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20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선 정형근 의원이 송두율 교수 문제와 관련해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공작총책임자 김경필의 대북보고문이라며 자료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2> 송두율 사건(3)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2> 송두율 사건(3)
남쪽 장관·국회의원보다 높은
북의 정치국 후보위원은
당 중앙위 전원회의서 선출한다
명단은 로동신문이 공개한다
김철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송 교수는 이렇게 호소했다
“37년 방랑하다가 돌아왔는데
추방이라도 당하면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 것입니다
차라리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 무렵 나는 모르는 이로부터 인터넷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부탁 하나 합시다. 송두율 빨갱이 변론 그만하시오.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빨갱이 돈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반성한다니 남자로서 용서가 안 됩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전향하지 않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남자답지 않습니까. 변호하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돈 안 받고 도와주고 있다고 답을 하려다 참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시 나더러 이럴 거 아닌가. “뭐? 돈도 안 받고 변호한다고? 오호라, 그러고 보니 너도 진짜 빨갱이로구나.” 해방 후 최대 간첩? 국정원장에게 항의하다
당초 나는 송 교수를 베를린에서 데리고 들어와 형식적인 국정원 조사를 마치면 내 일은 다 끝날 거라 가벼이 생각했다. 국정원이 북한 참사 김경필 파일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9월22일 입국 이래 한달여 내내 거의 매일 텔레비전에 송 교수와 내 모습이 나왔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누구더라.’ 처음 가는 식당 주인은 나를 단골손님으로 착각하고는 “아 왜 이리 뜸하셨어요?” 또 어떤 이는 동네 사람인 줄 알고 “영등포 사시죠?” 아주 빨갱이 변호사로 온 나라에 두루두루 얼굴을 팔았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그만두라고 말렸다. 민변 선후배 변호사들도 그랬다. 진보진영에서도 송 교수에 대해 머리를 흔들었다. ‘노동당 가입을 숨긴 거짓말쟁이에다 진보 쪽에 엄청난 타격을 가한 인간.’ 나까지 도맷금으로 넘어갈까 걱정들을 해주는 게 고맙기는 했다. 하지만 나마저 송 교수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변호사라는 일 자체가 본래 그런 거 아닌가. 모두 다 돌 던질 때 옆에 있어 주는 것. 뭐, 무슨 특별한 소명의식에서 억지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잘했다 싶다. 사실 그땐 온 나라가 손가락질을 해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누가 이기나’ 하는 투지 같은 게 솟아올랐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하긴 그 난리통에 빠져든 내 신세가 한심하단 생각이 들긴 했다. 검찰에 사건이 넘어간 9월30일 정형근 의원은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사전 브리핑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수사자료 일부를 보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정 의원은 국정원 사람으로부터 강제로 그 자료를 빼앗아 가지고는 어찌나 급했던지 가방도 버려둔 채 자리를 떴다. 정 의원은 다음날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 자리에서 송 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 자백했다고 발표해 버렸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이를 받아 한술 더 떴다. “송 교수 사건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다.” 나는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그분은 민변의 대선배 변호사인데도 당시 나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아니, 원장님, 송 교수가 무슨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겁니까. 누가 언제 그런 자백을 했다는 겁니까. 원장님 밑에 수사 실무책임자들이 장난치는 겁니다. 왜 변호사 입회도 안 시켜 주는 겁니까.”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은 세월은 좋은 세월이었다. 아무리 호인인 선배라지만 지금이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같았으면 한낱 까만 후배 변호사 나부랭이가 감히 국정원장에게 전화로 따따부따할 수 있었겠나. 서동만 기조실장과도 밤새 술 마시면서 한바탕했다. 고 원장과 마찬가지로 그도 국정원 개혁을 위해 어려운 자리를 받아들인 터였다. 나와 동갑내기 정치학자인 그는 훌륭한 북한연구서를 썼는데 아깝게도 그만 일찍 세상을 떴다. 아깝다. 당시 두 분 다 참으로 어려운 자리에서 고민이 많았을 거다. 검찰도 국정원과 형편은 비슷했다. 위에는 인사권자로 강금실 법무장관이 있었지만 아래 실무선은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공안라인 인맥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통령이나 장관의 남북 화해와 관용 정신은 아래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야당과 일부 언론들이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라 선창을 하면 공안기관 실무자들은 슬쩍 자료를 흘려 화답하고. 이걸 가지고 다시 신문들이 더 앞서 나가는 기사를 썼다. 검찰은 매일 기자 브리핑을 했다. 나중에 구성된 변호인단은 국정원 차장, 정형근 의원, 검사들을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발했다. 송 교수 사건뿐 아니다. 그때뿐 아니라 요즘도 언론들은 사건을 취재해서 알리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어 간다. 진보, 보수, 정치, 비정치, 스포츠, 연예, 어디를 막론하고 언론이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든다’. 당시 독일 언론도 비슷한 비판을 했다. ‘한국 신문은 게임의 관찰자가 아니라 게임의 당사자다.’
