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25> 영국 한인 여성 ‘토막 살해’ 사건
<25> 영국 한인 여성 ‘토막 살해’ 사건
영국 역대 왕조의 중요한 군사 및 외교적 요충지였던 ‘킹스턴’(정식 명칭은 킹스턴어폰템스)은 런던 중심부에서 약 10㎞ 떨어져 있다. 고풍스런 역사적 건물들과 유유히 흐르는 템스강 지류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 사이로 조성된 쇼핑타운은 킹스턴 경제의 활력소다. 그 한쪽 편에는 ‘한국인 마을’(코리아타운)이 들어선 뉴몰든 지역이 있다. 한국 음식을 파는 한인 식당과 한국에서 공수해 온 식재료와 생활 필수품을 파는 가게들이 죽 늘어선 이곳은 영국에 거주하는 주재원과 유학생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필수 방문지다. 영국 한인회의 근거지이며 ‘영국 속 한국’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인-영국인 간 결혼도 다른 곳에 비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4년 6월8일 밤, 킹스턴 지역이 갑자기 발칵 뒤집어졌다. 킹스턴경찰서에서 긴급 공개수배령을 발령했기 때문이다. 긴급수배 대상자는 34살 폴 달튼으로 ‘사망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위험할 수 있으니 발견하는 즉시 접근하지 말고 경찰에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틀째 연락이 닿지 않는 아들 내외의 안전을 염려한 달튼의 부모가 킹스턴에 있는 아들 집을 방문했다가 냉장고 안에서 비닐봉지에 싸인 시신 일부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그 시신은 달튼의 아내인 한국인 강아무개(당시 36살)씨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피해자 어머니 찾은 런던경찰청 형사들
한인 사회는 술렁거렸고 주영 한국대사관 영사팀은 바쁘게 움직였다. 경찰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이 강씨라는 것을 확인한 대사관에서는 한국에 있는 피해자 가족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영국 방문을 위한 안내를 했다. 영국 외무부를 통해서는 조속한 범인 검거와 사건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피해자 강씨는 1997년에 결혼한 남편인 폴 달튼과 함께 ‘킹스턴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중이었는데 부부간 불화가 심했고 사건 당일에도 부부싸움 끝에 살인 및 시신 훼손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곱살 난 딸이 있었다. 용의자 폴 달튼은 사건 직후 도주하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살해할 의사는 없었고 언쟁을 하던 중 한번 때렸을 뿐인데 일이 벌어졌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킹스턴 경찰은 공개수배와 함께 용의자 폴 달튼의 연고지 및 지인들을 대상으로 수사범위를 확대하고 공항·항만·기차역 등 용의자의 도주 경로를 추적했다. 곧 달튼의 흔적이 포착되었다.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한 것이다. 사건은 런던수도경찰청(The London Metropolitan Police, 약칭 The Met)으로 이관됐고, 수도경찰청은 곧 외무부를 통해 일본 외무성에 폴 달튼의 소재 확인에 대한 협조 요청을 하는 동시에 도쿄 경시청 외사과에 직접 공조 요청을 하고는 형사 2명을 일본으로 급파했다. 도망자 폴 달튼은 자신과 피해자 강씨의 현금과 예금을 모두 찾아 충분한 도주자금을 마련한 뒤 출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에서의 도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추적을 피해 현금을 주고 허름한 여관에 투숙했지만 런던수도경찰청의 긴급 공조 요청을 받은 도쿄 경시청의 수배는 소규모 숙박업소에까지 도달했고 인상착의가 유사한 서양 방문객의 수상한 투숙은 곧 신고로 이어졌다. 결국 폴 달튼은 영국 형사들과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일본으로 도주했던 용의자의 신병이 확보되었으니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될 것처럼 보였다.
