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 가족] 엄마의 콤플렉스
할머니는 무릎이 안 좋았다. 앉았다 일어설 때면 바닥을 집고 ‘에구구’ 용을 쓰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곤 하셨다. 초등학교 때 몇 년을 외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대학교 1학년이었다. 농활을 떠난다고 잔뜩 설레며 배낭을 싸다가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나서 배낭을 멘 채 병실을 찾았는데, 얇은 홑이불 아래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몸을 웅크리고 계셔서 하마터면 못 알아보고 지나칠 뻔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농활에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이제 삼십년이 지나고 보니 할머니 얼굴도 아른아른한데, 할머니가 무릎을 절뚝거리며 차려주시던 밥상에 대한 기억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해진다. 외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6·25 때 피난을 못 떠나고 서울에 머물러 있던 죄로 외할아버지는 이쪽저쪽 끌려다니며 고초를 치르셨고 그 후유증으로 두어 해를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후 할머니는 닥치는 대로 보따리장사를 해가며 여섯 남매를 키우셨는데 그 와중에도 찬을 만드는 일만큼은 좀처럼 딸들에게 맡기질 않으셨다. 할머니 밥상엔 국과 찌개, 나물과 구이와 조림반찬이 빠지지 않았다. 고추나 가지, 콩나물 같은 흔하고 값싼 식재료로도 생채와 숙채와 구이와 조림의 다양한 변주를 해내신 덕에 가난한 밥상은 제법 풍성했다.
외갓집 부엌은 안방과 붙어 있었다. 부뚜막과 가마솥이 있는 재래식 부엌을 개량해서 타일을 깔고 수도를 들였는데 새벽녘 안방에서 자고 있으면 타일 위에 한쪽 다리를 끌며 지치는 할머니의 슬리퍼 소리, 부뚜막에 앉았다 일어설 때 내는 에구구 소리가 고소한 밥 냄새와 함께 전해졌다. 간혹 동도 트기 전부터 할머니의 발소리와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잠을 설치게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평소와 달리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추석과 설, 할아버지 제사 그리고 할머니 생신 때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생신 때 찾아오는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떡을 안치고 전을 부쳐냈다. 그런 날엔 같이 사는 나보다 오랜만에 찾은 손주들 밥숟가락에 더 분주히 반찬을 올려주시는 할머니가 야속했다. ‘다 떠나고 밤이 되면 끙끙 앓으면서 무릎을 밟아달라고 하시겠지. 내가 하나 봐라. 이불 쓰고 모른 척할 거야.’ 앙칼진 마음을 품었던 건 확실한데 실제 실행에 옮겼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안 그랬길 바랄 뿐이다.
추석을 앞두고 부엌 바닥에서 나물거리를 다듬고 일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에구구’ 무릎을 붙잡았다. 나물 양재기를 든 채 싱크대를 짚고 일어서면서 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할머니 얼굴 대신, 낡은 양은냄비에서 주름진 손으로 퍼주시던 따끈한 두부조림이 떠올랐다. 왜 내가 하면 그 맛이 안 나는지. 임신부 입덧하듯이 간절하게 할머니의 두부조림이 먹고 싶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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