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국경지대인 중국 지린성의 공장 밀집지역에서 지난 9월 초 북한 여성 노동자들이 단체로 이동하고 있다.
[토요판] 르포 - 중국 공장에서 북한 여공 찾기
▶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의 ‘외화벌이’ 인력 송출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가 몰려오자 중국 지린성과 랴오닝성 단둥시 등 북-중 국경지대의 사업가, 인력중개인들의 움직임도 빨라졌습니다. <한겨레>는 9월13일치 8면에서 현지 취재를 통해 그 실태와 현황을 전한 바 있습니다. 중국 땅의 북한 노동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북한 여공이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 대신 중국 땅을 찾는 이유도 살펴봤습니다.
랴오닝·지린성에 2만400여명
북한 정부에 월급 떼여도
돈벌이 찾아 파견경쟁 치열해
외부인과 접촉 못하고 단체생활
숙소 갈 때도 줄지어 행군하듯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한꺼번에 사다주는데
프랑스 향수도 써내더라고요
식품공장이니 화장하지 마라,
귀걸이 차지 마라 해도 듣나요?” 거대한 회색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봤다. ‘철커덩’ 소리와 함께, 닫힌 철문이 약간 빈틈을 보였다. 무작정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중년 남성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순간, 오른발이 뒤로 빠졌다. 같은 한국말이었지만 ‘입니까’의 억양이 남한의 그것과 달랐다. ‘북한 남성 관리인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 임무가 노동자 감시거든요.’ 지난 8월 ‘북한 노동자의 중국행 러시’ 실태에 관한 사전 취재 당시, 중국 현지의 한 취재원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줬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뒤로 더 빠지려는 다리에 힘을 줬다. “한국 사람이에요. 사장 만나러 왔어요. 볼일 보면 알아서 나갈 겁니다.” ‘높은 사람을 대고 보자’는 생각에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공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왼쪽에 보였다. 대답도 듣지 않고 일단 거기로 올라갔다. 마지막 한마디는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갑산’ 노래 속 미싱… ‘언니’ 소리에 눈 마주쳐
‘북한, 김정은 체제 들어 4만명의 인력 파견을 중국과 합의’(일본 도쿄신문),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남북 교역이 중단되며 일감 잃은 북한 봉제공장, 노동자 중국 송출로 살길 모색’(중국 경제관찰보). 최근 북한의 노동자 중국 송출에 관한 외신 보도는 한국보다 앞섰다. 다만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중국 현지의 공장 내부를 직접 살펴보고 그 실태를 전한 뉴스는 없었다. ‘공장은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라고만 했다. 북-중 접경지역인 중국 지린성의 한 복합공단을 찾은 건 지난 9월6일이었다. 현지 관계자의 설명은, 올해 상반기 이후 상당수의 북한 노동자가 이곳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부터 공단을 훑기 시작했다.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대형 비닐공장이었다. 중국인 경비원 왕아무개(59)씨가 나왔다. “북한 여공을 찾아왔다”고 말을 건넸다. 왕씨는 잠시 멈칫하더니 “본 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두 달 전쯤부터였나, 이른 아침 우리 공장 앞으로 (북한 여공) 두 명이 걸어가는 걸 봤어요. 20대 여성이었는데 운동복 차림이었습니다. 원래 공장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좀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나요.” 왕씨의 손가락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다른 공장을 가리켰다. 같은 날 오후 그의 길안내를 떠올리며 더듬더듬 찾아간 곳이 바로 그 ‘회색 철문’ 공장이었다. 2층에 들어선 뒤 비로소 그곳이 의류공장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50여명의 북한 여성이 작업대 앞에 앉아 미싱을 돌리고 있었다. 20~30대로 보였다. 한쪽 벽면 절반을 차지한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천장은 두 층을 튼 만큼 높았고, 작업대는 두팔 길이 너비로 넓었다. 바닥엔 동선을 안내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천조각 하나 떨어져 있는 게 없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공장 전체에 울렸다. 한국 가요 ‘칠갑산’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등장에 놀란 듯 5~6명의 여성이 일손을 멈추고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 여성이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공장 직원으로 보이는 중국인 남성이 쫓아왔다. 일부러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인입니다. 사장 만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딱히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그 또한 사라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작업중인 한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앳된 얼굴에 선명한 아이라인 화장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였다. “전 한국에서 왔어요. 