한국인 아내 폭행·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내 유기한 뒤
일본으로 도주했던 폴 달튼
아내의 폭언을 참지 못해
순간적 분노 일으켰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외손녀 위해 사위 용서한다는
‘착한 장모’의 한국적 관용은
부인을 ‘나쁜 사람’ 만들려는
못된 영국 사위의 방어 전략과
만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변호사를 선임한 폴 달튼은 일관되게 ‘살해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교묘하게 사건 발생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수년 동안 지속된 아내의 폭언과 협박, 괴롭힘 등으로 시달려 오다가 사건 당일 극심한 폭언을 듣던 끝에 순간적인 분노가 폭발해 한대 때렸을 뿐이다. 아내가 쓰러지자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숨을 쉬지 않았다.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시신을 절단한 뒤 템스강으로 가져가 버리려다 너무 겁이 나서 그냥 냉장고에 넣고 일본으로 도주했다”는 것이 달튼의 주장이었다. 그는 또한 피해자 강씨가 자신을 ‘노예’처럼 부렸고 영어학원 수입도 아내 혼자 관리하면서 자신에게는 용돈조차 주지 않았고, 사건 당일에는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오직 영국 시민권 때문이었지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해 격분했다고 주장했다. 사망한 피해자는 말이 없고, 둘만 아는 문제에 대한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달튼의 변호인은 그의 일방적인 주장에 동조할 목격자와 증인들을 최대한 확보했다. 사망한 피해자 편을 들어줄 목격자와 증인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 수사 결과도 달튼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영국 경찰이 수사를 종결하기 전에 꼭 거치는 절차가 있다. 피해자나 그 가족을 찾아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피해자 쪽의 상황과 의견을 묻는 과정이다. 영국 런던수도경찰청에서는 상처 입은 피해 유가족의 충격을 공감하며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주는 ‘특별한 역할’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베테랑 형사들을 한국으로 보냈다. 사건 발생 4개월 만인 2004년 10월26일, 런던경찰청 이언 스미스 수석수사관을 단장으로 하는 3명의 형사가 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에 있는 피해자 강씨의 모친 박아무개(당시 63살)씨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미리 학습하고 온 런던경찰청 형사들은 우선 “따님이 영국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라는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피해자의 사망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경찰이, 영국에서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인사다. 그 첫인사에 이미 어머니 박씨의 마음은 눈 녹듯 풀렸다. 이어진 차분하고 따뜻한 설명과 앞으로 벌어질 재판 과정에 대한 안내에 고마움을 느낀 박씨는 딸을 죽게 한 혐의로 기소된 사위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지길 바라느냐는 영국 형사의 질문에 “먼저 하늘나라로 간 딸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았을 것… 여섯살 난 외손녀를 위해서라도 용서하기로 했다”고 답했다. 살기 위해 한국인 부인의 명예를 짓밟다 영국으로 돌아간 런던경찰청 형사들은 피의자 폴 달튼에게 종신형까지 선고가 가능한 ‘살인’죄가 아니라 유기징역형에 처해지는 ‘폭행치사’ 및 ‘장례절차 지연’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기소를 요청했다. 검찰은 경찰의 요청대로 기소했다. 모든 것을 ‘내 탓이오’라고 받아들이는 한국 어머니의 관용과 용서가 영국 형사들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피고인 폴 달튼이 자신의 죄를 덜고 형량을 줄이기 위해 택한 방법은 피해자인 부인의 인격을 짓밟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형사사건의 재판 과정에는 피해자(유가족)의 상황과 심경을 조사한 ‘피해자 충격 진술서’(Victim Impact Statement)가 제출되어 판사의 심리와 배심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이국에서 남편의 손에 숨진 딸의 비운을 자신의 탓으로 받아들이며 외손녀를 위해 사위를 용서한다는 ‘착한 장모’의 한국적 관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인을 최대한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는 못된 영국 사위의 자기방어 전략과 만나면서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아내를 한대 때려 ‘폭행치사’한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시신을 절단, 토막내어 냉장고에 숨기고 도주해 ‘장례절차를 지연’한 혐의에 대해 징역 3년, 총 징역 5년이라는 가벼운 형벌이 내려진 것이다. 영국 검찰은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지 않고, 범죄의 잔혹성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량을 내린 것은 법리 위반이라며 항소했다. 