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커 진보진영에서 ‘폐기 1순위’로 꼽히지만, 이석기 의원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를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속내는 복잡하다. 이 의원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지난 4일 통합진보당원들이 국회 의원회관에 몰려와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토요판] 뉴스분석 왜?
<2> 연구자가 본 ‘이석기 사태’
<2> 연구자가 본 ‘이석기 사태’
▶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 의혹은 진보진영에서도 뜨거운 감자입니다. 국가정보원이 ‘수상한 수사’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도, 진보진영이 이 의원을 선뜻 편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의원은 뭔가 억울하다고 얘기하는데 이들의 언어는 어딘가 낯설고 딴 세상 이야기 같습니다. 왜 이럴까요. 편견은 ‘이해의 빈곤’에서 발생합니다. 이 의원과 통합진보당 당원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경기동부연합을 연구한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사랑과 의리로 뭉친 통합진보당을 막을 자 없다. (…) 저들은 역사의 반대방향으로 가고 우린 역사의 정방향으로 간다.”
지난 4일 이석기 의원은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직전 당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혈연공동체가 아닌 정당이 정치적 신념과 이해 대신 ‘사랑과 의리’를 강조했다. 모두가 진보당의 사상적 낙후성과 운동의 퇴행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거꾸로 자신들만이 앞으로 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할까? 6명의 국회의원이 속한 이 정당의 생각과 행동과 언어를, 많은 사람들은 궁금히 여긴다. 나는 진보당의 핵심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의 형성 과정을 집단기억의 측면에서 문화적으로 접근하여 해답을 찾아보았다. 집단기억이 실체화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가 갖는 역사적 변화와 정치세력의 성장을 상호관계에서 파악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차별과 배제에 대한 기억, 그리고 공포는 경기동부연합을 이해하는 열쇳말이 되었다.
분당·판교 개발로 또다른 차별과 배제
경기동부연합의 지역 거점은 경기도 성남시로 알려져 있다. 1968년 이후 ‘광주대단지’로 불린 그곳은 ‘선입주 후건설’이라는 도시계획 아래 나무만 베어낸 산기슭에 20평씩 금을 그어 서울의 철거민들을 트럭으로 실어 ‘갖다버린’ 주택단지였다.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화로 농촌 인구는 도시로 몰렸고 다수는 호남 사람이었다. 무허가 판잣집에 거주하던 그들은 서울시민의 안녕과 도시 미관을 위해 서울 외곽의 정착촌으로 쫓겨나야 했고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열악한 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에 자리잡은 광주대단지였다.
350만평의 정착촌에는 일자리는 물론 도시기반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 서울 을지로까지는 왕복 5시간에 차비도 비쌌고 그나마 교통편도 많지 않아 걸어서 일하러 나갔다가 다음날 돌아오기도 했다. 초등학교는 취학연령 아동의 8%만을 수용할 수 있었고 중학교는 2개, 고등학교는 아예 없어서 아이들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농촌, 호남, 도시빈민, 3중의 차별과 배제가 한데로 모인 곳이 바로 광주대단지였다.
