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15>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
<15>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
기숙사에서 총성 울렸지만
경찰이 비상경보 발령 안 한 사이
조승희는 노리스홀을 폐쇄하고
학생 한명 한명을 조준사격 했다
9분 동안 30명 살해한 뒤
마지막으로 자신을 쏘았다 ‘젤리 스팽키’라는 그의 아이디
우주선 타고 떠돌아다니는
외계인 친구라며 지은 가상인물
우울한 외톨이의 정체성 혼란과
소외감이 분노의 뿌리였는지도 2007년 4월16일 오전 7시15분, 미국 버지니아공대 학생 기숙사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홀’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이어 귀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학부생 에밀리 힐셔와 대학원생 라이언 클라크가 총을 맞고 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총을 쏜 범인은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워낙 순간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이라 목격자들의 진술도 엇갈렸다. 911 신고를 받고 출동한 대학경찰은 사건 발생 직전에 피해자 에밀리가 남자친구와 기숙사에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학생들의 진술을 확보했다. ‘흔히 발생하는’, ‘치정에 의한 면식범 살인’으로 판단한 경찰은 에밀리의 ‘백인’ 남자친구를 추적했다.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대학 캠퍼스 안에 비상경보를 발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간의 판단착오’가 엄청난 비극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학생 보호하고 숨진 홀로코스트 생존자 교수 경찰의 판단착오를 비웃듯, 총격 사건의 현장을 벗어난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 남학생은 모자를 눌러쓴 채 유유히 자신의 기숙사인 ‘하퍼 홀’로 돌아갔다. 기숙사 방에서 그는 마치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처럼 디지털카메라 동영상 기능을 이용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를 촬영한 뒤 미리 준비한 동영상 27개, 사진파일 43개와 함께 디브이디(DVD)로 구웠다. 그러고 나서 1800자짜리 선언문을 출력한 문서 뭉치와 함께 상자에 넣었다. 상자를 들고 일어서기 전 이 학생은 자신의 책상에 부유한 백인 남학생들과 순결하지 못한 여학생들을 비난하는 메모를 남겼다. 우체국이 막 문을 연 9시1분, 두툼한 꾸러미를 엔비시(NBC) 방송국에 보낸 이 남학생은 각 강의실에서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노리스 홀’로 향했다. 마치 보이스카우트를 연상케 하는 검은 조끼를 걸친 그의 주머니와 가슴팍 그리고 뒤에 멘 배낭은 불룩했고, 손에는 손가락 부분이 없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을 연상케 했다. 범인이 목표로 정한 ‘노리스 홀’은 버지니아공대를 상징하는 건물로 다양한 과목의 강의가 여러 강의실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첫 강의가 시작된 뒤인 9시12분, 노리스 홀 주출입구인 중문으로 들어선 이 동양인 학생은 두꺼운 목제 문을 닫고 배낭에서 쇠사슬을 꺼내 문손잡이 양쪽에 휘감고는 커다란 철제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문을 부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다. 다른 2개의 출입구 역시 같은 방법으로 봉쇄한 학생은 쇠사슬 위에 조잡한 글씨와 문장으로 “문을 열려 하면 폭탄이 터질 것이다”라고 쓴 종이를 붙였다. 건물을 나가려다 쇠사슬과 협박 문구를 발견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당황했고, 수업 중인 교수와 학생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9시39분, 검은 조끼와 장갑 등 이상한 복장을 한 동양계 학생이 응용수리학 강의가 진행중인 206호 강의실에 들어왔다. 양손에는 권총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교단으로 다가간 이 학생은 교수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 다음 “Hi, how are you?”(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피를 뿜으며 교수가 쓰러지고 학생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학생들에게 다가간 범인은 학생 한명 한명에게 차분하게 조준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있던 총 14명 중 10명이 숨졌고, 2명은 치명적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총격이 시작되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했던 2명의 학생은 기적처럼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채 살 수 있었다. 곧이어 옆 207호 독일어 강의실에 들어간 범인은 같은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강의실을 나온 범인은 복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발사했다. 그사이 205호 강의실에서는 총소리를 듣고 상황의 위급성을 파악한 학생들이 책상과 의자를 이용해 강의실 출입문을 봉쇄했다. 