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노산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늙은 엄마 티 내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쓰게 된다. 남편이 집에 올 땐 부스스한 머리에 무릎 나온 운동복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으면서 애 친구들이 놀러 올 땐 얼굴에 뭐라도 찍어 바르고 머리도 매만지며 정성을 들인다. 또래 엄마들보다 나이든 엄마를 행여 아이가 창피해할까 염려해서다.
그런 내가, 늙은 엄마인 걸 아이한테 여지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다 자란 십대처럼 잘난 척할 땐 언제고, 제가 불리하다 싶으면 아이는 어린애처럼 떼를 쓰거나 응석을 부리곤 한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나오며 “얘야, 내가 너만할 땐 어른들한테 뭘 사달라고 떼써 본 적이 없다. 이제 너도 집안 형편이며 부모 힘든 거 살필 나이가 되지 않았냐?”고 사극 안방마님처럼 말하게 된다. “내가 너만할 때는… 요런 말을 꺼내는 게 늙어간단 징조야”라고 같이 늙어가는 친구가 말한다. 나도 안다. 아무리 떠들어 봤자 우리 부모 피난길 얘기같이 실감도 안 나고 교육적으로 아무 감흥도 효과도 없다는 걸. 그러면서도 까마득한 내 어린 시절과 비교해 애를 훈계하려 드는 건, 일종의 병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세대가 시대적으로 가장 불행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박완서 선생이 불운했던 당신 세대의 역사를 회고하며, 분단과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20대를 보내고 4·19나 6·3세대같이 민주화운동 세대로 칭송받지도 못한 채,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어정쩡하게 끼인 세대라고 토로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최루탄 냄새를 온몸에 묻히고 다녔던 80년대 우리 청춘의 황량함을 개탄하지만, 막상 우리보다 몇년 앞선 선배들은 “너희는 386이랍시고 행세하는 놈도 있지만 우리는 이래저래 찬밥”이라며 한탄한다. 입시경쟁과 취업난으로 고시원에 틀어박혀 사는 요즘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생 뼈 빠지게 일한 직장에서 떠밀려나와 하우스푸어로 전락한 50대도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 가슴을 찌른다. 이 곡절 많은 역사에서 어느 세대가 더 불행한 희생양이었는지 따지는 건 무모하다. “세대담론으론 해법이 없다”던 친구 말이 옳다.
새해부터는 “엄마가 너만할 때는…” 같은 소린 두번 다시 꺼내지 않으리라. 예쁜 펜만 보면 사고 싶어 안달하고 캐럴을 들으면 조건반사처럼 비싸빠진 케이크에 눈을 돌리는 애를 나무라고 싶을 때도 목젖까지 올라온 그 말을 참았다. 내 금단증상을 대리 해소해 준 건 친정엄마였다. 철없는 손녀를 나무라며 하신 말씀. “니맘때 니 에미는 동생 건사하며 엄마 노릇 다 했어.” 내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시니 이렇게 통쾌할 수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건 어머니의 다음 말이었다. “할머니가 너만할 때는 쌀 한말을 이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길고 긴 사설을 들으며 새삼 다짐한다. 새해 결심 꼭 지키자.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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