1971년 8월10일 광주대단지에 ‘폭동’ 또는 ‘난동’이라 불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전설 같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산모가 갓난아이를 삶아 먹었다!”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간간이 배부되었고 허기진 아이들은 칡뿌리와 소나무 속껍질로 배를 채웠다. 대단지 주민들이 굶주림과 가난에 대해 가졌던 공포는 8·10 광주대단지 사건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고, 주민들이 가졌던 공포는 외부인들의 대단지에 대한 공포로 전이되었다. 사건 뒤 대단지 주민들은 산모가 갓난아이를 삶아 먹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80년대 학번 ‘광주대단지 키드’
성남을 민주화운동 거점 삼아
국회에 교두보도 마련했지만
고착된 기억과 억압·강제는
고립과 피해의식을 강화시켰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으리라
그러나 억울하단 항변 이전에
의연함이 필요하진 않았을까
‘당원 눈높이’ 들이대기 전에
국민들 집단지성 돌아봤어야 사건은 박정희 정권 최초·최대의 시위였지만 모든 요구를 들어준다는 얘기에 단 6시간 만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일거리, 놀거리가 없어 집에 있던 주민들이 전부 나가 최대 6만명이 참여했지만 피해 물량은 고작 차량 4대(3대는 나중에 수리해서 썼다), 돌에 맞은 이는 전치 2~3주의 골절상 정도가 전부여서 폭동이란 이름이 궁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건 뒤 대단지는 공권력에 의한 상시감시 체제가 강화되었고, 1973년 성남시로 승격하고 나서도 1990년대까지 여전히 폭동·난동의 도시로 남게 되었다. 광주대단지 시절 20평으로 분할해 놓은 필지로 인해 이후 수십년 동안 저소득층에 한정된 전입·전출이 이어지면서 도시 전체가 ‘못사는 동네’, ‘우범지역’으로 낙인찍혔다. 이력서에 주소를 성남시로 적으면 취직이 되지 않았고, 가난한 동네, 가난하기 때문에 범죄가 많은 동네, 무서워서 가지 않고 기피하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분당과 판교가 개발되면서 또 다른 차별과 배제가 생겼다. 분당 사람들은 입주 초기부터 분리운동을 벌였고, 자녀를 구시가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며 항의하였다. 성남시 산다고 하면 구시가냐 신시가냐 하는 질문이 이어지고 이전에 강남으로 파출부 갔던 사람들은 분당 아파트로 일하러 가게 되었다. 오수관·우수관이 분리되지 않은 구시가는 여름이면 하수구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1997년 150억원 들여 준공한 분당의 하수종말처리장은 주민반대운동으로 가동도 못 해본 채 2011년 고철로 뜯어 1억3천만원에 매각했다. 1980년 5월 전라도 광주의 기억은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지만 1971년 8·10 사건의 기억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1971년 사건을 목격하고 1970, 80년대 성남시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겪고 자라난 ‘광주대단지 키드’의 일부를 통해 기억이 전승되었다. 1980년대 학번인 그들은 호남 출신이 다수인 성남시 주민들에게 5월 광주의 학살 소식을 전했고,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인근 용성총련(용인성남지역총학생회연합) 대학생들까지 결합하면서 성남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지역 거점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전국연합 상층부와 하층부가 각각 민주당과 시민운동으로 대거 흡수되면서 남은 이들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기율과 공동체적 생활은 마치 묵가(墨家: 중국 전국시대 초기에 유가와 대립한 학파로 강력한 단결을 특징으로 했음) 집단과도 같았다. ‘보도연맹 발언’으로 독단적 현실인식 자백 1990년대 말 북한동포돕기운동 때에는 공고화된 조직을 기반으로 3개월 동안 1만5000가구를 방문해 5500가구로부터 220가마의 쌀을 모았다. 헌신적 활동은 향후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로 이어져 16대 총선에서는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정형주 국회의원 후보가 지역구(성남 중원)에서 20%대(21.5%)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위기와 일련의 이적단체 사건은 고립을 강요했고 조직 보전을 위해서라도 교조화·지하화할 수밖에 없었다. 고착된 기억과 조직의 고립은 운동의 퇴행을 낳았고 국가보안법에 의한 억압과 강제는 피해의식을 강화시켰다. 스스로를 차별과 배제의 희생양으로 규정한 결과는 지난해 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사태에서의 단상 점거로 나타났다. 