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연 성공회대 엔지오(NGO)대학원장이 지난 19일 서울시 중구 시청광장에 세워진 민주당 천막당사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참여연대, 희망제작소 등에서 활동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학계로 와서 편한 길을 걸으면서 사회참여적이다 하는 정도”인 ‘2선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조희연 성공회대 NGO대학원장
조희연 성공회대 NGO대학원장
긴급조치로 감옥 많이 갔는데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
자기를 희생한 동료들과 달리
대학원 갔던 비겁한 나에겐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있어 진보정당이 게토화된 것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위기
진보정치가 없다 보니
사람들이 철탑 위로 올라가 8월5일 오전 11시, 국회 앞에서 이색적인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입과 손이 테이프로 칭칭 묶인 한 남자를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가 달려와 쓰러뜨리고 발로 밟았다. 사내의 검은 양복에는 “○○○을 사찰하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국가정보원 불법 선거개입 규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모인 대학교수들의 시국 패러디였다. 그들 옆에서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를 걸친 채 컴퓨터를 두드리며 댓글 공작을 연기하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성공회대 엔지오(NGO)대학원장이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의장 조희연(56) 교수. 평소 진중하고 숫기 없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만한 파격이었다. 이틀 전인 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제5차 범국민 촛불문화제의 첫 연사로 나선 그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쓰던 뿔테 안경도 벗어던지고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이 사건에는 네명의 핵심적인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원. 판. 김. 세! 같이 한번 외쳐봅시다. 원세훈, 김용판, 김무성, 권영세!” 좀처럼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는 법이 없어 서울대 김명환 교수가 “조희연 교수 화내는 모습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던 인물이, 단상에 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촛불군중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난 30여년간 <한국사회 구성체논쟁>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동원된 근대화> 등 10권 이상의 단행본을 출간하며 한국의 사회운동론을 집대성해온 이론가이자, 참여연대 초대 사무처장과 희망제작소 이사 등을 맡아 시민운동의 지평을 넓혀온 실천적 지식인 조희연. 상당수의 지식인과 재야인사들이 대선 뒤 다소 침잠한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 그는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선두에 섰다. 조희연을 이 폭염 속 시위현장으로 나서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지난 19일 아침,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최근 그는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이던 1978년, 조희연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철폐하라”는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징역 2년에 처해진 바 있다. 열관리기능사 시험 낙방으로 바뀐 운명 -35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셨는데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나 말고도 긴급조치로 감옥에 갔던 수백명이 이번 재심으로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언론에서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스스로 ‘2선 지식인’이라 생각한다. 우리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친구들 중에 그 일로 삶이 망가진 채 복원이 안 된 이들이 많은데 나는 학계로 와서 편한 길을 걸으면서 지식인 중에 조금 사회참여적이다 하는 정도인데….” 그의 누리집에 실린 자기소개글의 부제는 “빚진 심정으로 사는 어느 지식인의 삶의 이야기”. 시대에 대한 채무감과 자책감은 그의 삶을 관통한다. -왜 자신을 ‘2선’이라고 여기는가? “예전에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전위적으로 싸우는 동료들이 많이 있었다. 내겐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같은 게 있다. 70년대 말은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투신하는 물결이 거셌던 시기였는데 난 약간 비겁한 쪽이었다. ‘시대적인 흐름에 따르긴 하지만 좀더 편한 길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일반 노동자로 가지 말고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서 가야지’ 하고는 열관리기능사 자격증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기가 부족해 2차 시험에 낙방하는 바람에 다시 복학을 하게 됐다. 