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씨
휴전뒤 혼란기 독도 침탈 막아
독도의용수비대원과 경찰 독도경비대원으로 활약하며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키려 평생 애써온 김영복씨가 25일 저녁 8시 지병으로 숨졌다. 향년 84. 그의 영면으로 훈장을 받았던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 가운데 생존자는 9명으로 줄었다.
경북 울릉도에서 태어난 김씨는 1954년 5~12월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하며 독도를 지켰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서 1954년 3월27일 전역한 뒤 독도의용수비대에 합류했다.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의 독도 침탈 행위가 잦아지자, 1953년 4월20일 한국전쟁에 참전해 실전 경험이 있는 울릉도 청년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무기를 사서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들었다.
김씨가 독도의용수비대에서 활동하던 1954년 11월21일 오전 7시께엔 독도로 향해오던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헤쿠라호와 오키호에 박격포 9발과 중기관총 500여발, 경기관총 500여발을 발사해 물리쳤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일본 순시선에서는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 정부는 9일 뒤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기도 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30일 경찰에 독도수비 업무를 넘길 때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독도를 침범한 일본 순시선 등을 퇴치했다.
김씨는 1955년부터는 경북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특채돼, 독도경비대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화랑호 선장과 정장으로 근무하다 1974년 10월 퇴직했다. 그는 이후 울릉도에서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독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줬고, 1996년 4월6일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그는 27일 경북 영천시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된다.
김씨의 막내사위 이정환(47)씨는 “10여년 전 건강이 나빠져 울릉도에서 포항으로 옮겨 자식들과 함께 지냈을 때도, 몸이 불편해 독도와 울릉도를 자주 가지 못하는 것을 늘 아쉬워하셨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혼란기 때 정부를 대신해 독도를 지켰던 울릉도 청년들의 활약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독도의용수비대원의 정확한 수를 두고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부는 1996년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에게 훈장을 줬는데, 감사원은 2007년 4월 훈장을 받은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공적이 불분명하다며 국가보훈처에 공적을 재심사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국가보훈처는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1년 동안 조사를 한 뒤 큰 문제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김점구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사무처장은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은 앞으로 더 정확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분수(79)씨와 1남4녀가 있다. 빈소는 포항시 선린병원 장례식장(054-245-5418)에 마련됐고, 발인은 27일 오전 8시다.
포항/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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