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3대째 만에 모국 왔지만, 염색공장에서 3년 일하다 폐결핵으로…

등록 2013-09-15 20:12수정 2013-09-16 17:36

지난 8월15일 경기도 안산산재병원에 마련된 고려인 김발로자씨의 빈소. 김씨는 2010년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하다 올해 숨졌다. 김씨의 빈소를 메운 이들 가운데 고인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 8월15일 경기도 안산산재병원에 마련된 고려인 김발로자씨의 빈소. 김씨는 2010년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하다 올해 숨졌다. 김씨의 빈소를 메운 이들 가운데 고인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글 싣는 순서
② 국경없는 가난 ③ 나라없는 민족

먼 길을 돌아, 옛 소련 지역의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이 돌아오고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가난과 망국의 현실을 피해 국경을 넘었던 이들의 자손들이, 또다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귀환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공식 집계만 3만여명에 이르는 국내 거주 고려인들은, 앞서 한국에 정착한 중국동포들보다 열악한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한겨레>는 지난 8월부터 한달 간 고려인 노동자 3000여명이 모여사는 경기 안산 선부동의 땟골에서 고려인 30여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가깝고도 낯선 동포 ‘재한 고려인’의 삶을 3차례로 나눠 살펴본다.

카레이스키 김발로자씨의 죽음

지난 3월, 김발로자(55)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점점 희미해지는 공장 기숙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동료들이 발견했을 때 김씨는 정신을 놓은 뒤였다. 결핵균이 폐 깊숙이 파고 들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지난 8월15일 김씨의 장례식장은 낯선 얼굴들이 채웠다. 경기도 안산산재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메운 스무명 남짓한 이들 가운데 고인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대부분이 지역의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정치인이었다. 남은 이들은 두런두런, 어떻게 이처럼 외로운 죽음을 막을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굳은 분위기 속에 몇몇은 슬퍼보였다. 고려인들이었다. 생전 김씨를 알지 못했으나 안산에서 같은 처지의 고려인이 비명에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은 이들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김블라디미르(50)씨는 새벽부터 준비한 고려인 음식을 들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데친 부추나물을 맵게 무친 ‘염지채’와, 찹쌀가루로 부친 ‘지름구비’, 삶은 달걀 몇 판을 준비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청년 류안드레이(28)씨는 조시를 낭독했다. “백두산 말기에 먹지 못해 먼 북쪽으로 쫓겨난 할아버지 손자 난, 조선사람이다. 구르지아(그루지야)의 나나보다도, 까자크(카자흐스탄)의 아빠보다도, 러시아의 마마보다도 조선의 어머니가 내 심장에 깊더라. 난 조선사람이다. 난 고려인이다.” 고려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김준의 시다. 한평생 유라시아를 떠돈 고려인 김발로자씨의 영정을 뒤에 두고 젊은 고려인 청년은 고개를 떨궜다.

김발로자씨는 2010년 한국에 왔다. 3대의 가난을 아들에게만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할아버지는 가난에 쫓겨 두만강 너머 러시아로 갔다. 영원할 것 같던 소련이 무너진 뒤 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밀려났다. 유랑은 100년이 넘도록 고려인 가족의 숙명이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난 대물림 않겠다” 한국 왔지만
밤낮없이 일해 번 돈은 최저임금
“너무 아파 그만두겠다” 말하더니
끝내 쓰러져 유골만 가족 품으로

통계상 국내 체류 고려인 3만명
대다수가 저임금·3D직종서 일해

할아버지의 나라는 김씨에게 방문취업(H2) 비자를 내줬다. 중국동포들과 고려인들을 위한 비자였다. 먼저 한국에 간 사람들은 타슈켄트에서보다 몇 배나 큰 돈을 번다고 들었다. 곧 대학에 갈 아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알음알음 소개로 경기도 안산 시화공단의 가죽염색 공장에 들어갔다. 자고 일하고, 자고 일하는 기숙사 생활이 이어졌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은 끝나지 않았다. 고려인들에겐 당연한 고정급인 4860원의 시급을, 한국인들은 ‘최저임금’이라고 불렀다. 한국말이 서툰 김씨는 ‘최저임금’이 한국인 사장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적은 돈이라는 것을 눈치로 알았다.

화학 염료로 가득 찬 공단의 악취는 지독했다. 오래 전 앓았던 폐결핵이 도진 것은 이듬해인 2011년 가을 무렵이었다. 병원 진료엔 큰 비용이 들 터, ‘아들에게 돈을 조금 더 보내는 게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차일피일 시간이 흘렀다. “많이 아파서 일 못하겠어요. 타슈켄트로 돌아가야겠어요.” 김씨는 올 들어 자주 공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3월 병원에 실려온 뒤 김씨는 일주일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의식이 오가는 가운데 정신이 들면 고려인 간호사에게 말했다. “죽으면 유골이라도 부모님 곁으로 보내줘요.” 6월9일 저녁 그는 타슈켄트의 가족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는 고려인들은, 2007년 3월 재중동포와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방문취업제’가 실시된 뒤 급격히 늘고 있다. 현재 공식 통계로만 3만여명의 고려인이 국내 체류중이다. 이 가운데 5000여명이 경기도 안산의 공단 지역에 마을을 이뤘다. 러시아 연해주 땅에 최초의 고려인 마을이 건설된 지 150년 만이다.

3대에 걸쳐 먼길을 돌아 한국에 온 김씨에겐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병원에서 그를 돌본 고려인 의료 코디네이터 김엘레나(23)씨만이 김씨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많이 외로워했지만 아들 때문에 견뎠어요. 아들을 한국에서 공부시키고 싶어 했죠.”

8월15일 김발로자씨의 유골은 낯 모르는 고려인 동포의 손에 들려 다시 국경을 건넜다.

안산/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