복학을 하니까 또 교수가 되고 싶은 꿈이 살아나는 거다. 그래서 대학원에 갔다.” 그는 노동현장 대신 대학원을 택한 이 시기의 괴로움을 “나 자신에 대한 구토”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원에 가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복학이 되어 그해 말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상부”로부터 “학생운동 전력자는 제외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이 삼청교육대며 사회정화운동으로 “사회불만세력”을 발본색원하던 공포의 시대였다. 당시 합격 취소된 시위전력자 몇몇이 멋모르고 청와대 민원실에 탄원을 넣었는데, 뜻밖에도 5공 실세이던 허문도와 이수정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던가? “신군부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거지. 그렇게만 하면 대학원이 문제냐, 이 사람들아, 유학도 보장하지… 그러면서. 이수정도 4·19세대 선봉이면서 전향해서 대변인까지 한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허문도가 술 사주고 자기 집까지 데려간 기억이 나네. 양주도 꺼내 주고….(웃음)” 제안은 거절했다. 서울대행은 좌절되었지만 다행히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연세대에 줄줄이 들어온 서울대 시위전력자들이 많아 한동안 “신촌 관악파”로 불리기도 했다. 학교를 옮겨 공부한 덕에 넓어진 학계 인맥은, 이후 그가 비판적 학술운동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산업사회연구회와 학술단체협의회의 핵심멤버로 한국 사회 변혁논쟁을 이끌며 왕성한 연구 성과를 냈지만 그의 학생운동 전력은 교수 임용에 여전히 큰 걸림돌이었다. 80년대 내내 강사로 전전했고 한 대학에서만 연거푸 세번 임용을 거부당한 적도 있다. -그러다 성공회대 교수로 임용된 게 언제인가? “90년이다. 내 인생의 첫째 행운은 김진균 선생님을 만나서 비판사회학회, 학술단체협의회로 진보적 학문연구의 큰 흐름을 연 것이고 둘째는 이재정 총장님을 만나 오늘날 성공회대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함께한 것, 그리고 셋째는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 참여연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 그분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역사적 우연, 그게 없었으면 불가능할 일들이었다.” 심리적 상처 피하기 위해 배운 ‘무심해지기’ 조희연이 자신의 삶을 역사적 우연성과 연관시키는 발상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몇해 전, 조희연은 아버지 조일환씨의 일대기를 드로잉 형식으로 엮은 <뜻밖의 개인사: 한 아버지의 삶>을 출간한 바 있다. 일제 치하에서 정읍농고를 졸업한 아버지는 동양척식회사와 동사무소의 말단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일제 협력자 색출로 곤경에 처했다가 그를 두둔하는 동네 주민의 증언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하고, 한국전쟁에서 인민위원회로 차출되는 바람에 치안대에 체포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74년 진안세무서를 끝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아버지는 평생 같은 일을 해 왔지만 격변의 역사, 권력의 변화에 따라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은 요동쳤다. 아버지는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하며 조용히 살고자 했지만 조희연이 유신 시대 구속되고 제적되면서 또다시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들었다. 슬하의 5남2녀 가운데서도 희연은 다섯살 때 어머니를 여읜, 안쓰러운 막내아들이었다. -어머니 얼굴을 기억하시나? “하도 어렸을 때라… 한 컷만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날 업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우시던 모습, ‘너는 어떻게 살 거냐!’ 하던 주변의 소리…. 어머니 얼굴은 벽에 걸린 사진으로만 기억한다.” 조희연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다. 어린 그에게는 생모나 다름없는 새어머니였지만, 다 자란 형님들과는 크고 작은 갈등이 적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아이는 그때부터 감정적 충돌로부터 거리를 두는 법, 무심해지는 법을 스스로 깨쳤다. 심리적 상처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어려서는 어떤 아이였나? “교회를 다녔는데 완전 에프엠(FM)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굉장히 역동적이면서 곧이곧대로 사는 모범생. 70여명 되는 중등부의 회장이었는데 아침에 내가 자전거 타고 교회 결석한 학생들 집을 일일이 돌았을 정도다. 내가 그때 고민했던 게, ‘중3인데 주일날 공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거였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해야 하는데 안식일은 지켜야 하고….(웃음)” -규범과 당위에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맞추려고 애쓰는 스타일인가? “그런 면이 있다. 