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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려인촌 바뀐 ‘땟골’…가게 진열 보드카만이 ‘검은 노동’ 위로

등록 2013-09-15 20:16수정 2013-09-15 22:30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땟골삼거리 인근 미용실을 찾은 한 고려인이 머리를 깎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땟골삼거리 인근 미용실을 찾은 한 고려인이 머리를 깎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카레이스키, 눈물 짓는 ‘코리안 드림’] 안산 선부동 ‘고려인 쪽방촌’

10년새 3000명 몰려 밀집 거주
곳곳엔 방 쪼개는 개축공사
한국말 서툰 고려인들에게
슈퍼마켓은 고충 상담소

달무리 져야 마을엔 인기척
한국생활 9년 박세르게이씨
러시아 가족과 함께 살 희망에
오늘도 마비된 다리 이끌고 귀가
* 검은 노동 : 3D 업종 러시아식 표현

경기도 안산은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땅이다. 저임금 노동에 의지한 군소 제조업체들이 공단을 형성하고 그 주변에 모여든 이주노동자들이 쪽방과 고시원에서 공동체를 이뤘다. 그 중심에 ‘지구촌마을’로 알려진 원곡동이 있다. 밤낮없이 다국적 노동자들로 번잡한 원곡동에서 좀더 외곽으로 발길을 돌리면 선부동 땟골삼거리에 이른다. 벼과에 속하는 풀인 띠가 많아 띠골이라 불리다 땟골이 된 이곳은 영동고속도로를 접하고 있어 공단들과 더욱 가깝다.

지난달 19일 낮, 땟골 골목길에는 아이들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방학을 맞아 부모를 만나러 온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소년들은 어린 동생을 안고 고려인 식당을 오가거나 고려인 지원단체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렸다. 아이들이 놀다 지쳐 해가 지고 달무리까지 오를 무렵 어른들의 기척이 골목에 돌았다. 이날 저녁 8시께 승합차들이 속속 사람들을 쏟아내놓기 시작했다. 인력파견업체가 실어가고 되돌려놓는 고려인 노동자들이다. 매일 밤 10시께 피곤한 얼굴로 승합차에서 내리는 고려인 박세르게이(가명·51)씨도 있다. 박씨는 온종일 서서 자동차 목받이를 만들고 돌아왔다. 새벽 동이 트자 경기도 화성의 공장에 출근해 달이 뜨며 퇴근하는 길이다.

10여년 전부터 땟골은 ‘고려인 구역’으로 자리잡았다. 한때 안산 주변 공단을 출퇴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방을 고려인들이 들어와 빼곡히 채웠다. 땟골삼거리를 가운데 두고 100여채의 다가구주택이 사방으로 들어섰다. 대개 2~3층 높이인 건물 벽에는 20여개의 두꺼비집이 가지런히 붙어 있다. 방을 15~20개로 잘게 쪼개는 개축 공사는 여전히 쪽방촌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땟골은 싼 방값에 고려인들이 하나둘 몰려들면서 고려인 구역이 됐다. 이곳에서 웬만한 쪽방은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으로, 원곡동의 70~80% 수준이다. 재중동포와 달리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대다수 고려인들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재중동포보다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다. 벌이가 적은 고려인 3000여명이 땟골에 자연적으로 몰려든 이유다. 처음 한국에 온 고려인들에게 러시아어로 소통할 수 있는 동포들이 모여 있는 땟골은 고향 같은 곳이다.

국내 입국 고려인의 정확한 통계는 없다. 법무부가 매달 발간하는 출입국 통계에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을 범주화한 항목이 없다. ‘중국계 한국인’(재중동포)과 ‘러시아계 한국인’만 따로 통계에 잡힌다. 3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재한 고려인 수는 고려인과 재중동포에게만 발급되는 방문취업(H2) 비자 전체 발급자 수 가운데 재중동포를 빼고 남은 1만2000여명에 또다른 체류자격으로 들어온 러시아계 한국인의 수를 더한 숫자다.

땟골엔 러시아어 간판이 가득하다. 땟골삼거리에서 11년째 박선순(48)씨가 운영해온 ‘25시 할인마트’의 유리창에는 러시아어로 적은 품목 소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친하게 지내던 고려인 청년이 써준 것이다. “친하게 살던 (한국) 사람들은 다 이사 나갔어요. 그 사람들(고려인) 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3년쯤인 것 같아요. 지금은 10명 중 8명이 그 사람들이에요. 한국 사람들 나간 자리를 외국인들이 채웠지.”