당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약자로 규정하였고, 역설적이게도 단상 점거는 배제에 대한 두려움과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자기 아닌 나머지 모두를 적으로 규정한 상황에서 그들이 느낀 것은 완전 소멸할 수도 있다는 공포였고, 공포에 대한 대응은 인도 농민봉기 연구자들이 하위주체(서발턴)의 속성으로 규정했던 부정성, 연대성, 지역성, 폭력성으로 나타났다. 중앙위원회 직후 분열된 진보당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대선 전후에는 사멸할 것이라 예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올봄까지 당내 활동에 주력했던 진보당은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집회를 계기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촛불집회는 그들의 동원력을 필요로 했고 강고한 조직력과 민주당에 비해 선명한 구호로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청광장은 한때 ‘괴물’이라 불렀던 그들을 환영했고 과거 엔엘(NL) 출신 운동권은 박수를 보냈다. 비례대표 사태 때 부정된 것은 경기동부뿐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의 자주·민주·통일의 운동사였기 때문이다. 진보당 하나 죽임으로써 촛불을 꺼뜨릴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다. 국가정보원은 어설프지만 충격적인 증거물을 들이대며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죄로 몰아갔고 진보당은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은 한발 뒤로 물러섰고 그들을 돕는 세력은 없었다. 종북은 국가권력과 수구세력이 그들을 내란음모집단으로 모는 구실이 되었고, 지난날의 패권적 행태는 위기에 빠진 과거의 동지를 구하러 가는 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비례대표 경선사태에 이어 또 한번 배제되고 말았다. 비례대표 사태에서 부정선거가 아니라 (선거관리) 부실에 불과하다 한 것처럼, 그들은 이번에도 억울하다고 했다. 내란음모 혐의로 압수수색이 진행되던 날, 색깔론의 공안탄압에 허위날조의 마녀사냥으로 맞섰고(8월28일), 한국전쟁 전후 예비검속과 20만명이 살해된 보도연맹 사건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의 발로라고도 했다(8월30일). 녹취록이 공개되고 나니 이석기 의원의 입이 아니라 분반토론에서 나온 농담이라 했고(9월5일),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들며 민주주의를 지키자고도 호소했다(9월10일자 브리핑). 그들은 세련되게 변명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변호하는 기자회견에서 답변을 요구받지도 않은 보도연맹 사건을 들어 배경 설명을 하였다. 보도연맹 발언은 독단적 현실인식을 나서서 자백한 격이었고 국민들은 오히려 더 큰 위험성을 느꼈다. 오랜 교조화·지하화의 시간은 그들을 외부의 가치와 시선에 눈 닫게 만들었다. 득이 될 말과 실이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지난 5월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감지되면서 일부 사재기 현상이 있기는 했으나 보도연맹 사건을 상기할 정도의 구체적인 위기감을 느낀 사람은 드물었다. 그들은 억울하다는 항변 대신 대의를 위한 희생이 사즉생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농담도 못 하는 사회냐고 항변하는 대신, 농담이었어도 공당으로서 잘못된 처신임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살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촛불과 자신들의 투쟁을 분리해 내면서 촛불을 살리고자 했다면 거꾸로 시민들의 격려와 성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제의 경험은 세상이 그들을 다시 불러줄 것이라는 믿음을 방해하였다. 한번 그룹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고립감이 있다. 그들에게 배제의 공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당당한 주장 대신 변명과 말바꾸기로 일관하면서 ‘날조’ 주장은 ‘농담’ 발언으로 뒤집었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지만 표현하려는 사상은 밝히지 않는다. 정치와 운동 사이의 위태로운 길을 걷는 데 따른 딜레마이자 통일전선전술의 함정 때문이다. 운동가적 신념의 표출은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통일전선전술로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속살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목표는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한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당신의 사상으로 인해 탄압받는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말이 돌고 있다. 