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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표창원 “제복 분실하고 거짓말했던 내가…”

등록 2013-02-15 19:29수정 2013-02-20 16:06

셜록 홈스를 꿈꾸던 소년은 국내 최초의 범죄심리분석관이 되어 1998년 영국에서 돌아왔다. 표창원(49) 전 경찰대 교수는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때 제기된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의혹사건’과 관련해 국정원과 경찰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교수직을 던지고 나왔다. 12월22일 광주 충장로 프리허그 행사에 몰린 사람들 앞에서 표 교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셜록 홈스를 꿈꾸던 소년은 국내 최초의 범죄심리분석관이 되어 1998년 영국에서 돌아왔다. 표창원(49) 전 경찰대 교수는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때 제기된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의혹사건’과 관련해 국정원과 경찰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교수직을 던지고 나왔다. 12월22일 광주 충장로 프리허그 행사에 몰린 사람들 앞에서 표 교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 소년이 셜록 홈스를 만난 그 순간!
[토요판] 표창원의 죄와 벌
<1> 연재를 시작하며
어린 시절 책을 무척 많이 읽었다. 그중에서도 ‘셜록 홈스’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다. 가난하고 부모님 사이 다툼이 잦아 자주 마음이 아팠던 어린 시절, 책이 펼쳐준 상상의 세계는 ‘행복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이상하고 복잡한 범죄사건을 명쾌하게 풀어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지켜내는 셜록 홈스는 내 마음속 ‘영웅’이었다. 나도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며 내 생활기록부에는 늘 ‘정의감이 남다르고 용감함’이라는 문구가 따라다녔다. ‘비겁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셜록 홈스 같은 용기와 정의감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문제와 위기도 잇따랐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는 부모님께 ‘나만 혼자 좋은 대학 가면 뭐합니까? 어려운 처지 때문에 방황하는 친구들을 외면할 수 없어요’라고 반항했고, 학교에서도 크고 작은 문제에 휩싸이곤 했다.

‘흡연실 사건’과 ‘절도범 색출’의 교훈

가장 대표적인 일이 ‘흡연실 사건’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부반장이던 나는 학급의 3분의 1 가까운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범죄자처럼 숨고 단속하는 선생님들에게 쫓기는 상황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님들과 학생 임원들이 모이는 ‘학도호국단 회의’에서 손을 번쩍 들고 이런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건의했다. “학교에 흡연실을 설치해서 흡연을 양성화하고 대신 금연교육을 실시해 흡연자 수를 줄여나갑시다.” 회의장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회의 후 교무실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 맞을 각오를 하고 갔다. 담임선생님은 무섭기로 소문난 공수부대 출신이었다. 그는 내게 매 대신에 “네 용기와 정의감이 참 좋다. 하지만 한 가지만 부탁하자. 행동하기 전에 네가 옳다고 느끼는 것이 ‘일반적, 보편적으로도 옳은지’ 깊이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갖기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보편적으로도 옳은지 숙고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갖게 해준 경험이다.

경찰대학에 진학한 나는 조금 성숙하긴 했지만, 여전한 특성과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옳지 않다’고 느끼는 상황에 봉착하면 도무지 참지 못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문제가 선배들의 ‘얼차려’였다. 학생 생활규범에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선배들은 후배의 잘못을 교정하고 훈육한다는 명목 아래 집합과 기합 등 얼차려를 주고 있었다. 난 이런 관행이 불합리하다고 느꼈고, 이의를 제기했고, 논리적으로 따졌다. 선배들은 그런 나를 골치 아파했다. 어떤 선배는 나를 불러 때리고, 어떤 선배는 부드러운 상담과 회유를 하는 등 각자의 방식대로 길들이려 했다. 나에겐 통하지 않았고 난 변하지 않았다.

따지기 좋아하던 사춘기를 지나
민주화 투쟁을 지켜보며
경찰대생으로서 느꼈던 혼란
거짓말하다 징벌방 3주

그 안에서 돌아본 죄인의 심정
화성연쇄살인 때의 무력감까지

정의는 늘 인생의 화두였다
경찰대 교수직을 나온 자유인으로
그 사건들을 다시 말한다
수사는 모든 진실을 밝혔을까
판결은 법 앞에 평등했을까

그러던 차에 기숙사 학생들의 금품이 없어지는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나름의 추리와 수사를 통해 쓰레기통에 버려진 현금봉투를 발견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찾아 지문 감식을 의뢰했다. 공식 의뢰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뒤 학생 대표들과 협의해 다시 조사와 수색을 통해 증거를 찾고 용의자를 확정했다. 그러나 그의 고등학교 동문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오히려 날 범인으로 몰았다. 결국 학교 당국에 보고를 하고 국과수의 정식 지문감식을 거치자, 그 ‘용의자’가 범인이었음이 확인됐다.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선배가 후배를 음주 폭행한 일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결국 그에 대한 중징계를 이끌어내고 피해자인 후배 학생의 명예를 회복해주었다. 이런 경험들은 내게 오해나 비판, 비난, 공격에 주눅들거나 관계에 따른 회유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힘을 길러줬다.

