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는 그리움, 41년만의 귀향 이희세씨
사무치는 그리움, 41년만의 귀향
사무치는 그리움이 왜 없었겠는가? 강산이 바뀌길 네 차례,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둘씩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럼에도 지난 12일 8·15 민족대축전 참가를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재불동포 이희세(74)씨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선 뒤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숙부인 고암 이응로 화백의 연락을 받고 프랑스로 향한 게 지난 64년 8월12일이니, 꼭 41년만의 귀향이었다.
이씨는 1932년 3월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다섯 형제 가운데 막내였던 그의 부친은 바로 윗형이던 이응로 화백에게 이씨의 교육을 맡겼고, 그는 15살 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해 이응로 화백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홍익대 동양화과를 마친 뒤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모교 등지서 강의를 하면서 작품활동을 벌였다.
“파리에서 어느 날 숙부님이 부르셔서 집으로 가보니 ‘갑자기 서울에 가게 됐다’며 짐을 싸 놓으셨더라구요. 파리주재 대사관 무관이 ‘7월4일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를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그가 기억하는 67년 동백림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귀국길에 오른 이 화백은 공항에서 곧바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갔고,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명으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제가 도피를 했다느니, 행방불명이 됐다느니, 서울로 붙들려왔다느니 온갖 말들이 떠돌았지요.” 흉흉한 소문이 떠돌면서 당시 프랑스로 출국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그의 부인과 남매는 당국에 여권을 빼았겨 프랑스로 올 수 없었다. 프랑스로 떠나올 때 3살이던 아들은 9살 무렵 어렵사리 프랑스로 데려왔지만, 생후 10개월이던 딸은 지난 89년 1월 이 화백이 숨진 뒤 묘소 참배를 위해 가족들이 프랑스를 방문하기 전까지 27년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의 부인은 이미 세상을 등진 뒤였다.
이 화백 구명운동에 나선 그는 자연스럽게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문제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 73년 한국자주통일추진회 결성을 시작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운동가’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그가 지난 85년엔 파리 제2구 오페라구역에 문을 연 ‘김치식당’은 유럽 통일운동 진영의 사랑방 구실을 해왔다.
요리사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가게아먀 나오미에게 지난 99년 김치식당을 넘긴 뒤 파리에서 약 500㎞ 떨어진 도르돈 지방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3년여째 조각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2000년엔 폐병으로 오른쪽 폐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원칙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는 41년만의 귀국에 대한 감회를 묻는 질문에 “쾰른의 김용무 선생, 베를린의 이영준·윤운섭·한영태 선생, 독일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박충흡·이주희씨 등 후배들이 여전히 귀국길에 오르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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