기독교적 영향일 텐데, 어렸을 때 목사님들이 그러지 않나. ‘네 모든 걸 버리고 전도해라. 네가 100% 던지지 않고 100%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못 오는 거다!’ 그러니까, 귀책사유가 ‘나’한테 있는 거다. 하나님 나라가 안 오는 건 내 부족함 때문이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는 얘기다.” 보수적 기독교인으로 성장하던 그가 사회비판적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중앙고 시절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모임 ‘겨자씨’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대학 시절엔 개혁적 기독운동의 산실인 경동교회에서 다양한 진보적 청년들과 교유했다. 훗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중앙위원이 된 노동시인 박노해와 그의 처 김진주, 민주노총의 문성현 등도 당시 경동교회 청년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뽑고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99.9% 지지율로 추대되는 나라. 유신을 비판하는 것도, 그 비판을 보도하는 것도 모두 구속 대상이었다. -긴조세대는 공개 활동을 잘 안 한 세대라 그런지 대중연설 같은 데 약한 편인데, 지난번 보니 직접 단상에 나서서 연설도 하시더라. “어이쿠, 나 그거 진짜 콤플렉스다. 대중 앞에 서면 얼굴이 후끈후끈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웃음) 386세대는 공개 활동을 많이 한 광장세대라서 대중적 리더십이 있는 유명인도 많지만, 긴조세대는 입만 열면 잡혀가고 인생을 망치니 자기를 숨겨야 했던 밀실세대, 골방세대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정치적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인의 세대다.” -긴조 시대의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이 되었다. 대선 결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나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실망이 적었던 것 같다.” -과거에 비하면 오늘날의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산실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보인다. 이젠 모든 게 점수화되어서 운신의 폭이 좁다고 교수들은 말하지만, 예전엔 해직과 구속을 각오하면서 싸운 교수들도 있었다. 민교협 의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학도 기업형으로 변했다. 시이오(CEO)형 총장이 주류가 돼서, 졸업식에 가보면 어느 유수의 대학에서도 지성적 메시지가 안 나온다. 기업형 제품 생산하듯이 기업형 논문 생산을 요구받는 현실이다. 난 그래도 낙관한다. 이런 현실에 대항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나올 거라고 믿는다. 과거의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은 본질적으로 금욕적이고 지사적인, 대의를 위해 자기억압적인 운동이었다. 반대로 요즘의 새로운 운동은 유럽의 68혁명처럼 자기 욕망의 해방운동이고 자기표출적, 쾌락적이다. 자신들의 문제와 욕구를 가지고 저항하는 거다. 어떻게 세대를 넘어서 이런 저항의 정신을 전승할 것이냐가 고민이다. 과거와 형식은 다르지만 세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수년간 최장집 교수의 ‘정당중심론’에 대해 ‘사회운동중심론’을 주장하며 진보 논쟁을 이끌어오셨다. 논쟁의 요체가 무엇인가? “최장집 선생은 2008년 촛불집회 때도 ‘왜 대중의 에너지를 거리에서 소진하느냐, 국회로 공을 넘겨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비정당적인 (사회운동의) 역동성과 비판성이야말로 한국에서 좋은 정당을 만드는 동력이라고 본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난 이것을 ‘투 트랙(two-track)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원래 민주주의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양 궤도의 상호작용으로 발전한다. 정당만이 정치를 대표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열기가 정당을 통해 수렴되지 못하면 지리멸렬해진다. 촛불로 나타난 민의를 정치적으로 관철시켜 나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정치 주체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진보정당이 게토화(고립화, 주변부화)된 것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위기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진보정치는 패착을 거듭해왔다. 한국 정치가 선순환하기 위해서는 네가지 요소가 맞물려야 한다. 첫째, 진보적 대중운동이 성장하고, 둘째, 그걸 기반으로 진보정치가 약진하고, 셋째, 그 약진에 위협을 느껴서 중도개혁정당(민주당)이 자기 혁신을 하고, 넷째, 중도개혁정당의 혁신에 자극받아 보수정당(새누리당)이 건강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근데 진보정치의 실패로 그 선순환 구조가 다 깨진 거다. 진보운동만 있고 진보정치가 없다 보니 사람들이 철탑 위로 올라간다. 철탑의 투쟁을 대안의 정치로 전환시키는 역량이 없으면 민초들은 ‘벼랑끝 전술’을 쓸 수밖에 없다. 참 답답하다.” 안철수의 진보정치세력화? 