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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성폭행 당했는데 ‘사생활 방종’이라니…여군 하사 K의 눈물

등록 2013-10-25 21:05수정 2013-10-27 10:30

[토요판/뉴스분석 왜?]
▶최근 상관의 부당한 성관계 요구에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군 대위가 있었습니다. 여기 또 비슷한 이유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군 하사가 있습니다. 그 역시 지난 3월 같은 부대 상급자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당했습니다. ‘가해자’와의 원치 않는 성관계는 그로부터 약 30차례 계속됐습니다. 더욱 어이없는 현실은 이 일로 해당 부대로부터 징계 처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생활 방종’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여군 하사 김민아(가명)씨는 지난해 7월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군인은 김씨의 오랜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여군 부사관 시험에 도전했고 한 차례 낙방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은행 청원경찰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면서도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군복을 입게 됐을 때, 김씨의 나이는 이미 20대 중반이었다.

지난 1월 김씨는 부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다른 부대에서 옮겨 온 상사 황정우(가명)씨가 김씨 앞에 나타났다. 황씨는 김씨보다 15살 많은 유부남이었다. 황씨는 낯선 업무로 버거워하는 김씨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김씨는 이런 황씨에게 차츰 기대었다. 김씨는 당시의 황씨를 ‘아빠 같은 선임’으로 기억했다.

사건은 지난 3월 김씨가 다니던 수영장에 황씨가 함께 등록한 것에서 비롯했다. 그 전까지 자전거로 수영장을 오갔던 김씨는 황씨의 권유에 따라 가끔씩 그의 차를 얻어탔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김씨는 황씨에게 운전을 배우기도 했다. ‘그날의 일’은 3월19일 밤 11시께 벌어졌다. 수영을 마치고 황씨와 함께 관사로 돌아가던 그날, 김씨는 황씨가 건넨 음료수를 마신 뒤 잠에 빠졌다. 황씨는 정신을 잃은 김씨를 성폭행했다.

선뜻 신고 못한 결정적 이유는 진급심사

황씨는 범행 직후 황망해하는 김씨 앞에서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을 신고하라고 말했다. 김씨는 성폭행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포기했다’. 6월말까지 김씨는 황씨의 차량과 두 사람의 숙소, 부대와 가까운 시내 숙박업소 등에서 약 30차례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가졌다. 김씨의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난 것은 7월2일이었다. 부대 근처 사격장 텐트 안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대대장에게 들켰다. 지난 10월3일 서울에서 만난 김씨는 최초 성폭행 사건 발생 당시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나의 군 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아무한테도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 사람은 내가 믿고 의지한 유일한 선임이었는데, 그 사람마저 잃으면 군 생활은 또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사자를 뺀 나머지 일반인의 사고에 비춰볼 때, 김씨의 선택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군 헌병대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합리적 판단 아니었느냐는 의문 제기도 가능하다. 다만 성폭행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못하는 데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김씨의 경우 신고를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진급심사 때문이었다. 대개 부사관은 임관한 뒤 진급 대상 심사와 연장복무 심사 등을 받는다. 복무 연장이 된 사람에 한해서 장기복무 심사를 거치는데, 장기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군에 남고 싶더라도 전역을 해야 한다. 김씨는 많은 여군이 그렇듯, 군인으로서 오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비록 피해자라고 해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다는 이유로 장기복무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까 두려웠다.

장기복무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까 두려운 생각에
그는 신고를 하지 않았다
성군기 사건·사고 발생하면
여군부터 문제삼는 분위기였다

피해자 김씨와 가해자 황씨는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헌병대는 초기에 성폭행 사실을
피해자 징계처분서에 명시했다
군 검찰은 아예 기소를 안 했다

군에서 여성, 특히 여군 하사가 차지하는 독특한 지위도 김씨의 신고를 막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김씨는 “군에서 일어나는 성 관련 범죄는 결국 여군 잘못”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접했다고 밝혔다. 2013년 3월 기준 여군은 총 8448명으로 육해공군 다 합쳐서 4.7%에 불과했다. 여군 하사는 부사관(하사·중사·상사·원사 등) 가운데서도 가장 계급이 낮은 군인이다. 성범죄 등 성 군기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이유를 떠나 상대적 약자·소수자인 여군의 처신 또는 대응부터 문제삼는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김엘리 이화여자대학교 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여성학)는 박사논문 ‘여군의 출현과 젠더질서의 교란’에서 “군인이 성폭력을 통해 자신이 성적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취약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김 교수는 “강한 군인으로서의 통치담론은 여군으로 하여금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구조적 문제를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둔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묻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후 황씨와의 원치 않는 성관계는 한동안 계속됐다. 김씨는 왜 최초 성폭행 이후 이뤄진 지속적인 성관계를 거절하지 못했을까. 김씨는 부대 업무 때문에 황씨와 지속적인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황씨가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피해자인 자신의 무기력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회의 일반적 시선에 굴복한 측면도 있다.

김씨에 의해 가해자로 지목된 황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초 성폭행 사실과 그 뒤 지속적으로 이뤄진 성관계의 강압 여부에 대해 모두 부인했다. 황씨는 “3월19일에 벌어진 일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 말로 합의하지 않았지만 합의한 것으로 느낄 만한 김씨의 행동이 있었다. 음료수를 건넨 일도, 먹인 일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그 뒤 이어진 성관계도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해서 벌어진 일들”이라고 말했다.

