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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노총각 선배 조심하라던 부장 말을 들어야 했어

등록 2013-08-30 19:45수정 2013-08-31 16:58

[토요판/연애] 비밀 사내연애
▶ 대학 때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동아리 내 연애는 ‘근친상간’이니 절대 하지 말라고. 동아리 활동이 연애 감정에 따라 휘둘리는 걸 경계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지혜’였던 거죠. 그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 ‘사내 연애는 절대 하지 말자’고 입사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청춘남녀가 모인 공간에서 연애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까요.

상상했다. 우리 사이를 공개했을 때 회사 사람들의 반응을.

팀장님은 “요 앙큼한 것들. 뒤로 호박씨 까다니ㅋㅋ” 슬몃 눈을 흘길 것이고, 팀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어머 어머 어머, 둘이? 진짜? 어떻게?” 다다다 질문을 쏟아낼 것이며, 동료보다 친구에 가까운 이들은 “이제까지 솔로인 척하더니…” 배신감을 토로할 것이다. 그럼 나는 자못 부끄러운 듯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그렇게 됐어요. 말 못해서 미안해요.” 몸을 배배 꼬는 그런 모습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사보에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네’ 하며 연애사를 쭉 늘어놓아야지, 했었다.

한데 상상은 현실로 치환되지 못했다. 상상으로 끝나버리고야 말았다. ‘축의금 나눠먹기’ 같은 걱정은 인터넷 끊긴 스마트폰만큼 무의미한 것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게 감정을 키웠고, 회사 시시티브이에 찍힐세라 조심히 만났고, 그리고 이별했다. 헤어지던 날 앉아 울던 회사 화장실 변기만이 우리가 연인이었다는 증거다. 바람처럼 만나고 이슬처럼 헤어진 우리는 사내커플이‘었’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더라면 사내연애는 절대, 혼자 늙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말자던 입사 전 결심을 지켰어야 했다. 노총각 선배들을 조심하라던 부장님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그가 자꾸 내 쪽을 흘깃거린다는 ㅊ언니의 말을 무시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출근하는 게 이렇게 지옥 같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 사방이 송곳으로 둘러싸인 사각 틀 속에서 살고 있다. 하루 절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애써 밝은 척 연기해야 한다. 그에게 힘든 내색을 들키는 건 자존심 상하니까.

몇달 동안은 좋았다. 우선 스릴 있었다. 복도를 마주하고 지나갈 때 살짝 스치는 손끝이 섹시했다. 그가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우리 둘만 아는 눈짓을 보낼 땐 뛰어가 안길 뻔했다. 업무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나온 ‘연인 톤 목소리’를 서둘러 거둬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매일 얼굴 볼 수 있었다. 회사에선 대화 한마디, 차 한잔, 밥 한끼 함께 하지 않았지만 그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시간차 퇴근’ 뒤 지하철 한두 정거장 앞서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애틋했다. 안정 거리에 접어들어서야만 맘껏 잡을 수 있는 손은 더 보드라운 듯했다. 야근·휴일 근무가 잦은 터라 상대의 희생과 배려를 먹고 연애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직업 특성상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커플이었다.

각자 결혼했으면 초등학생 애가 있을 정도로 오래전 헤어진 선배 커플들의 얘기가 아직도 술자리 안줏거리로 씹히는 걸 볼 때면 ‘우리는 헤어지지 말아야지’ 결심하는 한편,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비밀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내연애가 특별히 더 조심스러운 건 아니라고 했지만, 여자인 나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내연애 뒤 헤어진 여성을 흡사 이혼녀처럼 대하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던 건 ‘당신과 결혼할 진지한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복도를 마주하고 지날 때
스치는 손끝은 섹시했고
모니터 너머 눈짓 보낼 땐
뛰어가 안길 뻔했다
몇 달간은 스릴감 넘쳤다

하지만 그의 뒷담화 듣고도
가만있으려니 속이 터졌다
여자 후배는 대놓고 꼬리치고
싸운 다음날에도 시시덕대는
그를 볼 때면 울화 치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노출해야 했다. 할 말은 하는 그를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뒤에서 씨근덕거렸다. 나는 백번 그의 편이었지만 대놓고 편들자니 수상하게 볼 것 같고, 가만있자니 속이 터졌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선배랑 다퉜다며?’ ‘아까 걔랑은 왜 그런 거야?’ 등등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애인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알려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을 줄 수 없었다. 자꾸 들리는 뒷말이 괴로워 그에게 ‘상대를 이해해보자’고 말했더니 되레 서운해했다. 중간에서 난처해졌다. 우리의 대화에서 회사 문제는 다신 거론되지 않았다. 함께여서 느꼈던 행복이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둘 다 솔로인 척하다 보니 자꾸 소개팅이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을 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후배는 내 앞에서 대놓고 그에게 꼬리를 쳤다. 전날 싸운 탓에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했는데 나와의 다툼은 자신한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듯 시시덕대는 그를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못 볼 꼴이었다. 다른 회사에 다녔다면 일하는 시간만이라도 그와의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안 보이는 동안만은 나도 웃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를 향한 분노가 여자 후배한테 전이되고 있었다. 입안에서 “나쁜년놈” 단어가 맴돌았다. 생각과 다르게 자꾸 그 후배 일처리에 트집을 잡게 됐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건 회사 체육대회 때였다. 계주 주자였던 내가 달리던 도중 넘어졌다. 그도 보고 있던 중이라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먼저였다. 최대한 괜찮은 척했지만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 떠보니 병원, 주변에 회사 선배들의 걱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없었다. 다른 팀인 그가 병실에 있는 것 자체가 그와 내가 ‘수상한 관계’임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정을 이해 못할 건 아니었지만 내가 아픈 와중에도 우리 연애를 공개할 수 없다는 약속을 우선시한 이성적인 그가 어찌나 고마운지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헤어졌다.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요새 예뻐졌다며 연애하냐고 묻는다. 밥을 못 먹어서 살이 빠졌고, 보란 듯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려고 화장하고 꾸민 탓이다. 출근 전 거울 보는 횟수가 소개팅 나갈 때보다 많다.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옛 애인과 마주치는 건 죽기보다 끔찍한 일이다. 그가 소개팅녀와 잘돼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귀가 2000배 이상 커지는 것 같다. 마치 내 귀는 그 이름에만 반응하는 것 같다. 사보에 그가 결혼합네 하면서 올린 사진을 볼 걸 생각하니 열불이 치민다.

CC크림의 CC만 봐도 치가 떨리는 30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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