다른 편에서는 이를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상의 자유를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의 사상을 말하고는 있다.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알아들을 수 없을 뿐이다. ‘종북’은 ‘연북’이라 하고, ‘주사파’는 없고 자주·민주·통일 운동만이 있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은 ‘종북’의 꼬리표가 달린 사람들에게 사회적 생사여탈권을 쥔 저승사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는 꼬리표를 감춘 채 침묵하거나 다른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진보개혁진영의 딜레마…촛불을 주목하자 나치가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잡아갈 때 외면했기에 나를 위해 항의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시가 인용되고도 있다. 실체적 위험성이 없는 발언에 내란음모의 죄명이 붙고 이석기 의원이 깡패처럼 잡혀갈 때 분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는 항변 이전에 떳떳이 조사받겠다는 의연함이 필요했다. 마녀사냥이라며 여론을 등에 업으려 하는 대신 공당으로서의 성숙함과 책임감을 보이는 모습을 대중은 원했다. 그들은 공당이면서도 여론에는 귀를 닫은 것처럼 보인다. 실체가 아닌 공포감에 사로잡혀 자기 보전을 걱정하는 대신 진보개혁 진영에서조차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은 궁리해보았어야 한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사상의 낙후성 때문이 아니다. 패권주의와 비민주성, 조직문화의 폐쇄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국민의 눈높이’를 얘기할 때 ‘당원들의 눈높이’를 들이대며 억울하다 할 때, 그 국민들이 집단지성의 담지자라는 것도 돌아보았어야 했다. 이석기 의원 제명안과 ‘이석기 방지법’을 앞에 놓고 진보개혁 진영은 딜레마에 빠졌다. 새누리당과 보수 세력의 의도에 동의해줄 수는 없지만 자성과 사과 없이 억울하다는 항변만 계속하는 진보당을 지원해주기도 곤란하다는 여론이 많다. 주목해야 할 것은 촛불이다. 다소 수그러들기는 했으나 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 심판 의지는 촛불을 통해 계속 타오르고 있다. 진보당은 싫지만, 아니 진보당이 싫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로 인해 촛불이 꺼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시민들이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가세하고 있다. 국민들은 종북 콤플렉스에 갇혀 국정원이 만든 판을 키워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성남을 민주화운동 거점 삼아
국회에 교두보도 마련했지만
고착된 기억과 억압·강제는
고립과 피해의식을 강화시켰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으리라
그러나 억울하단 항변 이전에
의연함이 필요하진 않았을까
‘당원 눈높이’ 들이대기 전에
국민들 집단지성 돌아봤어야 사건은 박정희 정권 최초·최대의 시위였지만 모든 요구를 들어준다는 얘기에 단 6시간 만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일거리, 놀거리가 없어 집에 있던 주민들이 전부 나가 최대 6만명이 참여했지만 피해 물량은 고작 차량 4대(3대는 나중에 수리해서 썼다), 돌에 맞은 이는 전치 2~3주의 골절상 정도가 전부여서 폭동이란 이름이 궁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건 뒤 대단지는 공권력에 의한 상시감시 체제가 강화되었고, 1973년 성남시로 승격하고 나서도 1990년대까지 여전히 폭동·난동의 도시로 남게 되었다. 광주대단지 시절 20평으로 분할해 놓은 필지로 인해 이후 수십년 동안 저소득층에 한정된 전입·전출이 이어지면서 도시 전체가 ‘못사는 동네’, ‘우범지역’으로 낙인찍혔다. 이력서에 주소를 성남시로 적으면 취직이 되지 않았고, 가난한 동네, 가난하기 때문에 범죄가 많은 동네, 무서워서 가지 않고 기피하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분당과 판교가 개발되면서 또 다른 차별과 배제가 생겼다. 분당 사람들은 입주 초기부터 분리운동을 벌였고, 자녀를 구시가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며 항의하였다. 성남시 산다고 하면 구시가냐 신시가냐 하는 질문이 이어지고 이전에 강남으로 파출부 갔던 사람들은 분당 아파트로 일하러 가게 되었다. 오수관·우수관이 분리되지 않은 구시가는 여름이면 하수구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1997년 150억원 들여 준공한 분당의 하수종말처리장은 주민반대운동으로 가동도 못 해본 채 2011년 고철로 뜯어 1억3천만원에 매각했다. 1980년 5월 전라도 광주의 기억은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지만 1971년 8·10 사건의 기억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1971년 사건을 목격하고 1970, 80년대 성남시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겪고 자라난 ‘광주대단지 키드’의 일부를 통해 기억이 전승되었다. 