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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함께 필리핀 가서 아버지 유골 찾아봅시다”

등록 2013-10-11 20:09수정 2013-10-13 12:08

“354명 중 한 명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필리핀 77연대에 소속됐던 조선인 유가족을 지난달 30일 처음 만난 시오카와 마사타카(왼쪽)씨는 감동에 젖었다. 그런 시오카와씨에게 박기철(오른쪽)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354명 중 한 명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필리핀 77연대에 소속됐던 조선인 유가족을 지난달 30일 처음 만난 시오카와 마사타카(왼쪽)씨는 감동에 젖었다. 그런 시오카와씨에게 박기철(오른쪽)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토요판] 뉴스분석 왜? 필리핀 77연대 한·일 유가족의 만남
▶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아무런 상관도, 죄도 없는 집안을 송두리째 불행하게 만들어놓고도 피해자에 대한 소식도, 유해의 행방도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관계없다는 듯 하는 태도에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박기철씨가 2005년에 쓴 글입니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한 일본인이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박기철씨를 찾았습니다.

1944년 태어났다. 같은 해 아버지가 징병됐다. 아버지는 전사했다. 어떻게 전사했는지 모른다. 유골도 돌아오지 않았다. 9월30일 처음 만난 시오카와 마사타카(69)씨와 박기철(69)씨는 공통점이 많았다. 인천 강화군에 있는 박씨의 집을 방문한 시오카와씨는 반가운 마음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박씨도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생면부지인 두 사람을 이어준 더 큰 공통점은 따로 있었다. 시오카와씨의 작은아버지와 박씨의 아버지가 ‘필리핀 77연대’에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77연대 일본인 생존자들의 특별한 부탁

시오카와씨는 ‘전몰자 추도와 평화모임’(평화모임) 이사장이다. 평화모임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1931~1945년) 때 숨진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해 가족들에게 전해주는 활동을 하는 일본 시민단체다. 그가 전사자들의 유해를 찾기 시작한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44년 징병돼 오키나와에서 대본영(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수행본부)과의 통신을 담당하던 ‘전신 36연대’에 배치됐다 전사했다. 그러나 사망 통지만 왔을 뿐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에 쫓겨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때 전사한 게 아닐까 추정할 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1952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해 ‘행방불명’ 처리된 군인들의 유해를 국내외에서 발굴하기 시작했지만, 시오카와씨 아버지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와 같은 32살이 되던 1976년 말, 그는 신문을 보다 오키나와에서 죽은 전우의 유해를 발굴하던 다카다 도시오씨의 기사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있던 곳이 오키나와였기에, 유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카다씨를 만나 아버지의 편지를 보여줬다. 다카다씨는 “나하고 같은 부대야!”라며 소리를 질렀고, 그 역시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몇달 뒤 그는 다카다씨와 함께 오키나와에 갔다.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한 방공호에 들어갔는데 유골과 유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으니 정부의 유골 수집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던 거죠. 아버지가 거기 어딘가 계실 거라 생각하니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정부에 발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해서 결국 스스로 찾기 시작했어요.” 시오카와씨가 말했다.

자비를 들여 유해 발굴을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힌 만년필, 백골이 다 된 유골 등을 보았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는 남의 유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고통스럽게 산 사람들이 나만이 아니구나 싶으니까 내 일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수집한 유해들을 지금까지 전사자 유가족 130여명에게 전해줬다.

아버지와 같은 해 징병됐다 사망 통보를 받은 작은아버지의 유해 찾기도 시오카와씨의 몫이었다.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아버지에 대해 아는 거라곤 필리핀 77연대에 소속됐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1993년, 이번에도 신문기사를 통해 시오카와씨는 필리핀 77연대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다. 77연대 추모제가 야마구치현의 한 절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우연히 본 것이다. 기사를 보고 간 추모제에서 작은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했다는 77연대 생존자 나가타 가쓰미씨를 만났다. 작은아버지는 맹장 수술을 받고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싸우다 1945년 7월 숨졌다고 했다. 두 사람은 함께 필리핀으로 떠났다. 나가타씨가 작은아버지를 묻었다는 지역에 가 유해 발굴을 시도했지만, 50년의 세월 탓인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시오카와씨는 77연대 생존자들과 전사자 추모활동을 시작했다.