100% 비현실적 -안철수 의원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그건 100%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진보정당이 붕괴하면서 대안정치에 대한 기대가 몽땅 안철수에게 간 것인데, 안철수의 객관적 위상이나 혁신의 방향으로 볼 때 안철수에게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건 전혀 비현실적이다.” -박원순 시장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진보세력이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국가개조의 프로젝트나 신뢰성 있는 정책을 내놔야 하는데, 박원순 시장은 지자체의 사회적 경제, 마을 만들기같이 대안적인 로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지만 대안적 내셔널 프로젝트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희연은 지금 지식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진보성을 확보하는 일. 특히 그는 아시아로 시민운동의 전선을 확대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국경 없는 아시아 지식인 연대’(BINA: Borderless Intellectuals Network in Asia)를 구상하는 것도 그런 연장선이다. -왜 아시아에 주목하나? “아시아는 제국주의 시절 피억압 민족으로서의 연대성이 있다. 벌써 100년 전에 안중근은 ‘동아시아 평화회의’ 만들고 ‘동아시아 군대’, ‘동아시아 화폐’ 만들자고 얘기했다. 중국이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면 중화주의가 되고 일본이 얘기하면 대동아공영권이 되지만 한국은 피억압 민족의 감수성으로 세계화 시대 공존의 논리를 선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한국 시민사회도 이제 글로벌한 의제를 품어야 한다. 반기문 봐라.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어도 특별한 게 없다. 글로벌 의제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도 이젠 타이(태국)의 국왕모독죄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삼성의 동남아 아동노동 착취에 대해서도 발언해야 한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연신 시계를 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촛불 국면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아직 임계점을 돌파 못한 것 아닌가? “그렇다. 임계점, 비등점을 통과 못한 측면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건 민주주의의 마지노선, 기본 룰에 해당하는 거다. 이걸로 결판을 낼 순 없지만 이걸 포기해선 안 된다.” 간명한 대답을 남기고 그가 다시 광장을 향해 총총히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평생 간직해온 조희연에게서 지치거나 고단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해맑은 부끄러움이 더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 녹취·진행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한겨레포커스] “특검 서명운동 벌이자”…9월14일 대규모 촛불 예고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
자기를 희생한 동료들과 달리
대학원 갔던 비겁한 나에겐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있어 진보정당이 게토화된 것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위기
진보정치가 없다 보니
사람들이 철탑 위로 올라가 8월5일 오전 11시, 국회 앞에서 이색적인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입과 손이 테이프로 칭칭 묶인 한 남자를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가 달려와 쓰러뜨리고 발로 밟았다. 사내의 검은 양복에는 “○○○을 사찰하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국가정보원 불법 선거개입 규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모인 대학교수들의 시국 패러디였다. 그들 옆에서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를 걸친 채 컴퓨터를 두드리며 댓글 공작을 연기하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성공회대 엔지오(NGO)대학원장이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의장 조희연(56) 교수. 평소 진중하고 숫기 없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만한 파격이었다. 이틀 전인 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제5차 범국민 촛불문화제의 첫 연사로 나선 그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쓰던 뿔테 안경도 벗어던지고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이 사건에는 네명의 핵심적인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원. 판. 김. 세! 같이 한번 외쳐봅시다. 원세훈, 김용판, 김무성, 권영세!” 좀처럼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는 법이 없어 서울대 김명환 교수가 “조희연 교수 화내는 모습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던 인물이, 단상에 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촛불군중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난 30여년간 <한국사회 구성체논쟁>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동원된 근대화> 등 10권 이상의 단행본을 출간하며 한국의 사회운동론을 집대성해온 이론가이자, 참여연대 초대 사무처장과 희망제작소 이사 등을 맡아 시민운동의 지평을 넓혀온 실천적 지식인 조희연. 