1980년대 학번인 그들은 호남 출신이 다수인 성남시 주민들에게 5월 광주의 학살 소식을 전했고,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인근 용성총련(용인성남지역총학생회연합) 대학생들까지 결합하면서 성남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지역 거점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전국연합 상층부와 하층부가 각각 민주당과 시민운동으로 대거 흡수되면서 남은 이들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기율과 공동체적 생활은 마치 묵가(墨家: 중국 전국시대 초기에 유가와 대립한 학파로 강력한 단결을 특징으로 했음) 집단과도 같았다. ‘보도연맹 발언’으로 독단적 현실인식 자백 1990년대 말 북한동포돕기운동 때에는 공고화된 조직을 기반으로 3개월 동안 1만5000가구를 방문해 5500가구로부터 220가마의 쌀을 모았다. 헌신적 활동은 향후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로 이어져 16대 총선에서는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정형주 국회의원 후보가 지역구(성남 중원)에서 20%대(21.5%)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위기와 일련의 이적단체 사건은 고립을 강요했고 조직 보전을 위해서라도 교조화·지하화할 수밖에 없었다. 고착된 기억과 조직의 고립은 운동의 퇴행을 낳았고 국가보안법에 의한 억압과 강제는 피해의식을 강화시켰다. 스스로를 차별과 배제의 희생양으로 규정한 결과는 지난해 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사태에서의 단상 점거로 나타났다. 당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약자로 규정하였고, 역설적이게도 단상 점거는 배제에 대한 두려움과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자기 아닌 나머지 모두를 적으로 규정한 상황에서 그들이 느낀 것은 완전 소멸할 수도 있다는 공포였고, 공포에 대한 대응은 인도 농민봉기 연구자들이 하위주체(서발턴)의 속성으로 규정했던 부정성, 연대성, 지역성, 폭력성으로 나타났다. 중앙위원회 직후 분열된 진보당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대선 전후에는 사멸할 것이라 예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올봄까지 당내 활동에 주력했던 진보당은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집회를 계기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촛불집회는 그들의 동원력을 필요로 했고 강고한 조직력과 민주당에 비해 선명한 구호로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청광장은 한때 ‘괴물’이라 불렀던 그들을 환영했고 과거 엔엘(NL) 출신 운동권은 박수를 보냈다. 비례대표 사태 때 부정된 것은 경기동부뿐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의 자주·민주·통일의 운동사였기 때문이다. 진보당 하나 죽임으로써 촛불을 꺼뜨릴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다. 국가정보원은 어설프지만 충격적인 증거물을 들이대며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죄로 몰아갔고 진보당은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은 한발 뒤로 물러섰고 그들을 돕는 세력은 없었다. 종북은 국가권력과 수구세력이 그들을 내란음모집단으로 모는 구실이 되었고, 지난날의 패권적 행태는 위기에 빠진 과거의 동지를 구하러 가는 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비례대표 경선사태에 이어 또 한번 배제되고 말았다. 비례대표 사태에서 부정선거가 아니라 (선거관리) 부실에 불과하다 한 것처럼, 그들은 이번에도 억울하다고 했다. 내란음모 혐의로 압수수색이 진행되던 날, 색깔론의 공안탄압에 허위날조의 마녀사냥으로 맞섰고(8월28일), 한국전쟁 전후 예비검속과 20만명이 살해된 보도연맹 사건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의 발로라고도 했다(8월30일). 녹취록이 공개되고 나니 이석기 의원의 입이 아니라 분반토론에서 나온 농담이라 했고(9월5일),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들며 민주주의를 지키자고도 호소했다(9월10일자 브리핑). 그들은 세련되게 변명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변호하는 기자회견에서 답변을 요구받지도 않은 보도연맹 사건을 들어 배경 설명을 하였다. 보도연맹 발언은 독단적 현실인식을 나서서 자백한 격이었고 국민들은 오히려 더 큰 위험성을 느꼈다. 오랜 교조화·지하화의 시간은 그들을 외부의 가치와 시선에 눈 닫게 만들었다. 