이즈음 고령의 생존자들은 젊은 그에게 특별한 부탁을 남겼다. “이걸 꼭 조선인 유가족들에게 전해줘.”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1992년에 만든 ‘반도 출신 영령부’였다. 그 안에는 77연대에 있던 354명의 조선인 명단과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사망 장소·날짜가 적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필리핀에 와서 폭염, 병, 식량 부족에 시달렸던 당신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편히 잠드십시오’라는 추모의 글도 덧붙였다. 생존자들의 부탁은 마치 유언처럼 시오카와씨 평생의 짐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일본 내 유해 발굴, 추모 행사 등에 집중하느라 오랫동안 조선인 유가족을 수소문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7월 ‘2013 한일 과거청산 시민운동 보고대회’ 참석차 한국에 오면서 77연대 조선인 명단을 한국 강제동원 피해자 모임인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보상추진협의회)에 전달했다. 보상추진협의회는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로 합사된 한국인 이름을 빼달라는 소송을 준비하다, 박풍현씨 야스쿠니 합사 확인서에 적힌 ‘필리핀 77연대’를 발견했다. 그가 박기철씨의 아버지다.

1940년대 찍은 박기철씨 아버지 박풍현(오른쪽)씨와 큰아버지의 사진. 박기철씨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이다. 
박기철씨 제공
1940년대 찍은 박기철씨 아버지 박풍현(오른쪽)씨와 큰아버지의 사진. 박기철씨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이다. 박기철씨 제공

패색 짙은 무모한 전쟁터 필리핀

일본군이 필리핀을 공격한 건 1942년 1월이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공격에 이어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일본한텐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가 필요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시작으로 버마, 뉴기니, 인도네시아 등을 공격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크게 패한 이후 단 한 번도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 연합국으로 전세가 기울어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남아시아 지역은 장기적인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의 필리핀으로 77연대가 갔다.

필리핀 77연대의 공식 명칭은 ‘제14방면군 제35군 제30사단 보병 제77연대’다. 생존자 다카다 시즈호씨가 남긴 수기를 보면, 77연대는 1944년 5월19일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수기에도 적(미군)의 비행기를 피해 300㎞ 이상의 행군을 강행했다거나, 보급 없이 싸우다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거나, 강력한 미군과 싸우다 후퇴를 거듭한 이야기 등 당시의 열악한 상황이 드러났다. 1945년 2월에는 필리핀의 일본군은 전력을 대부분 잃었고, 연합군은 필리핀의 제공·제해권을 장악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 위원회)의 정혜경 조사2과 과장은 “필리핀으로 간 군인들은 사실상 총알받이였다”고 말했다. 그만큼 질 것이 뻔한 무모한 전쟁터였다.

그런 필리핀으로 1944년 함경남도에서 징병된 박풍현(당시 22살)씨가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떠났다.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면서 전시 총동원 체제로 돌입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도 군속·노무자·학도지원병 등으로 강제동원됐지만, 군인이 본격적으로 징병된 것은 1944년부터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최소 204만4774명이고, 그중 군인은 20만9279명으로 추정된다. 박풍현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필리핀으로 간 조선인은 특히 생존율이 낮았다. 1962년 일본 후생성 자료를 보면, 당시 필리핀으로 간 조선인의 69.3%가 전사했다. 반면 일본 본토에 있던 조선인 육군의 사망 비율은 0.33%였다. 박풍현씨도 전사한 69.3% 쪽에 속했다.