상당수의 지식인과 재야인사들이 대선 뒤 다소 침잠한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 그는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선두에 섰다. 조희연을 이 폭염 속 시위현장으로 나서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지난 19일 아침,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최근 그는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이던 1978년, 조희연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철폐하라”는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징역 2년에 처해진 바 있다. 열관리기능사 시험 낙방으로 바뀐 운명 -35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셨는데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나 말고도 긴급조치로 감옥에 갔던 수백명이 이번 재심으로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언론에서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스스로 ‘2선 지식인’이라 생각한다. 우리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친구들 중에 그 일로 삶이 망가진 채 복원이 안 된 이들이 많은데 나는 학계로 와서 편한 길을 걸으면서 지식인 중에 조금 사회참여적이다 하는 정도인데….” 그의 누리집에 실린 자기소개글의 부제는 “빚진 심정으로 사는 어느 지식인의 삶의 이야기”. 시대에 대한 채무감과 자책감은 그의 삶을 관통한다. -왜 자신을 ‘2선’이라고 여기는가? “예전에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전위적으로 싸우는 동료들이 많이 있었다. 내겐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같은 게 있다. 70년대 말은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투신하는 물결이 거셌던 시기였는데 난 약간 비겁한 쪽이었다. ‘시대적인 흐름에 따르긴 하지만 좀더 편한 길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일반 노동자로 가지 말고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서 가야지’ 하고는 열관리기능사 자격증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기가 부족해 2차 시험에 낙방하는 바람에 다시 복학을 하게 됐다. 복학을 하니까 또 교수가 되고 싶은 꿈이 살아나는 거다. 그래서 대학원에 갔다.” 그는 노동현장 대신 대학원을 택한 이 시기의 괴로움을 “나 자신에 대한 구토”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원에 가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복학이 되어 그해 말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상부”로부터 “학생운동 전력자는 제외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이 삼청교육대며 사회정화운동으로 “사회불만세력”을 발본색원하던 공포의 시대였다. 당시 합격 취소된 시위전력자 몇몇이 멋모르고 청와대 민원실에 탄원을 넣었는데, 뜻밖에도 5공 실세이던 허문도와 이수정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던가? “신군부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거지. 그렇게만 하면 대학원이 문제냐, 이 사람들아, 유학도 보장하지… 그러면서. 이수정도 4·19세대 선봉이면서 전향해서 대변인까지 한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허문도가 술 사주고 자기 집까지 데려간 기억이 나네. 양주도 꺼내 주고….(웃음)” 제안은 거절했다. 서울대행은 좌절되었지만 다행히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연세대에 줄줄이 들어온 서울대 시위전력자들이 많아 한동안 “신촌 관악파”로 불리기도 했다. 학교를 옮겨 공부한 덕에 넓어진 학계 인맥은, 이후 그가 비판적 학술운동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산업사회연구회와 학술단체협의회의 핵심멤버로 한국 사회 변혁논쟁을 이끌며 왕성한 연구 성과를 냈지만 그의 학생운동 전력은 교수 임용에 여전히 큰 걸림돌이었다. 80년대 내내 강사로 전전했고 한 대학에서만 연거푸 세번 임용을 거부당한 적도 있다. -그러다 성공회대 교수로 임용된 게 언제인가? “90년이다. 내 인생의 첫째 행운은 김진균 선생님을 만나서 비판사회학회, 학술단체협의회로 진보적 학문연구의 큰 흐름을 연 것이고 둘째는 이재정 총장님을 만나 오늘날 성공회대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함께한 것, 그리고 셋째는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 참여연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 그분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역사적 우연, 그게 없었으면 불가능할 일들이었다.” 심리적 상처 피하기 위해 배운 ‘무심해지기’ 조희연이 자신의 삶을 역사적 우연성과 연관시키는 발상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몇해 전, 조희연은 아버지 조일환씨의 일대기를 드로잉 형식으로 엮은 <뜻밖의 개인사: 한 아버지의 삶>을 출간한 바 있다. 