득이 될 말과 실이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지난 5월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감지되면서 일부 사재기 현상이 있기는 했으나 보도연맹 사건을 상기할 정도의 구체적인 위기감을 느낀 사람은 드물었다. 그들은 억울하다는 항변 대신 대의를 위한 희생이 사즉생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농담도 못 하는 사회냐고 항변하는 대신, 농담이었어도 공당으로서 잘못된 처신임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살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촛불과 자신들의 투쟁을 분리해 내면서 촛불을 살리고자 했다면 거꾸로 시민들의 격려와 성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제의 경험은 세상이 그들을 다시 불러줄 것이라는 믿음을 방해하였다. 한번 그룹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고립감이 있다. 그들에게 배제의 공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당당한 주장 대신 변명과 말바꾸기로 일관하면서 ‘날조’ 주장은 ‘농담’ 발언으로 뒤집었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지만 표현하려는 사상은 밝히지 않는다. 정치와 운동 사이의 위태로운 길을 걷는 데 따른 딜레마이자 통일전선전술의 함정 때문이다. 운동가적 신념의 표출은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통일전선전술로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속살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목표는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한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당신의 사상으로 인해 탄압받는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말이 돌고 있다. 다른 편에서는 이를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상의 자유를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의 사상을 말하고는 있다.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알아들을 수 없을 뿐이다. ‘종북’은 ‘연북’이라 하고, ‘주사파’는 없고 자주·민주·통일 운동만이 있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은 ‘종북’의 꼬리표가 달린 사람들에게 사회적 생사여탈권을 쥔 저승사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는 꼬리표를 감춘 채 침묵하거나 다른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진보개혁진영의 딜레마…촛불을 주목하자 나치가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잡아갈 때 외면했기에 나를 위해 항의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시가 인용되고도 있다. 실체적 위험성이 없는 발언에 내란음모의 죄명이 붙고 이석기 의원이 깡패처럼 잡혀갈 때 분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는 항변 이전에 떳떳이 조사받겠다는 의연함이 필요했다. 마녀사냥이라며 여론을 등에 업으려 하는 대신 공당으로서의 성숙함과 책임감을 보이는 모습을 대중은 원했다. 그들은 공당이면서도 여론에는 귀를 닫은 것처럼 보인다. 실체가 아닌 공포감에 사로잡혀 자기 보전을 걱정하는 대신 진보개혁 진영에서조차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은 궁리해보았어야 한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사상의 낙후성 때문이 아니다. 패권주의와 비민주성, 조직문화의 폐쇄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국민의 눈높이’를 얘기할 때 ‘당원들의 눈높이’를 들이대며 억울하다 할 때, 그 국민들이 집단지성의 담지자라는 것도 돌아보았어야 했다. 이석기 의원 제명안과 ‘이석기 방지법’을 앞에 놓고 진보개혁 진영은 딜레마에 빠졌다. 새누리당과 보수 세력의 의도에 동의해줄 수는 없지만 자성과 사과 없이 억울하다는 항변만 계속하는 진보당을 지원해주기도 곤란하다는 여론이 많다. 주목해야 할 것은 촛불이다. 다소 수그러들기는 했으나 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 심판 의지는 촛불을 통해 계속 타오르고 있다. 진보당은 싫지만, 아니 진보당이 싫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로 인해 촛불이 꺼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시민들이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가세하고 있다. 국민들은 종북 콤플렉스에 갇혀 국정원이 만든 판을 키워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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