경찰대학 3학년이 되던 1987년 2월,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하는 경찰대학 졸업식이 눈앞에 다가왔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여서 졸업식 예행연습이 강도 높게 진행됐는데, 경찰대학장이 연설 연습을 하다가 “대통령 각하 내외분의 하해와 같으신 은혜를 입어 우리 경찰대학생들이…”라는 사전 원고를 읽는 일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특히 우리 3학년들은 그동안 ‘국민과 정부가 대결하는’ 민주화 투쟁 상황에 대해 고민하며 ‘민중의 지팡이’가 될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격론을 벌이던 중이었다.

훈련이 끝난 뒤 동기생들이 모였다. 우리는 격론 끝에 ‘대통령 각하 내외분의 사병이 아니라 국민의 혈세로 공부하는 예비경찰관’이므로, ‘학장 연설문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하며 ‘졸업식 보이콧’을 하기로 결의했다. 졸업식 준비상황이 매일 청와대로 보고되고, 캠퍼스 곳곳에 저격용 총을 든 경호원들이 배치돼 있던 상황이었다. 대학 쪽의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밤까지 버텼고, 결국 경찰대학장이 ‘학생들의 충정을 받아들여 연설문을 변경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우리의 농성은 끝났다.

졸업식이 시작됐다. 혹시나 하는 우려 속에 학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해당 문장이 “국민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으로…”로 바뀐 사실이 확인되자, 우리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정의는 승리한다’, ‘떳떳하고 정당하다면,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정의로운 소년’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소풍에서 친구들과 사진(위)을 찍었다. 오른쪽이 표창원. 제주도로 내려가 전경대 소대장을 했는데, 자주 서울에 차출되면서 학생들과 싸우며 1980년대를 보냈다. 1989년 전경대 내무반에서.  표창원 제공
어렸을 적부터 ‘정의로운 소년’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소풍에서 친구들과 사진(위)을 찍었다. 오른쪽이 표창원. 제주도로 내려가 전경대 소대장을 했는데, 자주 서울에 차출되면서 학생들과 싸우며 1980년대를 보냈다. 1989년 전경대 내무반에서. 표창원 제공
제복 분실하고 뻔뻔하게 거짓말했던 나

경찰대학을 다니며 줄곧 선배들이나 대학 쪽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했던 내가 비난과 징벌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에 빠지거나 화약으로 장난을 치다가 징벌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학교나 교사, 다른 학생들의 불의나 불합리를 비판했던 나 또한 엄청난 치욕과 수치로 괴로워했다. 경찰대학 3학년 때 외국어 동아리를 만들어 ‘모의 인터폴 총회’를 개최했던 나는 행사를 위해 빌렸던 전통의상들을 외국대사관 공관 등에 반납하기 위해 특별외출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만 경찰대학 제복을 분실하고 말았다. 경찰관 복장과 유사한 제복 분실은 경찰관 사칭이나 간첩의 악용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고, 고민 끝에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여벌 제복으로 위기를 넘긴 나는 보름 뒤 4학년 학생 명예위원회에서 호출해 조사를 받을 때에도 거짓말로 일관하며 사실을 숨겼다. 경기도 고양경찰서에서 습득물로 신고된 내 이름표가 달린 제복이 경찰대학으로 보내져 명백한 증거물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설마’ 하며 위기를 넘기려던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파렴치범’이 되었다. 명예위원회의 ‘퇴교’ 구형으로 열린 징계위원회는 그간의 모범적인 생활을 감안하고 ‘정상을 참작’해 ‘징벌방 근신 3주’ 처분을 내렸다.

기숙사가 아닌, 개방된 ‘징벌방’에서 군복을 입고 생활하며 오전, 오후, 저녁, 심야 특별훈련을 받는 징계 기간에 몸보다는 마음이 힘들고 아팠다. 수치심과 자책감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직접 ‘신입생 훈련’을 담당해 지휘하고 교육했던 후배들의 시선을 받을 용기가 없었다. 3주 동안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의 심정으로 뼈저린 반성과 후회, ‘절대로 깨끗하고 당당하자’는 다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와 주장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실’과 ‘정의’를 향한 내 돌진은 변하지 말고 그대로 유지 발전시키되, 스스로 그 노력과 목표의 정당성을 훼손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언제나 당당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좋은 기회였다.