일제 치하에서 정읍농고를 졸업한 아버지는 동양척식회사와 동사무소의 말단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일제 협력자 색출로 곤경에 처했다가 그를 두둔하는 동네 주민의 증언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하고, 한국전쟁에서 인민위원회로 차출되는 바람에 치안대에 체포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74년 진안세무서를 끝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아버지는 평생 같은 일을 해 왔지만 격변의 역사, 권력의 변화에 따라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은 요동쳤다. 아버지는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하며 조용히 살고자 했지만 조희연이 유신 시대 구속되고 제적되면서 또다시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들었다. 슬하의 5남2녀 가운데서도 희연은 다섯살 때 어머니를 여읜, 안쓰러운 막내아들이었다. -어머니 얼굴을 기억하시나? “하도 어렸을 때라… 한 컷만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날 업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우시던 모습, ‘너는 어떻게 살 거냐!’ 하던 주변의 소리…. 어머니 얼굴은 벽에 걸린 사진으로만 기억한다.” 조희연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다. 어린 그에게는 생모나 다름없는 새어머니였지만, 다 자란 형님들과는 크고 작은 갈등이 적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아이는 그때부터 감정적 충돌로부터 거리를 두는 법, 무심해지는 법을 스스로 깨쳤다. 심리적 상처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어려서는 어떤 아이였나? “교회를 다녔는데 완전 에프엠(FM)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굉장히 역동적이면서 곧이곧대로 사는 모범생. 70여명 되는 중등부의 회장이었는데 아침에 내가 자전거 타고 교회 결석한 학생들 집을 일일이 돌았을 정도다. 내가 그때 고민했던 게, ‘중3인데 주일날 공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거였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해야 하는데 안식일은 지켜야 하고….(웃음)” -규범과 당위에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맞추려고 애쓰는 스타일인가? “그런 면이 있다. 기독교적 영향일 텐데, 어렸을 때 목사님들이 그러지 않나. ‘네 모든 걸 버리고 전도해라. 네가 100% 던지지 않고 100%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못 오는 거다!’ 그러니까, 귀책사유가 ‘나’한테 있는 거다. 하나님 나라가 안 오는 건 내 부족함 때문이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는 얘기다.” 보수적 기독교인으로 성장하던 그가 사회비판적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중앙고 시절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모임 ‘겨자씨’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대학 시절엔 개혁적 기독운동의 산실인 경동교회에서 다양한 진보적 청년들과 교유했다. 훗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중앙위원이 된 노동시인 박노해와 그의 처 김진주, 민주노총의 문성현 등도 당시 경동교회 청년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뽑고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99.9% 지지율로 추대되는 나라. 유신을 비판하는 것도, 그 비판을 보도하는 것도 모두 구속 대상이었다. -긴조세대는 공개 활동을 잘 안 한 세대라 그런지 대중연설 같은 데 약한 편인데, 지난번 보니 직접 단상에 나서서 연설도 하시더라. “어이쿠, 나 그거 진짜 콤플렉스다. 대중 앞에 서면 얼굴이 후끈후끈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웃음) 386세대는 공개 활동을 많이 한 광장세대라서 대중적 리더십이 있는 유명인도 많지만, 긴조세대는 입만 열면 잡혀가고 인생을 망치니 자기를 숨겨야 했던 밀실세대, 골방세대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정치적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인의 세대다.” -긴조 시대의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이 되었다. 대선 결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나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실망이 적었던 것 같다.” -과거에 비하면 오늘날의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산실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보인다. 이젠 모든 게 점수화되어서 운신의 폭이 좁다고 교수들은 말하지만, 예전엔 해직과 구속을 각오하면서 싸운 교수들도 있었다. 민교협 의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학도 기업형으로 변했다. 시이오(CEO)형 총장이 주류가 돼서, 졸업식에 가보면 어느 유수의 대학에서도 지성적 메시지가 안 나온다. 기업형 제품 생산하듯이 기업형 논문 생산을 요구받는 현실이다. 난 그래도 낙관한다. 이런 현실에 대항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나올 거라고 믿는다. 과거의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은 본질적으로 금욕적이고 지사적인, 대의를 위해 자기억압적인 운동이었다. 