남성 사병들이 옆을 지나가며 키득키득

전문가들은 황씨의 이런 주장이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수동적 심리를 이용한 자기 합리화 논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의 설명이다. “이런 경우 당사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선뜻 이해를 못할 수도 있어요. 진짜 피해자라면 곧바로 고소하든지, 추가 피해를 안 당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건 피해자의 관점과 피해자의 경험을 다 무시하는 거예요. 비정상적인 상황,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정상적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는 건 가혹한 시선이에요. 피해자는 (군대 내에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자신이 더 피해를 볼 거라는 걸, 지난한 싸움이 시작될 거라고 인지하고 있는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겠어요.”

김씨와 황씨가 맺어온 ‘관계’가 드러난 7월2일, 해당 부대는 두 사람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피해자 김씨에게는 징계위에 출석하는 것마저도 고통이었다. 징계 절차가 논의되는 중에도 그는 황씨와 계속 마주쳐야 했다. 황씨는 김씨와 마주치면 보란 듯이 전역신청서 종이를 흔들면서 “(김씨) 덕분에 전역하게 됐다. 나가서 보자”며 소리를 질렀다. 김씨가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만 보면 상대방을 불러내거나, 김씨가 보이면 소리를 지르는 등 폭력적인 상황에 김씨는 계속 노출돼 있었다. 황씨로부터 받은 일종의 협박 문자들을 상부에 보고하자, 상관은 황씨를 불러 구두로 경고한 뒤 되레 김씨에게 전화번호를 바꾸라고 권유했다.

징계위에서 김씨를 조사한 헌병대 여군 수사관은 김씨가 음료를 마시고 기억을 잃었다는 김씨의 진술에 주목해 약물에 의한 성폭행 여부에 주목하는 듯했다. 그런데 정작 7월15일 열린 징계위에서 징계처분을 받은 사람은 황씨, 그리고 피해자 김씨였다. 처분 사유는 황씨의 성폭행 사실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생활 방종’(품위유지의무 위반)이었다. 해당 군 징계규정을 보면 성폭행, 유사성행위, 성매매 등 성범죄 가해자는 사생활 방종이 아니라 ‘성적 문란행위’로 징계를 받는다.

김씨가 군 징계위원회로부터 받은 징계처분서의 ‘징계 대상 사실’을 보면 헌병대는 김씨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징계위는 김씨에 대한 처분서에서 “피징계인은 2013년 3월○일부터 상사 △△△와 수영장을 함께 다니며 친분을 쌓아 오던 중 3월19일 밤 11시께 수영을 마친 뒤 드라이브 후 부대 복귀 시 △△△ 상사 차량 조수석에서 잠들어 있는데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군은 김씨가 최초 성폭행 사건 이후 황씨와 맺은 약 30차례의 성관계를 ‘부적절한 관계’로 규정한 뒤 김씨에게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황씨도 같은 이유로 정직 3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김씨는 자신이 받은 징계가 부당하다며 항고한 상태다.

김씨의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씨와 황씨가 모두 군 징계위에 회부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부대 안팎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해당 군에서는 사건 직후 김씨의 소속 부대를 옮겨주었지만, 새롭게 옮겨간 부대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씨는 “장교들은 물론 일반 남성 사병까지도 내가 옆을 지나가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거나 키득대며 비웃는 일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한 간부는 그에게 “비도 오는데 나와 함께 머리에 꽃 꽂고 산책이나 가자”며 모멸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징계위로부터 징계처분을 받은 직후 가해자 황씨의 부인으로부터 간통 혐의로 피소까지 당한 사실이다. 김씨는 이에 맞서 역시 변호사를 선임해 황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할 계획이다. 징계 기간이 끝난 김씨는 “여군 부사관 의무 복무 기간(3년)은 다 채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사가 나간 뒤 군으로부터 또 어떤 피해를 입을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김씨 사건에 대해 해당 군은 25일 “(김씨가) 성폭행이라고 주장한 것과, 해당 부대 헌병대 조사 결과 두 사람이 모두 징계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군 검찰에서 간통 사건 수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혀왔다. 해당 군 관계자는 “김씨에 대한 군 징계위 처분서에서 황씨의 성폭행 사실을 적시한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최초 사건 발생 당시 친고죄였던 성폭행에 따른 처벌 여부는 피해자의 고소가 전제돼야 하는데, 그런 문제제기가 없어서 처벌 사유에 포함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성폭행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가 원치 않게 맺어온 성관계 사실에만 주목했다는 이야기다.

군은 성범죄 처벌 의지가 있나

성범죄와 관련해 군의 인권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처음 나온 문제가 아니다. 국회 국방위원회 김광진 민주당 의원실이 국방부에 요청해 받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2013년 6월30일까지 육군 국방여성(여군, 여군무원)이 피해자인 사건 가운데 절반은 성범죄였다. 2008년 발생한 성범죄는 6건, 2012년은 15건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처리 결과였다. 공소권 없음, 기소유예, 선고유예, 공소기각이 많았다. 최근 5년간 여군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중 기소된 비율은 45건 중 14건에 그쳤다.

군법무관 출신인 이경환 변호사의 주장이다. “군대 내 성폭행의 특징은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랑 일을 같이 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군 특성상 사건 발생 이후 처리 과정에서 성폭행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성폭행 피해자를 동시에 간통으로 징계하는 것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교양학부)는 남성 중심적 군대 문화에서 여군이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지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군기는 갈등이나 문제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측면이 많아요. 여군, 여성성, 약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개인적으로 불리할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피해자가 그만한 이유를 제공했다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식의 사고가 매우 강한 조직이라는 것을 군 스스로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해요.”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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