1945년 8월15일이 지나도 박풍현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뒤로하고 박기철씨의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왔다. 친정집에 가 있던 어머니는 급히 내려오느라 함께 오지 못했다. 전쟁과 분단으로 고아가 된 박씨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사느라 학교도 못 다녔다. “고생을 정말 많이 했어요. 홀트아동복지회 같은 데 갖다줬으면 외국에 입양이라도 됐을 텐데. ‘차라리 나를 낳지 말지’ 하고 부모님 원망도 했죠.” 원망만큼 그리움도 컸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까 싶어 아버지 이름을 찾아 남의 집 문 앞에 걸린 문패를 읽으며 하염없이 걸은 적이 많았다고 했다.

먹고살기 바쁜 사이 시간은 부지런히 흘렀다. 2000년께 언론을 통해 강제동원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상추진협의회를 방문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 가 유수명부(조선인 징용자의 병적)를 열람해 아버지는 이미 1945년 6월20일에 숨졌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달만 버티셨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때의 안타까움과 먹먹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강제동원 위원회는 2007년 박씨의 아버지를 희생자로 결정했다. 이 결정 뒤에야 그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유골을 대신할 위패를 서울 강북구 삼성암에 모셨다.

강제동원자 유해 발굴은 아직도 제자리걸음

“유골을 찾지 못한 조선인 전사자, 행방불명자에게는 지금도 식민지 지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본 정부는 일본인들에게는 사망 사실도 알려주고 연금이라도 줬지만 조선인에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죠. 일본 정부가 나쁘고 어이없지만, 저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함께 필리핀에 가서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통역자를 통해 전해지는 시오카와씨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박기철씨가 입을 열었다. “일본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래서 제가 고생을 많이 하게 돼 일본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좋은 일본 분들을 만나 위로가 많이 되네요. 하지만 필리핀 간다고 해서 유골을 찾을 수 있을지는….” 오랜 시간 단념과 체념을 반복해온 박씨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돼 희생된 조선인 유골 문제는 한-일 관계의 오랜 과제 중 하나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뒤 양국은 일본에 있는 군인·군속 유골 2000여기 송환에 합의해, 1971년부터 2005년까지 가족들에게 돌려줬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강제동원 위원회 주도로 423기의 유골이 추가로 송환됐다. 그러나 이는 자진신고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가 신원을 확인한 경우에 불과했고, 신고되지 않은 유골 조사나 집단매장지역 발굴 등은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군인·군속이 아닌 강제동원 노무자의 유골 현황은 2005년부터 아직까지 조사중이다. 일본 외 지역은 더 열악하다. 사할린 지역은 러시아 정부와 협의를 통해 2006년부터 6000여기의 묘지 조사를 벌여, 지난 8월29일에야 처음으로 유골이 국내로 송환됐다. 다른 지역은 아예 손도 못 대고 있는 실정이다.

징병된 박기철씨 아버지와
시오카와씨의 작은아버지는
필리핀 77연대에 소속됐다
전사했지만 유골을 못 찾았다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들에겐
지금도 식민지배 계속돼”
일본에서 유해 발굴을 하던
시오카와씨의 관심은
조선인 유해 발굴로 확대됐다

강제동원 위원회에서 유해 문제를 담당하는 오일환 전문위원이 보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골 발굴 전망은 밝지 않다. “일본과 사할린 이외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현장 조사를 하긴 했지만 발굴하진 못했습니다. 자료가 부족해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었어요. 일본은 발굴을 일찍 시작했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조선인 생존자도 적고 시작도 늦었습니다. 물론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정부 차원의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골 봉환은 강제동원 위원회가 생긴 2005년 이후에야 서서히 진행됐다. 올해 12월31일로 기한이 끝나는 위원회가 문을 닫으면 유해 추가 발굴은커녕 지금까지 외국 정부와 논의해온 유해 송환 협의도 중단될지 모른다.

힘든 상황이지만 시오카와씨는 여전히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을 법제화해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골을 찾아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육친을 잃은 저는 우리 아이를 전쟁으로 데려갈 위기가 오고 있다고 느낍니다. 두번 다시 전쟁은 안 됩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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