티를 따라 황허를 건너 동쪽으로 진입. 다음날 새벽 스러우 하가요촌 점령. ‘동정’(東征) 항일을 위한 황허 도하작전을 마친 뒤 복부에 총을 맞고 전사.”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군의 토벌을 피해 결행한 2만5천리 대장정에 참여한 한국인은 10여명인데, 마지막까지 남은 둘 중 한 사람인 양림이 쓰러진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선독립 지름길” 판단
중국공산당 들어가 투쟁
황허 도하 이끌다 산화 장정을 마무리한 중국공산당 홍군이 본격적인 일본군과의 전투를 선언하고 나선 ‘동정항일’에 한국 독립군 출신이 선봉장을 맡았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이다. 산시성 군벌군대의 총에 맞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하고 한나절을 신음하던 양림은 조국 광복을 향한 장정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대륙의 황막한 땅에 잠들었다. “지린성 왕칭현은 우리 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소재지였소. 지난해 2월부터 이 연성소를 설립하고 훈련에 착수하였는데, 나는 거기 한 교관이 되어 교수에 종사하였소.” 15년을 거슬러 올라간 1921년 3월1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96호)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한 장교가 쓴 장문의 글이 실렸다. ‘북로아군실전기’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청산리 전투의 시작과 끝을 세세하게 갈무리한 이 글을 쓴 사람은 김훈, 그가 바로 양림이다.
항일 무장독립 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 한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이후 대륙을 흔들며 분출한 중국 사회주의 혁명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탓에 양림은 한국에서 잊혀졌다. 황허펄에 묻힌 그의 마지막 흔적이 숨진 뒤 69년 만에 ‘뒤늦은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 1901년(또는189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양림의 본명은 김훈이다. 1919년 평양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뒤, 그 해 가을 중국 지린성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간다. 당시 혁명가 교육의 산실이었던 그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양림은 이듬해 5월 김좌진이 교장을 맡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교관이 된다. 같은해 10월 그는 1개 중대를 이끌고 청산리 백운평 골짜기 절벽 위에 매복한다. 나뭇가지와 낙엽으로 몸을 숨긴 이들은 독립군이 계곡을 통해 도망쳤다는 허위 정보에 속아 백운평으로 들어선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엿새 동안 1000여명이 넘는 일본군을 사살하고 독립군의 완벽한 승리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에서 양림은 빗발치는 총탄을 온몸으로 기억한 뒤 이를 <독립신문>에 글로 풀어냈다. 양림은 학교를 바꿔가며 모두 여섯차례에 걸쳐 군사교육을 받거나 가르쳤다.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당시 독립군은 물론, 홍군 안에서도 이 정도로 군사 지식을 쌓은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21년 그는 윈난(운남)강무학교 포병과의 문을 두드린다. 이곳에서 양림은 쑨원의 국민혁명을 접하지만, 이어 당시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저우에서 저우언라이(주은래)와 운명적 조우를 한다. 그는 25년 중국공산당에 발을 들여놓는다. 양림은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부주임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인은 물론 항일 투쟁을 위해 이곳을 거쳐간 수십명의 조선 학생들을 직접 가르친다. 그러나 현재 기념관으로 변한 이곳에서 양림의 자취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중국공산당 조직사 자료>를 보면, 33~34년 사이 중국 공농홍군 제1군단장 린뱌오(임표)와 정치위원에 이어 양림은 서열 3위인 참모장을 맡았다. 린뱌오 등이 나중에 원수급까지 올라간 것에 비춰 볼 때 양림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전시물 어디에도 연병장을 땀으로 적셨을 양림과 한국 학생들의 흔적은 없었다. 한국에선 이념문제로 존재가 지워졌던 이 혁명가는 혁명의 끝을 보지 못한 탓인지 중국에서도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이름은 광둥혁명역사박물관 자료실에서 어렵게 발견됐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교직원 명부인 <황포군교 동학록>에는 수천명의 이름들 사이로 25살 청년 ‘양녕’이란 이름이 실려 있다. 그는 양녕·비스티·양주평·주동무 등 여러 이름을 썼다.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다시 군사교육을 받은 그는 30년 중국으로 돌아와 항일의 전초기지인 동북지역으로 간다. 만주성위 군사위 서기까지 오른 그는 34년 10월 중국공산당 홍군의 중심세력인 ‘홍색간부단’ 참모장으로 장정에 오른다. 양림이 이 즈음에 신문에 발표한 ‘홍군의 북상 항일선언을 옹호한다’라는 글은 당시 중국혁명에 뛰어든 한국인들의 주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국민당은 중국을 일제에 팔아먹으려 한다. 오직 소비에트 및 홍군만이 ‘항일’의 유일한 대표자다.” 그에게 중국 혁명은 ‘항일 투쟁’과 ‘조선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고난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사학)는 “양림은 혁명의 성공이 한국 해방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자기 나라를 찾아야 하는 약소민족 혁명가의 한계와 고민을 함께 안고 있었을 것”이라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시의 역사적 조건 안에서 그의 선택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광저우·스러우/글·사진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중국공산당 들어가 투쟁
황허 도하 이끌다 산화 장정을 마무리한 중국공산당 홍군이 본격적인 일본군과의 전투를 선언하고 나선 ‘동정항일’에 한국 독립군 출신이 선봉장을 맡았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이다. 산시성 군벌군대의 총에 맞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하고 한나절을 신음하던 양림은 조국 광복을 향한 장정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대륙의 황막한 땅에 잠들었다. “지린성 왕칭현은 우리 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소재지였소. 지난해 2월부터 이 연성소를 설립하고 훈련에 착수하였는데, 나는 거기 한 교관이 되어 교수에 종사하였소.” 15년을 거슬러 올라간 1921년 3월1일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96호)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한 장교가 쓴 장문의 글이 실렸다. ‘북로아군실전기’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청산리 전투의 시작과 끝을 세세하게 갈무리한 이 글을 쓴 사람은 김훈, 그가 바로 양림이다.
