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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다시 불 켜진 ‘애기봉’ 가보니, 주민들 공포에…

등록 2012-12-30 20:09수정 2012-12-31 09:53

세밑 불안에 떠는 김포 용강리 사람들
마을회관에 모인 노인들
북 경고에 “지들이 뭔 상관” 언성
“쏜다잖아, 무서워” 긴장 드러내
주민, 점등행사 막았으나 역부족
“정부, 이념단체 선동 막아줬으면”


살얼음을 머리에 인 임진강과 한강이 조강에서 만나 굽이쳤다. 물길은 북녘의 선전마을과 남녘의 아파트 단지를 갈랐다. 쇠기러기들은 쉼없이 흘러드는 강물을 넘나들었다. 서부 휴전선 최전방인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의 애기봉에서 굽어본 남북 경계의 아침은 고적했다.

해발 155m의 애기봉에는 그 광경을 보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점점이 이어졌다. 정상에 삐죽 솟은 높이 30m의 철골 구조물에 눈길을 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최근 언론에 오르내린 ‘애기봉 점등식 논란’에 그닥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기봉 옆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마을 주민들은 27일 송년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북한 <로동신문>이 “애기봉 등탑 점등 놀음을 결코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지 이틀 뒤였다. 마을회관에 모인 40여명은 대부분 칠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다. 일자리가 드문 곳이라 젊은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부모를 떠났다. 노인들만 80여가구가 남아 농사지으며 마을을 지킨다.

서부지역 민통선 최북단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은 북한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다. “등탑 밝히는 거하고 지들이 무슨 상관인데? 왜 그렇게 트집을 잡어?” “퍼다 주면 괜찮은 듯하다가 안 주면 미사일 쏘고 그러잖어!”

그러면서도 두려움을 감추진 못했다. “(북한이 포를) 쏜다 그랬잖어. 무서워.” 태어나 줄곧 용강리에서 살아온 윤아무개(82) 할머니가 말했다. 노인들의 말에 일관된 논리는 없었다. 진보와 보수를 나눠 정교하게 셈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전쟁을 하겠다’는 이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대부분 북쪽을 향했다.

마을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은 전쟁 공포에 대한 책임을 우리 정부에도 물었다. 주민회관 앞에서 만난 천성일(가명·50)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앞산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리 들리지요?” ‘쿠구구구궁….’ 낮고 둔탁한 기계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해병대 탱크 지나는 소립니다. 이 소릴 들으면 불안해져요. 정기 훈련이 없는 시기에 탱크 소리가 들리면 경계가 강화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애기봉이 다시 한번 남북 긴장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대북 선전을 위해 애기봉에 소나무 성탄 트리를 세워 처음 불을 밝힌 것은 1954년이다. 북한과 3㎞밖에 떨어지지 않아 개성까지 불이 보인다는 곳이었다. 현재의 등탑을 세운 것은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대북 선전용 애기봉 점등은 이후 연말마다 분단과 갈등의 상징물이 됐다.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활동을 중지하기로 한 제2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합의에 따라 2004년 처음으로 애기봉 등탑 점등이 중단됐다. 이후 2010년 연평도 포격을 계기로 재개됐다가, 지난해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취소됐다. 그러다 올해 대선 직후인 22일 국방부는 보수단체들의 등탑 점등행사 요청을 받아들여, 애기봉 등탑의 엘이디(LED) 전구 3만개에 불을 밝혔다.

용강리에서 20여년을 농사지으며 살아온 천씨는 영 걱정이다. “북한이 코앞에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나 전쟁을 안 무서워하는 거예요. 안 쏜다는 보장이 어딨습니까. 연평도에도 쐈는데….” 천씨는 지난 22일 애기봉 등탑을 밝히러 오는 ‘외지인’들의 발길을 이웃마을 주민 등 30여명과 함께 막아 세웠다. 북한민주화위원회,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관계자 등 100여명이 점등식 행사를 찾았다. 주민들은 트랙터 4대를 몰고 좁은 길을 봉쇄했다. 군과 외지인들은 주민의 반발을 꺾고 기어이 애기봉에 올라 불을 밝혔다.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불을 밝혔잖아요. 그런 불안한 짓을 왜 합니까.” 천씨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접경지역이니 불안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북한이 폭격하면 서울이 아니라 우리가 피해를 봅니다.” 천씨와 함께 행사를 저지했던 옆마을의 이아무개 이장도 하소연했다.

남북 평화를 위해 대북 선전용 등탑을 밝혀야 한다는 ‘외지인’들의 논리를 주민들은 좀체 이해하지 못했다. 애기봉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생존의 문제’를 말했다. “대선 전엔 점등 안 할 것같이 말하더니 선거 끝나자마자 불 밝히네요.” 애기봉 아래서 7년째 주유소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길재(가명·38)씨는 분통부터 터트렸다. “이런 일이 생기면 손님 발길이 뚝 끊겨요. 남북 갈등이 주민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요. 국민을 생각한다면 이념단체들이 선동하는 걸 정부가 좀 막아줬으면 좋겠어요.” 한산한 도로를 바라보며 최씨가 한숨을 쉬었다.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에 자리잡은 지상철(58)씨의 곰탕집은 성탄 연휴인데도 한산했다. 지씨 부부만 마주 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정권 초기에 비해 손님이 5분의 1로 줄었어요.” 그 이유를 지씨는 남북간 긴장에서 찾았다. “애기봉 등탑만이 아니에요. 보수단체들이 파주에서 삐라(전단)를 뿌려도 우리한테까지 영향이 있거든요.”

오후 5시가 지나 어둑해지자 애기봉 등탑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민통선 인근 월곶면과 하성면의 모든 마을에서 그 빛이 눈에 들어왔다. 북녘에서도 잘 보일 터였다. ‘온누리에 평화’. 등탑 끝에 매달린 낱말들이 반짝였다. “새 대통령은 긴장보단 평화를 위해서 남북 교류에 힘써줬으면 좋겠습니다.” 용강리 주민 천씨가 말했다. 서부전선 최전방의 임진년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김포/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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