김경필 파일에서 ‘송 교수는 포섭대상에 불과’
‘해방 이후 최대 간첩’ 보도에 대응해서 10월2일 송 교수는 숙소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이란 제목으로 송 교수는 국정원의 혐의 사실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이리 끝을 맺었다.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저의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치우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예컨대 노동당 입당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저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아준 많은 분들, 그리고 국민들께 깊이 사죄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 의혹이 난무하는 속에서, 그리고 처벌받을 수도 있는 상태에서 귀국을 가족과 함께 선택한 진의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런 저의 소망을 국민들께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송 교수는 그 자리에서 가장 받기 싫은 처벌이 추방이라고 했다. 차라리 처벌받음으로써 이방인이 아니라 민족이 겪는 고통에의 참여자가 되겠노라고. 그는 여러 차례 이런 얘기도 했다. “영구귀국을 계획했는데 여의치가 않군요. 오디세이는 고향에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13년 망명생활 끝에 고향에 돌아와 명작 <겨울동화>를 쓰고 다시 추방당해 파리에서 죽은 하이네도 있지요. 저는 일제강점기보다 긴 37년을 방랑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추방이라도 당하면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감옥살이하다 재판에서 대부분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고 석방되어 사실상 추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예언대로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송 교수를 꼭 그렇게 대했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럽고 슬프다. 사건이 검찰에 넘어가고 나서 나는 부랴부랴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27쪽짜리 ‘변호인 의견서’를 썼다. 나중에 재판을 마치면서 낸 최종변론 요지서도 큰 틀에서 이 의견서에 살을 붙인 거였다. 나는 증거까지 합쳐 총 210쪽짜리 이 의견서를 몇백부 만들어 각 부문 운동단체들과 시민사회, 종교단체에 뿌렸다. 누구나 이 의견서를 읽어보면 송 교수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요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의심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제발 언론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고 송 교수를 제대로 이해해주세요.’ 나는 간절히 바랐다. 정치국 후보위원은 북에서 통틀어 서열 20위 안팎이니 남쪽의 장관·국회의원보다 훨씬 높은 공식 자리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거로 뽑게 되어 있다. 황장엽은 김일성이 지명하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지명된 경우라도 일단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되는 형식은 꼭 갖추어야 했다. 김 주석의 동생 김영주도 그랬다. 북은 1993년 12월 21차 전원회의 때까지 매번 정치국위원 선임과 해임을 <로동신문>에 공개했다. 대남공작을 총괄한 리선실조차도 본명으로 공개했다. 그런데 송두율의 가명이라는 김철수는 그 명단 어디에도 없었다. 역대 국정원 발표를 보면 김철수는 여럿이었다. 송 교수 이외에도 서경원 의원, 재독 교민 김성수, 남파간첩 윤택림 등등.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국정원이나 검찰이 송 교수가 후보위원인 근거로 댄 김경필 파일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북의 베를린 이익대표부 참사 김경필은 송 교수에 대해 평양에 이렇게 보고했다. “그는 순수한 부르주아인데, (순수 부르주아가 노동당 최고 지도부 자리를 차지했다고?) 그가 남과 북에 대하여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하여 모두 다 의심을 품고 있는 조건에서, (이건 송 교수가 중립이었다는 소리다.) 그는 조국의 일꾼들과 학자들이 남조선 사정을 너무도 모른다느니, 주관주의가 많다느니 하면서 비꼬는 소리를 하고, (북 비판을 많이 했구먼) 주재성원은 그에게 한번 짭짤하게 말해주려 하다가도, (서기관이 정치국원을 혼내준다고?) 정세 변화와 기분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통일전선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통일전선 대상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건 ‘네모난 동그라미’란 말과 똑같다.)” 보고 내용이 참으로 희한했다. 아니 일개 참사가 한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리인 ‘후보위원’에게 이 무슨 망발인고? 나는 이 대목 하나로 송 교수는 무죄라고 확신했다. 공안검찰의 요구 “전향을 하라”