할인마트의 주요 품목도 바뀌었다. 가게 안 진열대는 주인도 뭔지 잘 모르는 러시아산 쇠고기 통조림과 차, 보드카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저 원곡동 다문화거리 도매상에 “고려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해서 떼오는 물건들이다.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땟골삼거리 근처 골목에서 한 고려인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땟골삼거리 근처 골목에서 한 고려인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0년새 3000명 몰려 밀집 거주
곳곳엔 방 쪼개는 개축공사
한국말 서툰 고려인들에게
슈퍼마켓은 고충 상담소

달무리 져야 마을엔 인기척
한국생활 9년 박세르게이씨
러시아 가족과 함께 살 희망에
오늘도 마비된 다리 이끌고 귀가

땟골에서 고려인과 한국인은 공생한다. 박씨 부부의 가게는 때로 고려인들의 상담소 구실까지 맡는다. 온종일 일하느라 집을 비우는 고려인들이 “택배 물건을 대신 맡아 달라”고 하거나, 한글을 모르는 고려인들이 “자동차 내비게이션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박씨가 직접 담그는 김치나 젓갈을 좋아하는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간 뒤 “택배로 반찬을 보내달라”고도 연락해 왔다.

박세르게이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우즈베크 나라에서 아파트 세 칸, 자동차도 좋은 거였소. 나 볼보 740 있었어요. 그때 최고였지.” 소련 시절 대학에서 항공기술을 전공한 박씨는 비행기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부유하진 않아도 삶은 넉넉했다. 박씨의 삶은 1991년 소련 붕괴 때 함께 무너졌다. 신생 독립국들은 자민족 우선 정책을 펼쳤다. 러시아어를 구사할 뿐, 우즈베키스탄어 등 각국의 토착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은 직업 선택에 제한을 받았다. 물가는 100배 가까이 뛰었고 모아둔 돈은 화폐개혁으로 종이 쪼가리가 됐다.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주’ 바람이 불었다.

박씨도 러시아행을 택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회사는 망했고 장사를 시작했지만 벌이는 시원찮았다. 경제가 무너진 우즈베키스탄에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2003년 아내와 아이 셋을 데리고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집단 강제이주시키기 전까지, 부모님이 뿌리를 내리고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돈을 벌 길은 요원했다.

그때 찾아낸 ‘새로운 기회’가 한국이었다.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고려인들에게 들었다. 2005년 한국행을 감행했다. 고려인·재중동포를 위한 방문취업(H2) 비자가 아직 발급되기 전이었다. 대신 박씨는 3개월짜리 관광비자로 부산에 왔다. 먼저 한국에 온 처남을 따라 경남 양산의 신발공장에 들어갔다. 그와 같은 일을 한국에선 ‘3D 업종’이라 불렀고 러시아에서는 ‘검은 노동’이라고 했다. 한국에 온 지 2개월 만에 박씨의 몸무게는 12㎏ 줄었다.

그래도 박씨는 한국에 온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고려말’을 잘하는 박씨를 공장 사람들도 좋아했다. 함경도 방언에 뿌리를 둔 고려말은 고립돼 내려오면서 가족 내 입말로만 사용돼 왔다. 현재는 50대 이상의 고려인들만 가까스로 고려말을 구사할 수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검은 머리의 박씨에게 “어떻게 러시아말을 잘하느냐”고 물었었다. 비로소 ‘제비나라’에 온 것 같았다. 고려인들은 고향을 ‘제비나라’라고 부르고 모국어를 ‘제비말’이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박씨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처남을 잡아간 뒤에야 알았다. “출입국관리소에서 갑자기 와서 우리 부인 오빠를 다그닥다그닥 잡아갔어요. 그리고 (파견업체) 부장님이 우리 불러서 얘기했어요. 또 누구 잡혀가면 벌금 많이 문다고 나가라고 했어요.” 처남은 우즈베키스탄으로 추방된 뒤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 2007년 방문취업제가 시행되기 전까지 박씨는 관광비자로 한국에 와 체류기간 3개월씩 머물며 돈을 벌었다. 농사짓는 것부터 건설현장 일용직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박씨는 2007년 방문취업제로 고려인의 취업길이 넓어지자 땟골로 옮겨왔다. 박씨는 경기도 화성 공장에 출근해 달이 뜨면 퇴근한다. 아침 8시30분에 시작하는 공장일은 밤 9시가 돼야 끝난다. 오전 10시15분의 쉬는 시간과 낮 1시부터 시작되는 40분의 점심시간이 휴게시간의 전부다. 배가 고프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쪽방에 들어오면 지쳐 잠든다. 일요일 하루를 쉬고 그렇게 일해 박씨가 받는 돈은 월 130만원이다.

박씨의 맏아들은 모스크바에서 요리사 일을 하고 둘째 딸은 모스크바의 의학대학교에 다닌다. 박씨는 지난 몇 년 동안 커가는 아이들을 스마트폰 화면으로만 만났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보다 한국말에 더 익숙해진 그는 아들딸도 한국에 와 살았으면 하고 꿈꾼다. “의사 공부하는 딸, 한국 와서 우리 침 놓는 거 배우고 싶어하지요.” 고향 우즈베키스탄의 여름을 연상시키는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땟골의 쪽방 골목으로 박세르게이씨는 절름거리는 다리를 끌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안산/글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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