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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엄마 아들’ 아닌 ‘그녀의 남자’로 산 4개월

등록 2013-05-31 19:44수정 2013-06-02 15:51

mayse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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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가족] 30대의 가출
▶ “지금까지 엄마 아들로 살았으니 앞으로는 길라임의 남자로 살겠습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에게 했던 현빈의 ‘명대사’였죠. 한 지인이 이 말을 두고 “결혼 전엔 현빈이 멋졌는데, 아들 낳고 보니 욕이 나오더라”라고 평한 글을 보고 빵 터졌던 기억도 납니다. 엄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들은 부지런히 제 짝을 찾아갑니다. 이분처럼 방을 빼서라도요.

“네 돈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판사나 의사를 찾아봐라”
많은 걸 바라는 엄마와
기대 저버리고 만 아들
결론은 ‘나가서 살아보라’

월세·생활비 부담되지만
여친과 마음껏 만나고
요리 실력도 일취월장
즐거운 가출생활 하루하루

저는 그녀의 깊고 슬프고 따뜻한 눈이 좋았습니다. 일요일 교회 예배가 끝나고 20~30대 청년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전 그녀와 처음으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는 제 마음속으로 저릿하게 전류가 흘렀습니다. 그 뒤로 영화 보자, 뮤지컬을 보여주겠다는 핑계로 그녀를 불러냈습니다. 서울 신촌에 벚꽃이 떨어지던 봄날 저는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지만 부모님께는 바로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밥상머리에 앉으면 “이화여대 이상은 나온 여자여야 한다” “네가 돈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아내는 전문직이 좋겠다. 판사나 의사를 찾아봐라”고 하시는 부모님께 중소기업에 다니는 저보다 더 적게 버는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씀드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여친과 관계가 깊어져 부모님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말씀드리자는 생각에 차일피일 날을 미뤘습니다.

만난 지 9개월쯤 되던 날, 그날은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부모님과 형, 형수와 식사를 하던 중 형수가 “도련님은 여자친구 없으세요”라고 묻는 질문에 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곧바로 부모님이 출신 대학과 직업을 묻는 질문에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뜻이 있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벌이는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역시나 실망을 하시더군요. 어머니께서는 날 선 말을 쏟아내셨습니다. “네가 돈의 소중함을 몰라서 그런다. 사람 구실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중요한 일을 부모 허락 없이 할 수 있느냐. 너를 이때까지 키워준 부모는 아무것도 아니냐” “한 푼도 도와줄 수 없으니 나가서 네 힘으로 잘 살아 봐라.” 어머니로선 벌이가 시원치 않은 제 동반자가 될 사람은 재정적으로 안정된 사람이길 바라셨습니다.

저도 지지 않고 맞섰습니다. “우리 회사 사람들도 그 월급 받고 결혼해서 잘만 살아요”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제가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살 자신 있습니다.”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새벽 1시가 되어가도록 이어지는 실랑이에 아버지가 매듭을 지으셨습니다. 아버지는 “1년간 나가서 살아보고 그 뒤에 이야기해보자”며 사실상 ‘나가라’고 통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세상 물정을 몰라 지금의 여친을 만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죠. 당장은 부모님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에선 대학교 가면 독립한다는데 서른살에 ‘가출’한 저는 10년은 늦은 것이니까요. 한 달간 집을 알아보고, 짐을 싸서 집을 나오는 날 어머니께서는 따라 나오지 못하시고 문가에서 눈시울만 붉히셨습니다.

집을 나오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로 매달 50만원씩 깨졌습니다. 냄비부터 식기건조대·커튼까지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은 어찌 그리 많을까요.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집을 나와서 여친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여친을 만나러 나갈 때 부모님께 “친구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제가 야근을 마치고 오면 여자친구가 우렁각시처럼 아침 먹을 것을 만들어 놓고 ‘오빠 사랑해~ 나는 천사인가봐’라는 메모를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하루는 “내가 너를 내보낸 게 잘못한 것 같다. 너희들을 더 가까이 붙여준 것은 아닌지…”라고 한숨 쉬며 말하실 때, ‘예, 맞아요’라고 대꾸하는 말이 목을 간질거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소득은 또 있습니다. 제 손으로 밥을 만들어 먹게 됐다는 점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살 동안은 제가 요리를 할 필요가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라면 끓이는 정도였습니다. 기왕 집을 나온 김에 요리를 배워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요리가 재미있더군요. 김치찌개부터 시작해서, 집을 나온 지 4개월 만에 명란 파스타에 ‘양송이 치킨 필레’ 같은 프랑스 요리도 맛있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됐습니다. 밖에서 사먹는 것에 비하면 3분의 1 가격에 양껏,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젠 주말이 되면 맛집을 찾아다니기보다 집에서 여친과 어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을까 고민합니다.

‘제 손으로 밥을 만들어 먹는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저를 조금 더 자라게 한 듯합니다. 소설가 김훈이 자주 하는 말이 있죠.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어먹을 수 없는 자가 무슨 인격을 말할 수가 있겠어요. 인간의 인격은 자기 손으로 제 밥을 벌어먹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죠.” 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힘으로 번 돈으로 충당하면서 세상을 보는 제 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왜 가파르게 오르는 집세와 장바구니 물가에 전전긍긍하는지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제 제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섰다는 생각에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제겐 부모님과 여친 중간에서 최대한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도록 전략·전술을 잘 구사하는 중책이 맡겨졌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지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어 고민만 늘어납니다. 집을 나온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부모님은 여자친구를 만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에 한 두번 집에 들를 때마다 어머니는 “걔가 어디가 좋니” 하고 타박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제게 여친이 얼마나 소중한지, 부모님은 모르는 그녀의 좋은 면이 얼마나 많은지 설명하다 지쳐 집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법륜 스님의 가르침을 찾아 <스님의 주례사>를 꺼내 듭니다. “베풀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하면 길 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상대에게 덕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골라도 막상 고르고 나면 제일 엉뚱한 사람을 골라 결국엔 후회하게 됩니다.” 여친의 경제적 능력이 아닌 제가 여친을 잘되도록 도울 생각이 있는지가 제 행복을 결정하게 되리라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결혼 안 한 스님의 한가한 설법 정도로 생각했던 이 구절은 이제는 저를 붙들어주는 단단한 끈입니다.(부모님이 기독교인이라 스님 말씀을 잘 안 들으려 하신다는 건 함정이긴 합니다만…) 지금 당장 해결 낼 수 없는 일에 골머리 썩기보단 지금 여친과 부모님께 잘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결국 여친과 함께할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즐거운 가출 생활의 하루를 보냅니다.

30년 만에 가출을 감행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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