북에는 통일전선 대상, 즉 포섭 대상에 불과한 그를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며 재판에 부치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공안기관들은 정말로 무능하거나,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거거나, 웃기려고 코미디를 한 거거나…. 나는 의견서를 돌리며 학술단체와 종교계에 도움을 구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송 교수를 단죄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좋은 분들이 많았다. 서울대 정치학과 김세균 교수는 정말 넉넉한 품을 가진 멋쟁이었다. 그분은 이론과 실천에서 진보의 맏형 격이었는데 노선은 북쪽과는 아주 달랐다. 그럼에도 ‘친북 인사’ 송 교수를 도우러 제일 먼저 나서서 맨 마지막까지 뛰어다녔다. 그분을 중심으로 많은 교수, 학술연구자들이 모여 성명도 내고 학술모임도 열고 여러 지원을 했다. 그리고 함세웅 신부, 박덕신 목사, 청화 스님, 이정택 원불교 교무 등 종교계 원로들이 모여 ‘민족적 대의로 포용하여 함께 미래로 나갑시다’라는 성명을 냈다. 여러 운동단체, 각계 원로, 전국 교수들의 성명이 뒤를 이었다. 내 입장에선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59명으로 변호인단도 구성되어 송 교수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뒤에서 입회했다. 공안검찰도 국정원처럼 송 교수 사건을 통해 한몫 잡으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송 교수를 전향시키는 거였다. 여러 경로를 통해, 혐의를 인정하고 전향서를 쓰면 공소보류를 해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공소보류는 청와대나 국정원, 검찰 상층부에서도 검토중이었다. 한나라당도 여론재판을 통해 이미 원하는 바를 얻어냈으므로 공소보류 후 추방시키자는 뜻을 국정원에 몇 차례 알려왔다. 10월13일 저녁, 가까이서 송 교수를 돕는 이들이 그의 숙소인 아카데미하우스에 모였다. 송 교수와 그의 부인, 나, 박호성, 김세균, 조희연, 신정완, 김정인 교수, 조성우, 서해성 등이 모였던 거 같다. 송 교수는 어떤 입장을 취할 건가. 다음날 새벽까지 꼬박 밤을 새워가며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다음주에 계속>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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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정치국 후보위원은
당 중앙위 전원회의서 선출한다
명단은 로동신문이 공개한다
김철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송 교수는 이렇게 호소했다
“37년 방랑하다가 돌아왔는데
추방이라도 당하면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 것입니다
차라리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 무렵 나는 모르는 이로부터 인터넷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부탁 하나 합시다. 송두율 빨갱이 변론 그만하시오.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빨갱이 돈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반성한다니 남자로서 용서가 안 됩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전향하지 않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남자답지 않습니까. 변호하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돈 안 받고 도와주고 있다고 답을 하려다 참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시 나더러 이럴 거 아닌가. “뭐? 돈도 안 받고 변호한다고? 오호라, 그러고 보니 너도 진짜 빨갱이로구나.” 해방 후 최대 간첩? 국정원장에게 항의하다
당초 나는 송 교수를 베를린에서 데리고 들어와 형식적인 국정원 조사를 마치면 내 일은 다 끝날 거라 가벼이 생각했다. 국정원이 북한 참사 김경필 파일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9월22일 입국 이래 한달여 내내 거의 매일 텔레비전에 송 교수와 내 모습이 나왔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누구더라.’ 처음 가는 식당 주인은 나를 단골손님으로 착각하고는 “아 왜 이리 뜸하셨어요?” 또 어떤 이는 동네 사람인 줄 알고 “영등포 사시죠?” 아주 빨갱이 변호사로 온 나라에 두루두루 얼굴을 팔았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그만두라고 말렸다. 민변 선후배 변호사들도 그랬다. 진보진영에서도 송 교수에 대해 머리를 흔들었다. ‘노동당 가입을 숨긴 거짓말쟁이에다 진보 쪽에 엄청난 타격을 가한 인간.’ 나까지 도맷금으로 넘어갈까 걱정들을 해주는 게 고맙기는 했다. 하지만 나마저 송 교수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변호사라는 일 자체가 본래 그런 거 아닌가. 모두 다 돌 던질 때 옆에 있어 주는 것. 뭐, 무슨 특별한 소명의식에서 억지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잘했다 싶다. 사실 그땐 온 나라가 손가락질을 해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누가 이기나’ 하는 투지 같은 게 솟아올랐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하긴 그 난리통에 빠져든 내 신세가 한심하단 생각이 들긴 했다. 