누군지 모를 총잡이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곧 총을 든 범인이 205호에 들이닥쳤고 열리지 않는 문에 몸을 던지는 범인과 학생들 간의 목숨을 건 사투가 시작됐다. 결국 문을 열지 못한 범인은 화가 난 듯 문을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다행히 나무 책상이 총알을 다 받아내 주었다. 205호 강의실 진입에 실패한 범인은 204호로 향했다. 그 안에서는 77살의 나치 인종학살(홀로코스트) 수용소 생존자인 리비우 리브레스쿠 교수가 온몸으로 강의실 문을 막고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학생들에게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지시했다. 그가 사력을 다해 침입자의 완력을 막아내는 동안 한명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2층 창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지만 그는 결국 문을 밀치고 들어온 범인에게 총격을 당해 숨졌다. 세계적인 항공역학 석학이 어린 학생들을 위해 생명을 던진 숭고한 희생이었다. 지존파와 유영철 연상케 한 기숙사방 메모 9시45분, 범인은 다시 프랑스어 수업이 진행중이던 211호 강의실로 향했다. 211호 역시 총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책상으로 문을 막았지만, 안타깝게도 범인은 몸을 던져 문을 밀며 반대쪽에 쌓인 책상들을 무너뜨려 버렸다. 강의실에 진입한 범인은 총을 든 채 강단에 있는 여교수에게 제일 먼저 다가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고는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211호 강의실에 있던 총 22명의 학생 중 11명이 살해됐다. 211호 강의실을 나온 범인은 206호, 207호 등 자신이 들렀던 강의실들을 다시 찾아가 문을 열려다 실패하거나 강의실에 진입해 추가 총격을 가하며 돌아다녔다. 이렇게 총 9분 동안 170여발의 총알을 발사해 교수 5명과 학생 25명을 살해한 범인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11호 강의실로 다시 들어와 부상자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향해 두 발을 연속 발사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자기 자신을 마지막 살해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건물 밖에서 들리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에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택한 ‘계획된’ 행동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우왕좌왕했다. 걷거나 뛰거나 서 있는 남학생들에겐 총을 겨누고 바닥에 엎드리라고 소리친 뒤 몸수색을 하고 수갑을 채웠다. 911 신고 내용과 부상자와 여학생들의 목격 진술을 종합해 노리스 홀 2층 현장으로 진입한 경찰은 211호 강의실에서 얼굴 전체가 날아가 신원을 식별할 수 없게 된 범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곧 그의 배낭에서 블랙베리 폰을 찾은 경찰은 그의 신원이 한국계 미국 영주권자로 버지니아공대 학생인 ‘조승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건 초기 언론에는 범인이 ‘중국계’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애꿎은 중국 학생들이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경찰은 조승희의 기숙사를 압수수색하고 룸메이트와 같은 과목 수강생 등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했다. 그가 남긴 글과 그림들에는 하나같이 피와 살인, 성폭행, 욕설 등이 가득했다. 주변 학생들 역시 그가 친구가 없으며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안 자고 특정 노래(컬렉티브 솔의 ‘샤인’)만 반복해서 듣는 기이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왜곡된 성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여러차례 ‘스토킹’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특히 사건 전 3주 동안 버지니아공대 캠퍼스 안에서 두 차례 발생한 ‘폭탄테러 위협 쪽지’ 사건의 범인 역시 조승희였다는 정황이 확인되면서 그가 최초 총격 이후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를 미리 점검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돼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그가 범행 직전 기숙사 방에 남긴 메모는 돈 많은 백인 남학생들과 순결하지 않은 여학생들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한국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르다가 검거된 뒤 취재 카메라를 향해 ‘부자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한 지존파와 유영철을 연상케 했다. 그의 잔혹하고 파괴적인 반인륜적 범행에 깔려 있는 ‘분노’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됐고 누구를 향한 것일까? ‘한국’과 ‘미국’ 어떤 사회의 영향이 더 컸을까? 