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내가 마흔이 넘어 유학을 가겠노라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친구들 앞에 선언을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그저 무덤덤했다. “그래? 잘 갔다 와.” 한 6개월, 길어야 1년쯤 떠돌다가 지쳐서 돌아오겠거니 했단다. 친구들의 예상과 달리, 실은 내 예상과도 달리, 미국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게 되자 친구들은 미심쩍은 눈길로 내게 물었다 “너 진짜 영어로 논문을 썼니?”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기사쓰기”라고 하면 친구들은 더 눈이 동그래져서 되묻는다. “한글로? 설마 영어로?” 내가 무얼 전공했고 공부하는지는 별 화제가 아니다. 20년간 영어와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 어떻게 미국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지 도무지 미스터리라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난 여전히 발음도 억양도 시원찮다. 어디에 ‘더’(the)를 붙이고 안 붙이는지 여전히 어렵고 ‘구름’이나 ‘이해’와 같은 단어를 ‘클라우드스’(clouds)니 ‘언더스탠딩스’(understandings)같이 복수형으로 쓰는 용법이 낯설고 어렵다. 그래도 미국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 건, 영어를 모국어로 한다고 해서 누구나 글쓰기를 잘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을 쓸 줄 안다고 모두가 국문으로 된 소설이나 신문 기사를 잘 쓰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고 하면 많은 엄마들이 부러워한다. “아이구, 아이 영어공부는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 이럴 땐 나도 요즘 개그콘서트 버전으로 대답하고 싶어진다. “자꾸 오해들 하고 그러는데…우리도 영어 걱정 한다!” 영어든 한국어든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국 엄마 가운데 “우리 애는 영어를 엄청 잘하는데 왜 영어 점수가 낮은지 이해가 안 된다”고 푸념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아이가 친구들이랑 영어로 수다도 떨고 채팅도 하는 걸 보면 ‘네이티브’(Native speakers) 수준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다 입바른 소리 잘하는 친구 하나가 쏘아붙였다. “그렇지. 네이티브지. 근데 네이티브가 다 똑똑한 건 아니거든. 미국에선 거지도 영어로 말하는데….”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들을 내 수업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 또릿또릿한 눈망울로 과제물도 빠짐없이 챙기는 착실하고 똘똘한 친구들이다. 말을 시켜보면 나보다 발음도 좋고 유창하다. 그런데 정작 기말 페이퍼를 써낼 때 보면 기대에 못 미친다. 중언부언 인용은 많으나 초점이 명료하지 않아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리송한 경우가 많다. 원래 공부에 취미가 없거나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는 데만 치중한 나머지, 정작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자기 생각을 개발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예를 구구절절 들어가며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점잖게 일러둘라치면 얄궂은 친구들은 비실비실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쭈, 너 그거 영어로 말해봐.”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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