북한에서 오셨죠?” “네.” “북한 어디요?” “평양이요.” “가족들은 거기 있고요? 가족들 보고 싶겠다.” “보고 싶죠….” “일은 안 힘들어요? 임금은 제대로 나와요?” “(주위를 둘러보며) 냄새가….” “나이는요?” “스물셋이에요.” “어? 난 스물아홉인데.” “스물아홉?” “네. 내가 한참 언니네요?” 작업대만 보던 그가 그때 처음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언니’라는 말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여자가 웃었다. 따라 웃었다. 순간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긴장한 탓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는데, 중국인 남성이 돌아왔다. 여성은 급히 작업대로 고개를 돌렸다. 북한 여성 노동자와 나눈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남성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사장은 여기 없다.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월급은 중국 인력의 절반 수준인 1500위안
공장을 나서려는 순간 회색 철문을 통해 줄을 맞춰 들어오는 여성 20여명과 맞닥뜨렸다. 조장으로 보이는 여성이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공장 옆 합숙소에 다녀오는데도 그랬다. 조장이나 관리인의 통솔 없이 이들이 공장과 합숙소의 반경 500m를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이날 오후 공단을 좀더 돌아다닌 끝에 북한 노동자의 중국 진출 실태를 잘 알고 있는 한국 국적의 이철민(가명)씨와 만날 수 있었다. 만남의 전제 조건은 ‘철저한 익명 보장’이었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북한과 거래 관계를 맺기 마련인데, 그 사실이 한국 쪽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주장이었다. “중국 랴오닝성엔 단둥에 2만여명, 지린성엔 훈춘·투먼 등에 400여명의 북한 노동자가 있어요. 대개 6개월 미만의 연수 비자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죠. 올해 처음 정부 대 정부 차원으로 공식 파견된 이들도 있고요. 최근 북한은 기를 쓰고 한 명이라도 더 내보내려고 합니다. 나가서 ‘외화벌이’를 하는 거죠. 한국인이 투자한 공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서류상으로만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면요. 문제는 중국인데, 자국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북한 노동자의 중국행을 반기지 않아요.”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노동자의 중국 진출을 부추긴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선양무역관은 북한이 역대 최대 규모인 12만명의 노동자를 중국에 파견하기로 한 걸 지난 7월에 확인했다고 밝혔다. 노동시장의 혼란을 걱정하는 중국 정부와 달리 중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북한 노동자의 중국 진출은 기회로 통했다. 중국 젊은 인력의 공장 기피 현상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 노동자 인건비의 최대 절반 수준으로 북한 숙련공을 쓸 수 있다. 이씨는 “중국내 북한 여공의 평균 월급은 1500위안 정도로 2000~3000위안을 받는 중국인 노동자보다 크게 적다”고 말했다. 1500위안은 한국 돈으로 26만여원. 임금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성공단 노동자가 받는 평균 월급(110달러)의 갑절이 넘는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한테는 어떨까. 정답은 ‘해당 사항 없음’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직후 한국 정부는 △남북간 교역·교류 중단 △대북 신규 투자 및 진출 불허 △방북 불허 및 북한 주민 접촉 제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5·24 조처를 발표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남북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북한 노동자의 고용도 당연히 ‘불가’다. 낯선 땅 중국에서 ‘외화벌이’에 앞장서고 있는 북한 여성 노동자의 삶이 궁금했다. 이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딱 그 또래죠. 여럿이서 북한 관리인을 가운데 앉혀 놓고 ‘위대하신 우리 ○○○ 동지(관리인 이름)를 받들어’ 하며 놀려요. 관리인은 ‘너네랑 못 놀겠다’ 하고 얼굴 빨개져서 가요. 그 모습을 보며 깔깔깔 웃기도 하고요.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노래방 가고 싶대요. 평양에서도 인기였대요. 아이티(IT) 쪽엔 북한 남성 파견 노동자도 일부 있어요. 자기들끼리 재잘재잘 어떤 남성이 멋있네 얘기해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랴오닝성 단둥시에는 이런 공장이 더 많았다. 수소문 끝에 북한 노동자 파견에 관여하고 있다는 최상준(가명)씨를 만났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모두 가능한 조선족이었다. 최씨에게 북한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을 들여다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듭 부탁했다. 고민하던 그는 ‘일자리를 살펴보러 온 북한 여성’ 행세를 하라는 당부와 함께 단둥의 한 식품가공공장으로 안내했다.