영국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검찰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항소를 하지 못한다.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고 소송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번 사건의 경우 검찰이 항소할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본 셈이다. 2005년 7월25일,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고등형사법원 ‘올드 베일리’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 검찰과 피고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모두 끝나고 배심원들이 밀실로 들어가 평결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평결에 도달했다는 보고가 판사에게 들어왔다. 배심원 대표는 이렇게 평결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이 기소한 살인죄에 대해 무죄를 평결했다. 피고가 피해자가 사망하기에 충분한 위력으로 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은 인정되어 폭행치사 혐의에 대해 유죄를 평결했다. 아울러 폭행으로 쓰러진 피해자에 대한 구호조치를 실시하지 않고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해 그 장례절차를 지연시킨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를 평결했다.” 법정은 술렁거렸다. 재판장 그로스 판사는 장내 정숙을 명령한 뒤 “이 사건은 매우 심각하고 잔혹한 범죄다. 피고는 부부싸움 끝에 격분해 피해자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살인에 대한 고의가 입증되지 않아 폭행치사죄로 처벌하게 되었다는 점을 피고는 명심하기 바란다”며 논란의 대상이 된 재판을 마무리했다. 영국 교민들은 물론,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본부를 둔 한미여성협회(회장 미국인 실비아 패튼)에서도 ‘폴 달튼’ 판결이 ‘인종차별’이라며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강하게 항의했다. 영국 재판부나 언론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부부싸움 끝에 화가 나 배우자를 잔혹하게 살해한 경우 대부분 ‘폭행치사’죄를 적용한다는 말인가. 2013년 7월28일 영국 ‘루이스 형사법원’은 이혼을 요구하며 욕설과 모욕을 퍼부은 아내(서맨사 메들런드, 당시 24살)를 칼로 찔러 살해한 타이 메들런드(당시 26살)에게 ‘최소 25년형’을 선고했다. 25년을 복역한 뒤 행형성적에 따라 석방 가능성을 심리해 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사실상의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다. 또다른 아내살해범 메들런드와의 형량 차이 물론 폴 달튼이 아내를 살해한 사건과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서는 차이가 있다. 주먹으로 때려 살해한 것과, 칼로 찔러 살해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이 메들런드의 경우 아내의 불륜 의심과 이혼 요구에 격분해 페이스북에 아내와의 성관계 사진을 올리고 아내를 ‘거짓말쟁이 간통녀’라며 모욕하는 글을 올리는 등 ‘거절당했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살인이 ‘계획적’이었다는 증거가 확보되었다는 점이다. 법정에서 판사는 아내 서맨사가 아기를 유산한 뒤 피고인이 심리적 충격을 받았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심을 할 만한 정황이 있었고, 결국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게 되었다는 ‘정상을 참작’한다고 판시했다. 그럼에도 피고인 타이 메들런드는 ‘살인죄’ 유죄를 인정받고 ‘최소 2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메들런드와 달튼의 형량이 이처럼 다른 것은 범죄가 계획적이었느냐 우발적이었느냐의 차이였을까? 2005년 8월 동네 청년들에게서 망치로 테러를 당해 피를 흘리고 응급치료를 받아야 했던 한국인 유학생 전아무개씨 사건에서도 영국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1993년 흑인 청년 스티븐 로런스(당시 18살)가 버스정류장에서 갑자기 나타난 백인 청년들에게 칼에 찔려 사망한 ‘인종혐오 테러’ 범죄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으로 폭동까지 불렀던 영국 경찰과 사법부는 종종 인종차별로 의심받을 만한 수사·기소 혹은 재판 결과를 보인다. 형사 절차는 그 나라 고유의 주권에 해당하는 사안으로, 외국 정부가 부당한 개입을 한다면 ‘주권 침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자국민이 외국에서 부당한 사법 피해를 당할 위험에 있거나 당했음에도 방관한다면 ‘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사명을 방기하는 것이다. 자국민이 반복적으로 외국 수사당국이나 사법부에 의해 부당한 조처나 처분을 당한다면 국가적 문제다. 대한민국의 국력과 외교역량이 국제사회에서 무시 못할 위치를 차지하는 지금, 그동안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형사사법 공조와 영사 기능의 강화가 필요하다. 단 한명의 교민이나 유학생, 여행객이라도 외국에서 부당한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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