우리 안에 ‘조승희’는 없을까 조승희는 1984년 1월18일, 대한민국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연립주택 반지하 셋방에 살던 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중동에서 건설 노동 일을 하던 노총각 부친과 농부의 딸이었던 어린 모친 사이의 애정 없는 중매결혼이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주위 지인들이 말했다. 어려서부터 통 말이 없던 조승희는 한때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사회성과 사교성이 부족했다. 반면 총명하고 활달한 조승희의 누나는 모든 면에서 탁월해, 우울한 외톨이 조승희는 누나와 비교를 당하면서 더욱 위축되고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조승희와 유사한 상황과 문제를 안고 있는 어린이는 많다. 하지만 조승희는 8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이 폭증하게 된다. 조승희의 부모는 한국보다 ‘더 관용적인 미국 사회’에서 아들이 나아지고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영어도 못하는데다 사교성과 사회성이 떨어지고 외모와 목소리마저 놀림감이 된 ‘이방인’ 조승희는 미국 학교에서 극심한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의 초·중·고 생활기록이나 교사, 급우들이 전하는 조승희의 아동 청소년기 모습은 공포 괴기영화 속 ‘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비유될 만하다. 교육열 높은 ‘한국 부모 특유의 노력과 강압’으로 버지니아공대라는 명문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성과 학술의 전당으로, 사회 각 부문 지도자를 양성하는 미국 대학의 개방적인 문화와 분위기는 오히려 조승희의 열등감과 소외감에 불을 지필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체성’ 혼란이었다. 한국인이라는 자기 정체성과 소속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사회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조승희는 스스로를 이방인, 외계인이라고 느꼈던 듯하다. 조승희는 인터넷 사회관계망 서비스의 아이디를 ‘젤리 스팽키’로 사용했는데, 그의 기숙사 동료들에 따르면 그 이름은 조승희 스스로가 ‘우주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외계인 여자친구’라면서 지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일 때에는 살해할 사람들의 명단(일명 ‘데스 노트’)을 적어서 가지고 다녔는데 이를 몰래 훔쳐본 급우들은 가장 첫번째 대상자로 조승희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올려놓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그가 공대 학생 기숙사인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홀’에서 첫번째 살인을 저지른 뒤 기숙사 방에서 녹화해 방송국에 보낸 사진과 동영상에는 한국 영화 <올드보이> 속 장면을 흉내낸 듯 망치를 휘두르는 장면과 홍콩 영화 <지존무상> 속 주인공이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따라한 이미지가 있었고, 함께 동봉한 메시지 속에는 미국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특히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총을 들고 들어가 교사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콜럼바인 사건’의 범인들을 영웅시하고 추앙하는 조승희의 독백과 글은 그가 가진 분노의 뿌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힌트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과 달리 주로 칼 등 흉기나 방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 사회에서도 조승희와 유사한 ‘반사회적 불특정 다수 대상 살인범’들은 심심찮게 나타나곤 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강남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인 불법체류자 왕리웨이와 오원춘 등 체류 외국인에 의한 흉악 범죄가 발생하면서 ‘다문화 반대’를 표방하는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고 극우 성향의 누리꾼 등이 극단적 외국인 혐오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조승희 사건 발생 후 주미 한국대사가 사죄 발언을 하자 미국 언론과 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미국 체류자가 미국에서 저지른 범죄에 왜 외국 정부나 국민들이 사과하느냐’는 태도를 취했듯이, 우리가 왕리웨이나 오원춘 등 외국인 범죄 때문에 그가 속한 국가나 민족을 욕하고 비하할 이유나 명분은 전혀 없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학교나 또래 사이에서 차별받고 따돌림당한다면 이들이 ‘한국의 조승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경각심은 필요하다. 미국 사회는 조승희 사건을 계기로 인종화합과 차별금지,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 방지를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다문화 사회가 된 한국에서 인종과 민족, 피부색이 다른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원문화와 한국 문화 모두에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의 노력을 배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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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자신을 쏘았다 ‘젤리 스팽키’라는 그의 아이디