검찰에 사건이 넘어간 9월30일 정형근 의원은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사전 브리핑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수사자료 일부를 보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정 의원은 국정원 사람으로부터 강제로 그 자료를 빼앗아 가지고는 어찌나 급했던지 가방도 버려둔 채 자리를 떴다. 정 의원은 다음날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 자리에서 송 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 자백했다고 발표해 버렸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이를 받아 한술 더 떴다. “송 교수 사건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다.” 나는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그분은 민변의 대선배 변호사인데도 당시 나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아니, 원장님, 송 교수가 무슨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겁니까. 누가 언제 그런 자백을 했다는 겁니까. 원장님 밑에 수사 실무책임자들이 장난치는 겁니다. 왜 변호사 입회도 안 시켜 주는 겁니까.”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은 세월은 좋은 세월이었다. 아무리 호인인 선배라지만 지금이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같았으면 한낱 까만 후배 변호사 나부랭이가 감히 국정원장에게 전화로 따따부따할 수 있었겠나. 서동만 기조실장과도 밤새 술 마시면서 한바탕했다. 고 원장과 마찬가지로 그도 국정원 개혁을 위해 어려운 자리를 받아들인 터였다. 나와 동갑내기 정치학자인 그는 훌륭한 북한연구서를 썼는데 아깝게도 그만 일찍 세상을 떴다. 아깝다. 당시 두 분 다 참으로 어려운 자리에서 고민이 많았을 거다. 검찰도 국정원과 형편은 비슷했다. 위에는 인사권자로 강금실 법무장관이 있었지만 아래 실무선은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공안라인 인맥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통령이나 장관의 남북 화해와 관용 정신은 아래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야당과 일부 언론들이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라 선창을 하면 공안기관 실무자들은 슬쩍 자료를 흘려 화답하고. 이걸 가지고 다시 신문들이 더 앞서 나가는 기사를 썼다. 검찰은 매일 기자 브리핑을 했다. 나중에 구성된 변호인단은 국정원 차장, 정형근 의원, 검사들을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발했다. 송 교수 사건뿐 아니다. 그때뿐 아니라 요즘도 언론들은 사건을 취재해서 알리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어 간다. 진보, 보수, 정치, 비정치, 스포츠, 연예, 어디를 막론하고 언론이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든다’. 당시 독일 언론도 비슷한 비판을 했다. ‘한국 신문은 게임의 관찰자가 아니라 게임의 당사자다.’
2003년 10월22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송두율 교수가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를 나서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해방 이후 최대 간첩’ 보도에 대응해서 10월2일 송 교수는 숙소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이란 제목으로 송 교수는 국정원의 혐의 사실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이리 끝을 맺었다.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저의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치우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예컨대 노동당 입당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저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아준 많은 분들, 그리고 국민들께 깊이 사죄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 의혹이 난무하는 속에서, 그리고 처벌받을 수도 있는 상태에서 귀국을 가족과 함께 선택한 진의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런 저의 소망을 국민들께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송 교수는 그 자리에서 가장 받기 싫은 처벌이 추방이라고 했다. 차라리 처벌받음으로써 이방인이 아니라 민족이 겪는 고통에의 참여자가 되겠노라고. 그는 여러 차례 이런 얘기도 했다. “영구귀국을 계획했는데 여의치가 않군요. 오디세이는 고향에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13년 망명생활 끝에 고향에 돌아와 명작 <겨울동화>를 쓰고 다시 추방당해 파리에서 죽은 하이네도 있지요. 저는 일제강점기보다 긴 37년을 방랑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추방이라도 당하면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감옥살이하다 재판에서 대부분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고 석방되어 사실상 추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예언대로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송 교수를 꼭 그렇게 대했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럽고 슬프다. 