최씨와 함께 찾아간 공장은 담이 높았다. 공장 부지 안에 노동자 숙소가 함께 있었다. “점심시간 30분 동안 숙소로 달려가 밥을 먹고 쉴 틈 없이 돌아와 일한다”는 최씨의 설명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입고한 냉동식품이 녹아버리면 안 되는 탓이었다.
여성들은 허리 높이의 작업대 앞에 서서 식품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있었다. 흰 작업복에 흰 장화 차림이었다. 이들은 고개와 허리를 숙인 고정된 자세로 하루 9~11시간을 버텨야 했다. 공장 안을 둘러본 최씨는 중국인 공장 직원과 한참 얘기를 나눴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공장에 오기 전 최씨가 내건 조건이 입을 막았다. “대신 말 한마디도 하지 마십시오. 남한 사람이 들어간 거 들키면 큰일나요.”
‘쉐보레’ 타는 북한 남성 관리인의 정체는…
공장을 나서자마자 이런저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최씨 또한 익명을 요구했다. “밥줄이 끊기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5~6년 전만 해도 북한에서 나오기가 힘들었어요. 요즘엔 거꾸로예요. 북한은 더 내보내려는데 중국이 문제죠. 지난해 100명을 데려왔어요. 9월 중에 100명이 또 들어옵니다. 단둥에만 북한 여성을 받은 공장이 적어도 40~50개는 돼요.” 이야기는 지난겨울 ‘목욕 시위’로 이어졌다. “뜨거운 물이 1주일에 한번 나오는데, 3일에 한번은 목욕을 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외출이 허락되지 않으니까 생리대 등 필요한 물품은 주문을 받아 한꺼번에 사다주는데 말도 마세요. ‘화장품은 중국제 안 쓴다, 한국제 사와라’ 등, 저번엔 프랑스 향수를 써내더라고요. ‘식품공장이니까 화장하지 마라, 귀걸이 차지 마라’ 해도 말을 듣습니까? 중국인 사장이 임금으로 매달 1500위안을 주는데, 나라에 바치는 돈이랑 공동 경비 등을 다 떼이고 여성들 손엔 150위안 남더라고요. 첫 월급을 여성들에게 직접 줬는데 다음날 출근길에 보니 북한 관리인이 벌써 가져갔대요. 고향에서도 ‘그 집 딸이 파견됐다’는 걸 다 아니까 거기서도 또 떼어간대요. 물론 뗄 것 다 떼고 남은 돈도 그들 처지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어서 파견 경쟁은 치열하죠.” 북한 남성 ‘관리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물었다. “감시하는 역할이죠. 저번엔 여성 60명 나오는데 남자 둘에 통역 한 명까지 붙이겠다고 그래요. 됐다고 했죠. 쓸데없는 인건비가 더 들잖아요. 그들은 여성들과 달리 좋은 숙소에 따로 살거든요. 돈을 어떻게 모으는지 쉐보레 차를 타는 이도 있어요. 북한 영사관에서 관리인들을 소집해 한달에 두세번 회의를 해요. 얼마 전 한 의류공장에서는 중국인 직원이 북한 여성 숙소에 한국 가요를 틀어준 적이 있었는데, 관리인이 엄청 항의하더라고요.” 관리인 몰래 북한 여성 노동자를 만날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대번에 손사래를 쳤다. “지금 같은 때에요? 남한 사람하고 어쩌고 얘기가 돌면 ‘저쪽’에 금방 소문납니다. 앞으로 사업 기회 알아볼 게 많거든요. 절대 안 돼요.” 북-중 접경지역은 최씨처럼 ‘기회’를 살피는 이들로 들썩였다. 북한 관광산업부터 북한 땅의 철광석 개발과 희토류 채취까지 ‘사업 아이템’에 관한 화제는 다양했다. 그들 사이에서 ‘인력 파견’은 북-중 경제교류가 또다른 단계에 진입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값싼 노동력 조달이 필요한 중국 공장과 외화 획득을 늘리려는 북한, 그리고 ‘차이나드림’을 꿈꾸는 북한 여성들에게 그것은 각자의 기회로 해석되기도 했다. 지린성·랴오닝성/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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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번에 사다주는데
프랑스 향수도 써내더라고요
식품공장이니 화장하지 마라,
귀걸이 차지 마라 해도 듣나요?” 거대한 회색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봤다. ‘철커덩’ 소리와 함께, 닫힌 철문이 약간 빈틈을 보였다. 무작정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중년 남성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순간, 오른발이 뒤로 빠졌다. 같은 한국말이었지만 ‘입니까’의 억양이 남한의 그것과 달랐다. ‘북한 남성 관리인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 임무가 노동자 감시거든요.’ 지난 8월 ‘북한 노동자의 중국행 러시’ 실태에 관한 사전 취재 당시, 중국 현지의 한 취재원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줬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뒤로 더 빠지려는 다리에 힘을 줬다. “한국 사람이에요. 사장 만나러 왔어요. 볼일 보면 알아서 나갈 겁니다.” ‘높은 사람을 대고 보자’는 생각에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공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왼쪽에 보였다. 대답도 듣지 않고 일단 거기로 올라갔다. 마지막 한마디는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갑산’ 노래 속 미싱… ‘언니’ 소리에 눈 마주쳐
