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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풍찬노숙 ‘응어리’ 노랫가락에 훌훌

등록 2013-12-29 20:34수정 2013-12-29 21:14

26일 저녁 6시30분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인 합창단 ‘채움’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노숙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노숙인 800여명이 모였다.
26일 저녁 6시30분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인 합창단 ‘채움’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노숙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노숙인 800여명이 모였다.
현장 l 노숙인 합창단 ‘채움’ 해넘이 공연

서울역 지하도에 모인 800여명
음악으로 즐거웠던 기억 되살리고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 이해
동병상련의 시름을 희망으로
한파가 몰아닥친 밖과 달리, 지하 세계는 그나마 따뜻했다. 상기된 25명의 얼굴이 입을 동그랗게 열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마이크가 낯선 탓인지 몇몇의 목소리만 들렸지만, 듣는 이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26일 저녁 서울역 지하도에서 합창단 ‘채움’의 여섯번째 공연이 열렸다. 노란조끼를 입고 전자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합창단이나, 지하도 바닥에 앉아 이들의 노래에 빠져드는 800여명의 청중이나 모두 노숙인들이다. 두번째 곡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노랫가락에는 삶의 슬픔과 기쁨이 모두 녹아들어갔다.

공연이 시작되기 2시간 전 서울역 근처 드림씨티 건물 3층. 문고리가 사라진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특유의 눅눅한 냄새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숙인 합창단 채움의 연습장이다. 60㎡남짓한 연습장에서 목을 푸는 이들은 모두 남루한 차림새지만 밝은 표정이 꽤나 경쾌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학교 다닐 때 과수원집 딸 꼬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노래 <과수원길>을 연습하다, 한 노숙인이 옛일을 떠올렸다. 한바탕 폭소가 터져나왔다.

채움은 지난해 4월 창단했다. 채움을 기획한 이영숙 ‘서울꽃동네사랑의집’ 사무국장은 “노숙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줬으면 했다. 실제로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게 풀렸다거나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는 노숙인이 많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꽃동네사랑의집이 주최하는 노숙인 위문행사에서 채움은 여섯번째 공연을 펼쳤다.

지휘를 맡은 성악가 이중현씨가 공연 세번째 곡 <번지없는 주막>의 솔로 지원자를 구하자, 이덕규(54)씨가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이씨의 구성진 가락에 단원들은 환호했다. 이씨는 노숙생활 6개월째다. 장사도 해봤고, 운전도 해봤지만 실패했다. 갈 데가 없어 동생 집에 얹혀살다 올 초여름 집을 나왔다. 낯설고 어려운 일이 많았다.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잘 때면 ‘코를 곤다’며 발로 툭툭 차는 다른 노숙인이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이씨는 채움에 들어온 뒤 다른 노숙인을 이해하게 됐다. “음악 덕분에 이렇게 만나 이야기하면서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음악이 너무 좋아요. 노래 덕에 살아요.”

합창단장 윤태용씨는 3년차 노숙인이다. 윤씨는 학창시절부터 ‘음악 잘 한다’는 소릴 제법 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봄 노숙인 급식소에서 우연히 합창단 모집 소식을 듣고 연습실을 찾았다. 첫 연습 날 다른 단원들이 윤씨를 단장으로 추대했다. “단장을 맡고 책임감이 생겼다. 합창단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단원들을 보기만 해도 정말 반갑다”고 윤씨는 말했다.

공연을 마친 다음날인 27일, 윤 단장은 다시 평범한 서울역 노숙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이씨는 동생 집에 맡겨둔 옷가지 등 ‘고생 보따리’를 찾으러 경기도 문산행 기차를 탔다. 이씨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었던 건 영광이었다.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음악하는 사람은 마음이 예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외로운 노숙인끼리 모여서 서로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합창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윤 단장은 공연 마지막곡 <꿈꾸는 세상>을 흥얼거렸다.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모든 사람이 하느님 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채움은 내년에도 공연을 이어간다. 춘천행 기차여행과 봉사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글·사진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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