사건이 검찰에 넘어가고 나서 나는 부랴부랴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27쪽짜리 ‘변호인 의견서’를 썼다. 나중에 재판을 마치면서 낸 최종변론 요지서도 큰 틀에서 이 의견서에 살을 붙인 거였다. 나는 증거까지 합쳐 총 210쪽짜리 이 의견서를 몇백부 만들어 각 부문 운동단체들과 시민사회, 종교단체에 뿌렸다. 누구나 이 의견서를 읽어보면 송 교수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요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의심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제발 언론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고 송 교수를 제대로 이해해주세요.’ 나는 간절히 바랐다. 정치국 후보위원은 북에서 통틀어 서열 20위 안팎이니 남쪽의 장관·국회의원보다 훨씬 높은 공식 자리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거로 뽑게 되어 있다. 황장엽은 김일성이 지명하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지명된 경우라도 일단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되는 형식은 꼭 갖추어야 했다. 김 주석의 동생 김영주도 그랬다. 북은 1993년 12월 21차 전원회의 때까지 매번 정치국위원 선임과 해임을 <로동신문>에 공개했다. 대남공작을 총괄한 리선실조차도 본명으로 공개했다. 그런데 송두율의 가명이라는 김철수는 그 명단 어디에도 없었다. 역대 국정원 발표를 보면 김철수는 여럿이었다. 송 교수 이외에도 서경원 의원, 재독 교민 김성수, 남파간첩 윤택림 등등.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국정원이나 검찰이 송 교수가 후보위원인 근거로 댄 김경필 파일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북의 베를린 이익대표부 참사 김경필은 송 교수에 대해 평양에 이렇게 보고했다. “그는 순수한 부르주아인데, (순수 부르주아가 노동당 최고 지도부 자리를 차지했다고?) 그가 남과 북에 대하여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하여 모두 다 의심을 품고 있는 조건에서, (이건 송 교수가 중립이었다는 소리다.) 그는 조국의 일꾼들과 학자들이 남조선 사정을 너무도 모른다느니, 주관주의가 많다느니 하면서 비꼬는 소리를 하고, (북 비판을 많이 했구먼) 주재성원은 그에게 한번 짭짤하게 말해주려 하다가도, (서기관이 정치국원을 혼내준다고?) 정세 변화와 기분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통일전선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통일전선 대상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건 ‘네모난 동그라미’란 말과 똑같다.)” 보고 내용이 참으로 희한했다. 아니 일개 참사가 한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리인 ‘후보위원’에게 이 무슨 망발인고? 나는 이 대목 하나로 송 교수는 무죄라고 확신했다. 공안검찰의 요구 “전향을 하라”
북에는 통일전선 대상, 즉 포섭 대상에 불과한 그를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며 재판에 부치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공안기관들은 정말로 무능하거나,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거거나, 웃기려고 코미디를 한 거거나…. 나는 의견서를 돌리며 학술단체와 종교계에 도움을 구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송 교수를 단죄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좋은 분들이 많았다. 서울대 정치학과 김세균 교수는 정말 넉넉한 품을 가진 멋쟁이었다. 그분은 이론과 실천에서 진보의 맏형 격이었는데 노선은 북쪽과는 아주 달랐다. 그럼에도 ‘친북 인사’ 송 교수를 도우러 제일 먼저 나서서 맨 마지막까지 뛰어다녔다. 그분을 중심으로 많은 교수, 학술연구자들이 모여 성명도 내고 학술모임도 열고 여러 지원을 했다. 그리고 함세웅 신부, 박덕신 목사, 청화 스님, 이정택 원불교 교무 등 종교계 원로들이 모여 ‘민족적 대의로 포용하여 함께 미래로 나갑시다’라는 성명을 냈다. 여러 운동단체, 각계 원로, 전국 교수들의 성명이 뒤를 이었다. 내 입장에선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59명으로 변호인단도 구성되어 송 교수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뒤에서 입회했다. 공안검찰도 국정원처럼 송 교수 사건을 통해 한몫 잡으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송 교수를 전향시키는 거였다. 여러 경로를 통해, 혐의를 인정하고 전향서를 쓰면 공소보류를 해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공소보류는 청와대나 국정원, 검찰 상층부에서도 검토중이었다. 한나라당도 여론재판을 통해 이미 원하는 바를 얻어냈으므로 공소보류 후 추방시키자는 뜻을 국정원에 몇 차례 알려왔다. 10월13일 저녁, 가까이서 송 교수를 돕는 이들이 그의 숙소인 아카데미하우스에 모였다. 송 교수와 그의 부인, 나, 박호성, 김세균, 조희연, 신정완, 김정인 교수, 조성우, 서해성 등이 모였던 거 같다. 송 교수는 어떤 입장을 취할 건가. 다음날 새벽까지 꼬박 밤을 새워가며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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