우주선 타고 떠돌아다니는
외계인 친구라며 지은 가상인물
우울한 외톨이의 정체성 혼란과
소외감이 분노의 뿌리였는지도 2007년 4월16일 오전 7시15분, 미국 버지니아공대 학생 기숙사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홀’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이어 귀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학부생 에밀리 힐셔와 대학원생 라이언 클라크가 총을 맞고 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총을 쏜 범인은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워낙 순간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이라 목격자들의 진술도 엇갈렸다. 911 신고를 받고 출동한 대학경찰은 사건 발생 직전에 피해자 에밀리가 남자친구와 기숙사에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학생들의 진술을 확보했다. ‘흔히 발생하는’, ‘치정에 의한 면식범 살인’으로 판단한 경찰은 에밀리의 ‘백인’ 남자친구를 추적했다.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대학 캠퍼스 안에 비상경보를 발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간의 판단착오’가 엄청난 비극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학생 보호하고 숨진 홀로코스트 생존자 교수 경찰의 판단착오를 비웃듯, 총격 사건의 현장을 벗어난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 남학생은 모자를 눌러쓴 채 유유히 자신의 기숙사인 ‘하퍼 홀’로 돌아갔다. 기숙사 방에서 그는 마치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처럼 디지털카메라 동영상 기능을 이용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를 촬영한 뒤 미리 준비한 동영상 27개, 사진파일 43개와 함께 디브이디(DVD)로 구웠다. 그러고 나서 1800자짜리 선언문을 출력한 문서 뭉치와 함께 상자에 넣었다. 상자를 들고 일어서기 전 이 학생은 자신의 책상에 부유한 백인 남학생들과 순결하지 못한 여학생들을 비난하는 메모를 남겼다. 우체국이 막 문을 연 9시1분, 두툼한 꾸러미를 엔비시(NBC) 방송국에 보낸 이 남학생은 각 강의실에서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노리스 홀’로 향했다. 마치 보이스카우트를 연상케 하는 검은 조끼를 걸친 그의 주머니와 가슴팍 그리고 뒤에 멘 배낭은 불룩했고, 손에는 손가락 부분이 없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을 연상케 했다. 범인이 목표로 정한 ‘노리스 홀’은 버지니아공대를 상징하는 건물로 다양한 과목의 강의가 여러 강의실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첫 강의가 시작된 뒤인 9시12분, 노리스 홀 주출입구인 중문으로 들어선 이 동양인 학생은 두꺼운 목제 문을 닫고 배낭에서 쇠사슬을 꺼내 문손잡이 양쪽에 휘감고는 커다란 철제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문을 부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다. 다른 2개의 출입구 역시 같은 방법으로 봉쇄한 학생은 쇠사슬 위에 조잡한 글씨와 문장으로 “문을 열려 하면 폭탄이 터질 것이다”라고 쓴 종이를 붙였다. 건물을 나가려다 쇠사슬과 협박 문구를 발견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당황했고, 수업 중인 교수와 학생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9시39분, 검은 조끼와 장갑 등 이상한 복장을 한 동양계 학생이 응용수리학 강의가 진행중인 206호 강의실에 들어왔다. 양손에는 권총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교단으로 다가간 이 학생은 교수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 다음 “Hi, how are you?”(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피를 뿜으며 교수가 쓰러지고 학생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학생들에게 다가간 범인은 학생 한명 한명에게 차분하게 조준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있던 총 14명 중 10명이 숨졌고, 2명은 치명적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총격이 시작되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했던 2명의 학생은 기적처럼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채 살 수 있었다. 곧이어 옆 207호 독일어 강의실에 들어간 범인은 같은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강의실을 나온 범인은 복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발사했다. 그사이 205호 강의실에서는 총소리를 듣고 상황의 위급성을 파악한 학생들이 책상과 의자를 이용해 강의실 출입문을 봉쇄했다. 누군지 모를 총잡이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곧 총을 든 범인이 205호에 들이닥쳤고 열리지 않는 문에 몸을 던지는 범인과 학생들 간의 목숨을 건 사투가 시작됐다. 