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마 정부’ 시민들 개탄
“고위직에 범법자만 임명”
“이제 누가 열심히 살겠나”
“고위직에 범법자만 임명”
“이제 누가 열심히 살겠나”
회사원 김아무개(42)씨는 스마트폰이 고장난 줄 알았다. 속보로 쉼없이 날아오는 ‘낙마’ 소식들 때문이다. 김씨는 대기업 해외지사에서 6년간 근무하다 올해 초 귀국했다. “김용준(국무총리 후보자), 김종훈(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김병관(국방부 장관 후보자), 황철주(중소기업청장 후보자), 김학의(법무부 차관), 한만수(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등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하도 낙마 소식만 들어와서 눈을 의심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분노를 넘어 허탈감에 빠져들고 있다.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서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식인들은 ‘국가적 위기’까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근혜 정부 내각 후보자들의 낙마를 통해 드러나는 이른바 우리 사회 고위층·기득권층의 도덕성 붕괴현상 탓이다. 이명박 정부 때의 위장전입이나 부동산 투기는 이제 시시할 정도다. 이번 장차관 후보자들은 낯설고도 충격적인 국외 비자금 조성, 외국무기 로비스트, 성접대 등의 의혹으로 벌써 7명이나 낙마했다.
“허탈하죠.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그저 충격이에요. 이제 누가 열심히 살겠어요?” 고종순(50·서울 마포구)씨는 25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재래시장 방앗간에서 아침 장사를 준비하다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의 낙마 소식을 접했다. 고씨는 “대통령이 국민통합, 국민행복을 그리 강조하길래 그래도 내심 기대했는데 국민 정서를 너무나 모른다”며 아쉬워했다. “내가 열심히 살면 애들도 열심히 살겠지 했는데, 입신양명했다는 분들이 죄다 탈세니 비리니 저 모양이니 애들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곁에서 말린 고추를 다듬던 고씨의 아내는 “아무 정보가 없어서 (탈세도) 못하는 우리가 손해”라고 거들었다. 고씨 부부는 지난 10년간 하루 12시간씩 일해왔다.
불신은 사회 저변으로 급격히 번져가고 있었다. 서울 마포 망원시장에서 20여년 동안 옷가게를 운영해온 서정래(51)씨는 한숨부터 쉬었다. “국민 한명 한명은 하루하루 지킬 것 지키며 최선을 다해 사는데, 기득권 있는 고위층은 성접대에, 재산 빼돌리기에… 이제 우리도 대충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씨는 “국민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는데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층은 자기들끼리의 세상에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걱정도 컸다. “정부가 빨리 자리를 잡아야 어려운 경제도 살릴 텐데, 사회 지도층에 대한 믿음이 바닥난 상황에서 국정이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정말 불안해요.”
“동주민센터 인사도 이렇게 안해”
평범한 서민들의 분노와 허탈감의 뿌리는 전 정부보다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지는 공직 후보자들의 비리와 부패에 있었다. 이명박 정부를 통틀어 남주홍(통일부)·박은경(환경부)·이춘호(여성부)·신재민(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와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 등 모두 9명이 낙마했다.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 등이 사유였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낙마한 7명의 후보자 중에선 4명이 부동산투기·위장전입·탈세 등을 이유로 자진 사퇴했다. 이밖에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는 인수위 참여 논란으로,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소장 취임을 위해 미리 헌재 재판관직을 사임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에 견주면 최근 불거진 내각 후보자들의 추문은 ‘부패의 진화’라고 할 만하다. 서민들은 이를 접하며 ‘있는 분’들과의 괴리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뀔수록 점점 더 수위가 높은 범법자들만 고위 공직자로 임명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항변하는 시민도 많았다. 직장인 박가영(35)씨는 “과거 어떤 경우보다 이번 정부 공직 후보자들은 비리의 수위가 세고 원색적인 것 같다. 갈수록 더 심해지니 병역비리나 위장전입은 이제 화젯거리도 못 된다. 최소한의 검증이라도 거쳤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에서 자영업을 하는 주윤상(54)씨도 “일반인 같으면 최소한 벌금, 제대로 했으면 감옥은 갔어야 할 인물들 아니냐”고 소리를 높였다. 그는 “무원칙, 무대포 인사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처럼 밀어붙이면 된다고 믿는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의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최아무개(40)씨는 “공직생활 십수년 하면서 이렇게 체계 없는 정권은 처음 본다. 동주민센터 인사도 이런 식으로 안 한다”고 말했다.
구직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허탈감은 더욱 컸다. 대학원생 강아무개(30)씨는 “비리의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재산을 해외에 은닉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비리다. 내각 꾸리다 1년 다 가겠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아무개(23)씨는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벌인 사람들이 고위 관료를 하겠다니, 여기가 무슨 할리우드냐”고 꼬집었다.
지식인들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었다. 1970년대 이래로 사익만 추구해온 보수진영 인사들의 시대착오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철학자 강신주씨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1970년대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독재시대 때 고시를 보고 육사를 다녔다. 공동체를 고민해본 적이 없고 사리사욕만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공직에 나가려니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의 특징으로 봐야 한다. ‘기득권층’이 ‘지도층’이 되려다 실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는 ‘국가적 위기’로 진단했다. 도 교수는 “지금 상황은 청와대 또는 정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전체, 나라 전체의 위기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계속 이대로 가면 국민들의 불만이 일시에 터져 나올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엄정하고 정확한 인선이 이뤄져야 한다. 박 대통령이 이를 무엇보다 깊게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도 교수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한국 사회의 보수진영 인사들이 너무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그간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는 민첩했을지 모르지만, 한국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어가야 할지, 국정운영 철학과 비전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엄지원 한승동 안선희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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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용준·김종훈·김병관·황철주·김학의·한만수.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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