‘북한, 김정은 체제 들어 4만명의 인력 파견을 중국과 합의’(일본 도쿄신문),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남북 교역이 중단되며 일감 잃은 북한 봉제공장, 노동자 중국 송출로 살길 모색’(중국 경제관찰보). 최근 북한의 노동자 중국 송출에 관한 외신 보도는 한국보다 앞섰다. 다만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중국 현지의 공장 내부를 직접 살펴보고 그 실태를 전한 뉴스는 없었다. ‘공장은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라고만 했다. 북-중 접경지역인 중국 지린성의 한 복합공단을 찾은 건 지난 9월6일이었다. 현지 관계자의 설명은, 올해 상반기 이후 상당수의 북한 노동자가 이곳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부터 공단을 훑기 시작했다.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대형 비닐공장이었다. 중국인 경비원 왕아무개(59)씨가 나왔다. “북한 여공을 찾아왔다”고 말을 건넸다. 왕씨는 잠시 멈칫하더니 “본 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두 달 전쯤부터였나, 이른 아침 우리 공장 앞으로 (북한 여공) 두 명이 걸어가는 걸 봤어요. 20대 여성이었는데 운동복 차림이었습니다. 원래 공장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좀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나요.” 왕씨의 손가락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다른 공장을 가리켰다. 같은 날 오후 그의 길안내를 떠올리며 더듬더듬 찾아간 곳이 바로 그 ‘회색 철문’ 공장이었다. 2층에 들어선 뒤 비로소 그곳이 의류공장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50여명의 북한 여성이 작업대 앞에 앉아 미싱을 돌리고 있었다. 20~30대로 보였다. 한쪽 벽면 절반을 차지한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천장은 두 층을 튼 만큼 높았고, 작업대는 두팔 길이 너비로 넓었다. 바닥엔 동선을 안내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천조각 하나 떨어져 있는 게 없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공장 전체에 울렸다. 한국 가요 ‘칠갑산’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등장에 놀란 듯 5~6명의 여성이 일손을 멈추고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 여성이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공장 직원으로 보이는 중국인 남성이 쫓아왔다. 일부러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인입니다. 사장 만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딱히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그 또한 사라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작업중인 한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앳된 얼굴에 선명한 아이라인 화장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였다. “전 한국에서 왔어요. 북한에서 오셨죠?” “네.” “북한 어디요?” “평양이요.” “가족들은 거기 있고요? 가족들 보고 싶겠다.” “보고 싶죠….” “일은 안 힘들어요? 임금은 제대로 나와요?” “(주위를 둘러보며) 냄새가….” “나이는요?” “스물셋이에요.” “어? 난 스물아홉인데.” “스물아홉?” “네. 내가 한참 언니네요?” 작업대만 보던 그가 그때 처음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언니’라는 말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여자가 웃었다. 따라 웃었다. 순간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긴장한 탓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는데, 중국인 남성이 돌아왔다. 여성은 급히 작업대로 고개를 돌렸다. 북한 여성 노동자와 나눈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남성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사장은 여기 없다.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월급은 중국 인력의 절반 수준인 1500위안