결국 문을 열지 못한 범인은 화가 난 듯 문을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다행히 나무 책상이 총알을 다 받아내 주었다. 205호 강의실 진입에 실패한 범인은 204호로 향했다. 그 안에서는 77살의 나치 인종학살(홀로코스트) 수용소 생존자인 리비우 리브레스쿠 교수가 온몸으로 강의실 문을 막고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학생들에게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지시했다. 그가 사력을 다해 침입자의 완력을 막아내는 동안 한명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2층 창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지만 그는 결국 문을 밀치고 들어온 범인에게 총격을 당해 숨졌다. 세계적인 항공역학 석학이 어린 학생들을 위해 생명을 던진 숭고한 희생이었다. 지존파와 유영철 연상케 한 기숙사방 메모 9시45분, 범인은 다시 프랑스어 수업이 진행중이던 211호 강의실로 향했다. 211호 역시 총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책상으로 문을 막았지만, 안타깝게도 범인은 몸을 던져 문을 밀며 반대쪽에 쌓인 책상들을 무너뜨려 버렸다. 강의실에 진입한 범인은 총을 든 채 강단에 있는 여교수에게 제일 먼저 다가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고는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211호 강의실에 있던 총 22명의 학생 중 11명이 살해됐다. 211호 강의실을 나온 범인은 206호, 207호 등 자신이 들렀던 강의실들을 다시 찾아가 문을 열려다 실패하거나 강의실에 진입해 추가 총격을 가하며 돌아다녔다. 이렇게 총 9분 동안 170여발의 총알을 발사해 교수 5명과 학생 25명을 살해한 범인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11호 강의실로 다시 들어와 부상자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향해 두 발을 연속 발사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자기 자신을 마지막 살해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건물 밖에서 들리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에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택한 ‘계획된’ 행동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우왕좌왕했다. 걷거나 뛰거나 서 있는 남학생들에겐 총을 겨누고 바닥에 엎드리라고 소리친 뒤 몸수색을 하고 수갑을 채웠다. 911 신고 내용과 부상자와 여학생들의 목격 진술을 종합해 노리스 홀 2층 현장으로 진입한 경찰은 211호 강의실에서 얼굴 전체가 날아가 신원을 식별할 수 없게 된 범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곧 그의 배낭에서 블랙베리 폰을 찾은 경찰은 그의 신원이 한국계 미국 영주권자로 버지니아공대 학생인 ‘조승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건 초기 언론에는 범인이 ‘중국계’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애꿎은 중국 학생들이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경찰은 조승희의 기숙사를 압수수색하고 룸메이트와 같은 과목 수강생 등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했다. 그가 남긴 글과 그림들에는 하나같이 피와 살인, 성폭행, 욕설 등이 가득했다. 주변 학생들 역시 그가 친구가 없으며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안 자고 특정 노래(컬렉티브 솔의 ‘샤인’)만 반복해서 듣는 기이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왜곡된 성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여러차례 ‘스토킹’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특히 사건 전 3주 동안 버지니아공대 캠퍼스 안에서 두 차례 발생한 ‘폭탄테러 위협 쪽지’ 사건의 범인 역시 조승희였다는 정황이 확인되면서 그가 최초 총격 이후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를 미리 점검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돼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그가 범행 직전 기숙사 방에 남긴 메모는 돈 많은 백인 남학생들과 순결하지 않은 여학생들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한국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르다가 검거된 뒤 취재 카메라를 향해 ‘부자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한 지존파와 유영철을 연상케 했다. 그의 잔혹하고 파괴적인 반인륜적 범행에 깔려 있는 ‘분노’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됐고 누구를 향한 것일까? ‘한국’과 ‘미국’ 어떤 사회의 영향이 더 컸을까? 우리 안에 ‘조승희’는 없을까 조승희는 1984년 1월18일, 대한민국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연립주택 반지하 셋방에 살던 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중동에서 건설 노동 일을 하던 노총각 부친과 농부의 딸이었던 어린 모친 사이의 애정 없는 중매결혼이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주위 지인들이 말했다. 