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유업대리점연합회 회원들이 6일 오전 물량 떠넘기기와 영업사원 폭언에 항의하며 서울 중구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 남양 제품을 가득 쌓아 놓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남양유업 사태’ 진단
물질적 불균형에 계약관계 왜곡
압축 성장 탓 봉건적 인식 잔존
민주화 거치며 ‘인정 욕구’ 커져
물질적 불균형에 계약관계 왜곡
압축 성장 탓 봉건적 인식 잔존
민주화 거치며 ‘인정 욕구’ 커져
대기업 영업사원의 대리점주를 향한 폭언과 협박, 비행기 승무원을 괴롭힌 이른바 ‘라면 상무’, 호텔 주차관리원을 장지갑으로 폭행한 ‘빵 사장’….
이른바 ‘갑’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들끓고 있다. 급속하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한국 사회에서 봉건적 가치관과 서구 계약문화가 혼재하면서 생겨난 부작용이 ‘갑을관계’로 나타났다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갑’의 반대편에서 핍박받던 ‘을’들이 나선 모양새지만, 집단으로서 ‘을’이 개인인 ‘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기업-대리점’, ‘고객-승무원’ 등 수많은 계약관계를 통해 굴러가고, 여기서 계약 당사자는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게 서구의 계약문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인격적으로 평등한 사회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르더라도 개개인 모두 동등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물질적으로 열세인 상대방을) 동등한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나보다 (인격적·사회적으로) 부족하거나 못한 사람’으로 보는 전근대적·봉건적 인식이 남아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압축성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계약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도입되던 때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우리나라에 계약이라는 개념은 일제시대 때 도입됐는데, 당시엔 충분한 지식과 합의에 기초한 계약이 아니라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사람을 압박하는 법적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약탈과 착취를 위해 도입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기초한 계약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봉건적 인식의 잔존’이 불평등한 갑을관계의 원인이라면,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인격적·정서적 ‘인정 욕구’가 커졌다는 사실이 최근의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김호기 교수는 “물질적인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동등한 존재로서 인정받으려 하는 이른바 ‘인정 투쟁’이다. 동등한 인격체로 평가받고자 하는 욕구가 최근의 사회적 공분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경쟁 과잉과 그로 인해 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났다는 점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공정거래 전문 황치오 변호사는 “하도급 기업이나 대리점주 등 이른바 ‘을’들이 생존권을 위협받는 수준까지 내몰리고 있다. 노조 등 마땅한 대항 수단이 없기 때문에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광영 교수도 “스스로 ‘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더군다나 인터넷 등의 발전으로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확대된 것도 사회적 공분이 폭발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으로 뭉친 ‘을’들이 새로운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을’들이 모여 군중심리가 과잉되면 이성적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여론몰이로 인해 또다른 피해자가 양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철 허재현 정환봉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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