공장을 나서려는 순간 회색 철문을 통해 줄을 맞춰 들어오는 여성 20여명과 맞닥뜨렸다. 조장으로 보이는 여성이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공장 옆 합숙소에 다녀오는데도 그랬다. 조장이나 관리인의 통솔 없이 이들이 공장과 합숙소의 반경 500m를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이날 오후 공단을 좀더 돌아다닌 끝에 북한 노동자의 중국 진출 실태를 잘 알고 있는 한국 국적의 이철민(가명)씨와 만날 수 있었다. 만남의 전제 조건은 ‘철저한 익명 보장’이었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북한과 거래 관계를 맺기 마련인데, 그 사실이 한국 쪽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주장이었다. “중국 랴오닝성엔 단둥에 2만여명, 지린성엔 훈춘·투먼 등에 400여명의 북한 노동자가 있어요. 대개 6개월 미만의 연수 비자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죠. 올해 처음 정부 대 정부 차원으로 공식 파견된 이들도 있고요. 최근 북한은 기를 쓰고 한 명이라도 더 내보내려고 합니다. 나가서 ‘외화벌이’를 하는 거죠. 한국인이 투자한 공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서류상으로만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면요. 문제는 중국인데, 자국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북한 노동자의 중국행을 반기지 않아요.”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노동자의 중국 진출을 부추긴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선양무역관은 북한이 역대 최대 규모인 12만명의 노동자를 중국에 파견하기로 한 걸 지난 7월에 확인했다고 밝혔다. 노동시장의 혼란을 걱정하는 중국 정부와 달리 중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북한 노동자의 중국 진출은 기회로 통했다. 중국 젊은 인력의 공장 기피 현상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 노동자 인건비의 최대 절반 수준으로 북한 숙련공을 쓸 수 있다. 이씨는 “중국내 북한 여공의 평균 월급은 1500위안 정도로 2000~3000위안을 받는 중국인 노동자보다 크게 적다”고 말했다. 1500위안은 한국 돈으로 26만여원. 임금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성공단 노동자가 받는 평균 월급(110달러)의 갑절이 넘는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한테는 어떨까. 정답은 ‘해당 사항 없음’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직후 한국 정부는 △남북간 교역·교류 중단 △대북 신규 투자 및 진출 불허 △방북 불허 및 북한 주민 접촉 제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5·24 조처를 발표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남북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북한 노동자의 고용도 당연히 ‘불가’다. 낯선 땅 중국에서 ‘외화벌이’에 앞장서고 있는 북한 여성 노동자의 삶이 궁금했다. 이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딱 그 또래죠. 여럿이서 북한 관리인을 가운데 앉혀 놓고 ‘위대하신 우리 ○○○ 동지(관리인 이름)를 받들어’ 하며 놀려요. 관리인은 ‘너네랑 못 놀겠다’ 하고 얼굴 빨개져서 가요. 그 모습을 보며 깔깔깔 웃기도 하고요.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노래방 가고 싶대요. 평양에서도 인기였대요. 아이티(IT) 쪽엔 북한 남성 파견 노동자도 일부 있어요. 자기들끼리 재잘재잘 어떤 남성이 멋있네 얘기해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랴오닝성 단둥시에는 이런 공장이 더 많았다. 수소문 끝에 북한 노동자 파견에 관여하고 있다는 최상준(가명)씨를 만났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모두 가능한 조선족이었다. 최씨에게 북한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을 들여다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듭 부탁했다. 고민하던 그는 ‘일자리를 살펴보러 온 북한 여성’ 행세를 하라는 당부와 함께 단둥의 한 식품가공공장으로 안내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한 식품가공공장에서 북한 여성들이 작업대 앞에 서서 냉동식품을 손질하고 있다.