반대로 요즘의 새로운 운동은 유럽의 68혁명처럼 자기 욕망의 해방운동이고 자기표출적, 쾌락적이다. 자신들의 문제와 욕구를 가지고 저항하는 거다. 어떻게 세대를 넘어서 이런 저항의 정신을 전승할 것이냐가 고민이다. 과거와 형식은 다르지만 세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수년간 최장집 교수의 ‘정당중심론’에 대해 ‘사회운동중심론’을 주장하며 진보 논쟁을 이끌어오셨다. 논쟁의 요체가 무엇인가? “최장집 선생은 2008년 촛불집회 때도 ‘왜 대중의 에너지를 거리에서 소진하느냐, 국회로 공을 넘겨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비정당적인 (사회운동의) 역동성과 비판성이야말로 한국에서 좋은 정당을 만드는 동력이라고 본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난 이것을 ‘투 트랙(two-track)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원래 민주주의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양 궤도의 상호작용으로 발전한다. 정당만이 정치를 대표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열기가 정당을 통해 수렴되지 못하면 지리멸렬해진다. 촛불로 나타난 민의를 정치적으로 관철시켜 나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정치 주체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진보정당이 게토화(고립화, 주변부화)된 것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위기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진보정치는 패착을 거듭해왔다. 한국 정치가 선순환하기 위해서는 네가지 요소가 맞물려야 한다. 첫째, 진보적 대중운동이 성장하고, 둘째, 그걸 기반으로 진보정치가 약진하고, 셋째, 그 약진에 위협을 느껴서 중도개혁정당(민주당)이 자기 혁신을 하고, 넷째, 중도개혁정당의 혁신에 자극받아 보수정당(새누리당)이 건강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근데 진보정치의 실패로 그 선순환 구조가 다 깨진 거다. 진보운동만 있고 진보정치가 없다 보니 사람들이 철탑 위로 올라간다. 철탑의 투쟁을 대안의 정치로 전환시키는 역량이 없으면 민초들은 ‘벼랑끝 전술’을 쓸 수밖에 없다. 참 답답하다.” 안철수의 진보정치세력화? 100% 비현실적 -안철수 의원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그건 100%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진보정당이 붕괴하면서 대안정치에 대한 기대가 몽땅 안철수에게 간 것인데, 안철수의 객관적 위상이나 혁신의 방향으로 볼 때 안철수에게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건 전혀 비현실적이다.” -박원순 시장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진보세력이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국가개조의 프로젝트나 신뢰성 있는 정책을 내놔야 하는데, 박원순 시장은 지자체의 사회적 경제, 마을 만들기같이 대안적인 로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지만 대안적 내셔널 프로젝트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희연은 지금 지식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진보성을 확보하는 일. 특히 그는 아시아로 시민운동의 전선을 확대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국경 없는 아시아 지식인 연대’(BINA: Borderless Intellectuals Network in Asia)를 구상하는 것도 그런 연장선이다. -왜 아시아에 주목하나? “아시아는 제국주의 시절 피억압 민족으로서의 연대성이 있다. 벌써 100년 전에 안중근은 ‘동아시아 평화회의’ 만들고 ‘동아시아 군대’, ‘동아시아 화폐’ 만들자고 얘기했다. 중국이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면 중화주의가 되고 일본이 얘기하면 대동아공영권이 되지만 한국은 피억압 민족의 감수성으로 세계화 시대 공존의 논리를 선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한국 시민사회도 이제 글로벌한 의제를 품어야 한다. 반기문 봐라.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어도 특별한 게 없다. 글로벌 의제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도 이젠 타이(태국)의 국왕모독죄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삼성의 동남아 아동노동 착취에 대해서도 발언해야 한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연신 시계를 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촛불 국면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아직 임계점을 돌파 못한 것 아닌가? “그렇다. 임계점, 비등점을 통과 못한 측면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건 민주주의의 마지노선, 기본 룰에 해당하는 거다. 이걸로 결판을 낼 순 없지만 이걸 포기해선 안 된다.” 간명한 대답을 남기고 그가 다시 광장을 향해 총총히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평생 간직해온 조희연에게서 지치거나 고단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해맑은 부끄러움이 더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 녹취·진행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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