항일 무장독립 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 한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이후 대륙을 흔들며 분출한 중국 사회주의 혁명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탓에 양림은 한국에서 잊혀졌다. 황허펄에 묻힌 그의 마지막 흔적이 숨진 뒤 69년 만에 ‘뒤늦은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 1901년(또는189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양림의 본명은 김훈이다. 1919년 평양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뒤, 그 해 가을 중국 지린성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간다. 당시 혁명가 교육의 산실이었던 그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양림은 이듬해 5월 김좌진이 교장을 맡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교관이 된다. 같은해 10월 그는 1개 중대를 이끌고 청산리 백운평 골짜기 절벽 위에 매복한다. 나뭇가지와 낙엽으로 몸을 숨긴 이들은 독립군이 계곡을 통해 도망쳤다는 허위 정보에 속아 백운평으로 들어선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엿새 동안 1000여명이 넘는 일본군을 사살하고 독립군의 완벽한 승리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에서 양림은 빗발치는 총탄을 온몸으로 기억한 뒤 이를 <독립신문>에 글로 풀어냈다. 양림은 학교를 바꿔가며 모두 여섯차례에 걸쳐 군사교육을 받거나 가르쳤다.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당시 독립군은 물론, 홍군 안에서도 이 정도로 군사 지식을 쌓은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21년 그는 윈난(운남)강무학교 포병과의 문을 두드린다. 이곳에서 양림은 쑨원의 국민혁명을 접하지만, 이어 당시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저우에서 저우언라이(주은래)와 운명적 조우를 한다. 그는 25년 중국공산당에 발을 들여놓는다. 양림은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부주임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인은 물론 항일 투쟁을 위해 이곳을 거쳐간 수십명의 조선 학생들을 직접 가르친다. 그러나 현재 기념관으로 변한 이곳에서 양림의 자취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중국공산당 조직사 자료>를 보면, 33~34년 사이 중국 공농홍군 제1군단장 린뱌오(임표)와 정치위원에 이어 양림은 서열 3위인 참모장을 맡았다. 린뱌오 등이 나중에 원수급까지 올라간 것에 비춰 볼 때 양림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전시물 어디에도 연병장을 땀으로 적셨을 양림과 한국 학생들의 흔적은 없었다. 한국에선 이념문제로 존재가 지워졌던 이 혁명가는 혁명의 끝을 보지 못한 탓인지 중국에서도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이름은 광둥혁명역사박물관 자료실에서 어렵게 발견됐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교직원 명부인 <황포군교 동학록>에는 수천명의 이름들 사이로 25살 청년 ‘양녕’이란 이름이 실려 있다. 그는 양녕·비스티·양주평·주동무 등 여러 이름을 썼다.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다시 군사교육을 받은 그는 30년 중국으로 돌아와 항일의 전초기지인 동북지역으로 간다. 만주성위 군사위 서기까지 오른 그는 34년 10월 중국공산당 홍군의 중심세력인 ‘홍색간부단’ 참모장으로 장정에 오른다. 양림이 이 즈음에 신문에 발표한 ‘홍군의 북상 항일선언을 옹호한다’라는 글은 당시 중국혁명에 뛰어든 한국인들의 주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국민당은 중국을 일제에 팔아먹으려 한다. 오직 소비에트 및 홍군만이 ‘항일’의 유일한 대표자다.” 그에게 중국 혁명은 ‘항일 투쟁’과 ‘조선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고난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사학)는 “양림은 혁명의 성공이 한국 해방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자기 나라를 찾아야 하는 약소민족 혁명가의 한계와 고민을 함께 안고 있었을 것”이라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시의 역사적 조건 안에서 그의 선택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광저우·스러우/글·사진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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