공장을 나서자마자 이런저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최씨 또한 익명을 요구했다. “밥줄이 끊기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5~6년 전만 해도 북한에서 나오기가 힘들었어요. 요즘엔 거꾸로예요. 북한은 더 내보내려는데 중국이 문제죠. 지난해 100명을 데려왔어요. 9월 중에 100명이 또 들어옵니다. 단둥에만 북한 여성을 받은 공장이 적어도 40~50개는 돼요.” 이야기는 지난겨울 ‘목욕 시위’로 이어졌다. “뜨거운 물이 1주일에 한번 나오는데, 3일에 한번은 목욕을 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외출이 허락되지 않으니까 생리대 등 필요한 물품은 주문을 받아 한꺼번에 사다주는데 말도 마세요. ‘화장품은 중국제 안 쓴다, 한국제 사와라’ 등, 저번엔 프랑스 향수를 써내더라고요. ‘식품공장이니까 화장하지 마라, 귀걸이 차지 마라’ 해도 말을 듣습니까? 중국인 사장이 임금으로 매달 1500위안을 주는데, 나라에 바치는 돈이랑 공동 경비 등을 다 떼이고 여성들 손엔 150위안 남더라고요. 첫 월급을 여성들에게 직접 줬는데 다음날 출근길에 보니 북한 관리인이 벌써 가져갔대요. 고향에서도 ‘그 집 딸이 파견됐다’는 걸 다 아니까 거기서도 또 떼어간대요. 물론 뗄 것 다 떼고 남은 돈도 그들 처지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어서 파견 경쟁은 치열하죠.” 북한 남성 ‘관리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물었다. “감시하는 역할이죠. 저번엔 여성 60명 나오는데 남자 둘에 통역 한 명까지 붙이겠다고 그래요. 됐다고 했죠. 쓸데없는 인건비가 더 들잖아요. 그들은 여성들과 달리 좋은 숙소에 따로 살거든요. 돈을 어떻게 모으는지 쉐보레 차를 타는 이도 있어요. 북한 영사관에서 관리인들을 소집해 한달에 두세번 회의를 해요. 얼마 전 한 의류공장에서는 중국인 직원이 북한 여성 숙소에 한국 가요를 틀어준 적이 있었는데, 관리인이 엄청 항의하더라고요.” 관리인 몰래 북한 여성 노동자를 만날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대번에 손사래를 쳤다. “지금 같은 때에요? 남한 사람하고 어쩌고 얘기가 돌면 ‘저쪽’에 금방 소문납니다. 앞으로 사업 기회 알아볼 게 많거든요. 절대 안 돼요.” 북-중 접경지역은 최씨처럼 ‘기회’를 살피는 이들로 들썩였다. 북한 관광산업부터 북한 땅의 철광석 개발과 희토류 채취까지 ‘사업 아이템’에 관한 화제는 다양했다. 그들 사이에서 ‘인력 파견’은 북-중 경제교류가 또다른 단계에 진입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값싼 노동력 조달이 필요한 중국 공장과 외화 획득을 늘리려는 북한, 그리고 ‘차이나드림’을 꿈꾸는 북한 여성들에게 그것은 각자의 기회로 해석되기도 했다. 지린성·랴오닝성/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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