1989년 5월3일, 졸업 후 논산훈련소와 하사관학교를 거쳐 군부대에서 유격훈련을 받던 날, 이른바 ‘동의대 사태’ 소식을 들었다.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점거 농성 중이던 학생들에게 억류된 전경들을 구출하기 위해 진입했던 전경 7명이 학생들이 투척한 화염병 때문에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 화재로 숨진 사건이었다. 우리는 아프고 슬프고 억울해 온종일 울며 통곡하며 유격훈련을 받았다. 학생은 시위 중에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전경은 진압 중에 불에 타 사망하고 ‘왜 우리가 이래야 하는가?’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은 의무를 다하는 경찰을 불에 태워 죽여도 되는가? 도대체 누가 옳은가, 무엇이 정의인가? 답 없는 질문이 눈물과 함께 가슴에 맴돌 뿐이었다. 이후 2년간 전경대, 기동대 소대장을 맡으며 시위를 진압하고 제주도 해안경계를 하면서도 수많은 갈등과 고민이 계속됐다. ‘내게 유리한지 불리한지’가 아닌 ‘옳은지 그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살아보자고 했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의 문제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일수록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국가안보와 사회질서’ 대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주제는 늘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경찰은 ‘법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은 ‘과연 법이 100% 지켜지고 집행되느냐’는 재반론에 힘을 잃었다. ‘대원들의 안전과 건강, 화합’ 같은 내가 추구하던 가치와 ‘부대의 질서 확립’, ‘엄정 기강’을 강조하는 중대장의 원칙이 충돌해 내 머리에 총이 겨눠지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일선 경찰서 형사가 된 이후에도 열심히 수사하고 단속을 할수록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서민들의 삶만 무너뜨린다는 자괴감에 흔들려야 했고, 피의자와 연결된 이런저런 높은 분들의 청탁전화에 맞서 싸우다 화나고 지치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단 한푼의 부정한 돈을 받지 않았고, 단 한번도 청탁으로 사건 수사에 영향받는 일 없이 원칙대로 일했다는 자부심 하나는 얻을 수 있었다. 학창시절 부끄러운 잘못으로 뼈저린 수치심과 자책감에 시달린 ‘학습효과’의 덕이었다.

도둑질했다고 손목을 자를 것이냐

셜록 홈스를 닮은 민완형사를 꿈꾸던 내게 ‘화성연쇄살인사건’과 경기도 부천시에서 일어난 ‘후기대 입시 시험지 도난사건’ 등 대형 사건을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무능력은 ‘실력이 있어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숙제를 던져주었고, 범죄수사 전문교육을 받기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범죄학과 범죄심리학, 프로파일링 등 ‘범죄사건의 정의’를 구현할 지식과 기법뿐 아니라 자유와 권리, 좌우 이념의 정치학, 여성과 아동, 외국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의 권리 같은 쟁점과 사안들을 접하고 나니 ‘알을 깨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오래 따라다니던 ‘국가 안보와 인권 사이의 가치 충돌’ 문제에 대한 제한 없는 토론과 탐구도 해보았다.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에 돌아와 경찰대학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며 ‘경찰과 정의’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썼다. 2010년부터 3년간 일반인을 상대로 ‘범죄학 강의콘서트’를 열어 ‘범죄와 정의’에 대해 작은 담론을 형성하면서 내가 겪고 얻은 것들을 나눴다. 나름대로 ‘정의’의 구축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러던 중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의혹사건’에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게 되면서 내 삶과 활동영역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제는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범죄와 정의, 죄와 벌에 대해 성역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연재는 이러한 내 새 삶과 표현의 첫출발이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 있어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변치 않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법 앞의 평등’이다. 지위나 신분, 빈부 격차 등 어떤 차이에도 상관없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원칙이다. 물론 정상참작 등 ‘감형의 사유’ 혹은 계획성이나 잔인성 등 ‘가중 처벌’ 요소의 적용 역시 마찬가지다. 둘째 원칙은 ‘비례의 원칙’이다. 다시 말해 저지른 범죄의 크기에 적합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 현대 문명국가에서, 도둑질했다고 손목을 자르는 처벌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성폭행을 하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죄와 벌’ 시리즈를 통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나 화제를 불러모았던 범죄사건과 이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 과정을 ‘정의’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가할 것이다. 과연 엄정하고 철저하게 진실이 규명됐는지, 그리고 처벌은 ‘법 앞의 평등’ 원칙에 부합하고 ‘비례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를 냉철하게 조명해 봄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범죄에 대한 정의’가 더 바람직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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