어려서부터 통 말이 없던 조승희는 한때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사회성과 사교성이 부족했다. 반면 총명하고 활달한 조승희의 누나는 모든 면에서 탁월해, 우울한 외톨이 조승희는 누나와 비교를 당하면서 더욱 위축되고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조승희와 유사한 상황과 문제를 안고 있는 어린이는 많다. 하지만 조승희는 8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이 폭증하게 된다. 조승희의 부모는 한국보다 ‘더 관용적인 미국 사회’에서 아들이 나아지고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영어도 못하는데다 사교성과 사회성이 떨어지고 외모와 목소리마저 놀림감이 된 ‘이방인’ 조승희는 미국 학교에서 극심한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의 초·중·고 생활기록이나 교사, 급우들이 전하는 조승희의 아동 청소년기 모습은 공포 괴기영화 속 ‘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비유될 만하다. 교육열 높은 ‘한국 부모 특유의 노력과 강압’으로 버지니아공대라는 명문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성과 학술의 전당으로, 사회 각 부문 지도자를 양성하는 미국 대학의 개방적인 문화와 분위기는 오히려 조승희의 열등감과 소외감에 불을 지필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체성’ 혼란이었다. 한국인이라는 자기 정체성과 소속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사회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조승희는 스스로를 이방인, 외계인이라고 느꼈던 듯하다. 조승희는 인터넷 사회관계망 서비스의 아이디를 ‘젤리 스팽키’로 사용했는데, 그의 기숙사 동료들에 따르면 그 이름은 조승희 스스로가 ‘우주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외계인 여자친구’라면서 지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일 때에는 살해할 사람들의 명단(일명 ‘데스 노트’)을 적어서 가지고 다녔는데 이를 몰래 훔쳐본 급우들은 가장 첫번째 대상자로 조승희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올려놓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그가 공대 학생 기숙사인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홀’에서 첫번째 살인을 저지른 뒤 기숙사 방에서 녹화해 방송국에 보낸 사진과 동영상에는 한국 영화 <올드보이> 속 장면을 흉내낸 듯 망치를 휘두르는 장면과 홍콩 영화 <지존무상> 속 주인공이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따라한 이미지가 있었고, 함께 동봉한 메시지 속에는 미국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특히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총을 들고 들어가 교사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콜럼바인 사건’의 범인들을 영웅시하고 추앙하는 조승희의 독백과 글은 그가 가진 분노의 뿌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힌트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과 달리 주로 칼 등 흉기나 방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 사회에서도 조승희와 유사한 ‘반사회적 불특정 다수 대상 살인범’들은 심심찮게 나타나곤 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강남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인 불법체류자 왕리웨이와 오원춘 등 체류 외국인에 의한 흉악 범죄가 발생하면서 ‘다문화 반대’를 표방하는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고 극우 성향의 누리꾼 등이 극단적 외국인 혐오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조승희 사건 발생 후 주미 한국대사가 사죄 발언을 하자 미국 언론과 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미국 체류자가 미국에서 저지른 범죄에 왜 외국 정부나 국민들이 사과하느냐’는 태도를 취했듯이, 우리가 왕리웨이나 오원춘 등 외국인 범죄 때문에 그가 속한 국가나 민족을 욕하고 비하할 이유나 명분은 전혀 없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학교나 또래 사이에서 차별받고 따돌림당한다면 이들이 ‘한국의 조승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경각심은 필요하다. 미국 사회는 조승희 사건을 계기로 인종화합과 차별금지,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 방지를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다문화 사회가 된 한국에서 인종과 민족, 피부색이 다른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원문화와 한국 문화 모두에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의 노력을 배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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