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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회사에서 일한다는 거
상투적인 거짓말이었어

등록 2014-01-03 19:40수정 2014-01-05 11:45

[토요판] 가족 / 1인 가구의 연말연시
▶ 자신은 ‘불우이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 남성이 있습니다. 챙겨야 할 가족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렇다고 그 흔한 애인도 없는 그는 지난 성탄절에도 신정에도 혼자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그는 되레 ‘오늘 같은 날’을 핑계로 빤한 자리에 자신을 부르지 말아달라고, 관심 갖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 어떤 이유로든, 구제 불능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뭐하냐.” “뭐하긴, 회사에서 일하지.”

“저녁에 말이야. 오늘 같은 날 회사에만 있지 말고 나와라. ○○ 알지. ○○가 친구들 데리고 놀러 온다는데, 같이 보자.”

“너나 많이 봐라. 내가 요즘 좀 바쁘다. 해 바뀌면 보자.”

이건 지난달 25일, 그러니까 성탄절 오후 친구 에이치(H)와의 전화통화 내용이었다.

“뭐하냐.”

“뭐하긴, 집에 있지. 씻고 회사 갈 거야.”

“회사? 오늘 같은 날 무슨 회사를 가. 점심때 집에 와서 떡국이나 먹고 가라. 와이프가 떡국 끓여준단다.”

“너나 많이 드셔. 네 와이프가 나 먹으라고 떡국 끓였겠냐. 다음에 한번 보자.”

이건 새해 첫날 오전, 또다른 친구 에스(S)와 전화로 나눈 대화의 일부다.

전세계 좌파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얼마 전 그랬다. 파티와 쇼핑은 성탄 문화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옛날부터 어른들이 말했다.(공영방송 캠페인 내용이었던가?)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보내라고. 낯선 이들과의 사교 따위는 나이 마흔을 훌쩍 넘은 내게 더이상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고, 니들 가족끼리 알콩달콩 정겨운 시간을 가져야 할 설 명절에 ‘불우이웃’이 되어 당신들의 식사 자리에 끼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니 나는 늘 이맘때(성탄절부터 신정·설날까지), 혼자다.

망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망한 인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땡땡이’와 흡연 등 온갖 못된 짓을 함께 했던 친구 에스는 딸 둘을 초등학교에 보낸 어엿한 가장이고, 사회 초년 시절 무도장 출입 등 음주·가무를 함께 즐겼던 친구 에이치는 어떤 기획사 사장으로 제법 잘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 다들 그렇게 산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월세·전세 몇번 옮겨 다니고 은행에서 돈 빌려 집을 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들 잘만 사는 결혼 생활을 여차여차한 이유로 끝장내버렸고, 그 이후 연애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라고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상태의 통장 하나였고, 한국 사회에서 쥐꼬리만큼 받는 월급을 한푼 두푼 모아 집 사고 재테크 하는 일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그냥 흥청망청의 나날을 보냈다. ‘잘못된 인연’으로 남고 싶지 않아 가끔씩 다가오는 여성은 차갑게 밀어내기를 되풀이했고, 술집과 밥집 계산대에서는 돈 많은 지인들 뒤에서 쭈뼛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들은 아마도 나를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남은 까칠한 이혼남’ 정도로 여길지도 모른다.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혼자 사는 ‘불우이웃’으로
남들 가족에 끼기는 싫고
낯선 이들과의 사교 따위는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성탄절에는 혼자 영화 보고
신정 때는 아이패드를 샀다
물론 외롭다, 외롭지만
외롭다고 아무 데나 가서
아무나 만나고 싶진 않다

남들과 다른 삶, 대중적 눈높이로 말하면 ‘망한 인생’을 어떻게든 살고 있는 내게 가장 싫은 날,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귀찮은 날은 바로 앞서 친구 에이치와 에스가 말한 성탄절과 신정, 설날 등 ‘오늘 같은 날’이다. 여기까지만 읽은 독자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망한 인생을 살고 있는 당신 내면의 콤플렉스가 일종의 대인기피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그런 날일수록 가서 좀 어울려야 한다고 말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들 사는 방식, 그러니까 다시 되풀이하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전세 몇번 옮겨 다니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남들 잘만 사는 결혼 생활이라고 하지만 당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맨날 지지고 볶으면서도 여차여차한 이유로 끝장조차 내지 못하는 걸 내가 다 안다. 재테크는 무슨 재테크,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 때문에 일단 돈이라도 모아야 안심하는 삶이야말로 두려움에 저당잡힌 인생 아닌가. 가끔씩 다가오는 인연들에게는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당신, 내게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쩌지 못해 지금 그 삶을 산다는 내 사랑하는 친구 에이치, 그리고 에스야. 지난 성탄절과 신정 때 나를 초대해줘서 고맙다. 그날 회사에 남아 일한다고 했던 거, 회사에 나가봐야 한다고 했던 거 모두 상투적인 거짓말이었다. 성탄절 오후에는 집에서 혼자 술 마시며 영화를 봤고, 신정 점심때는 애플사의 아이패드 에어를 사려고 돌아다니다 문 연 식당을 찾아 혼자 점심 먹었다. 너희들은 나를 가리켜 흔히 워커홀릭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일이라는 핑계라도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구나.

아마 그날 그 자리에 나갔다면 뻔했을 것이다. 축복받은 성탄절, 애인 없는 외로운 영혼들끼리 만나 각자 성탄절 전야를 얼마나 외롭고 처절하게 보냈는지 자기고백의 시간을 가졌겠지.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그 가운데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는 (언제 봤다고) ‘잘 어울린다’는 명목으로 엮였을지도 모른다.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면, 물론 외롭다. 성탄절 전야와 12월31일 자정, 설날처럼 축복과 사랑(어쩌면 욕정)이 충만한 ‘오늘 같은 날’ 혼자 지내면서도 외롭지 않다면 그게 인간인가. 다만 외롭다고 아무 데나 얼굴을 들이밀고, 아무나 만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떡국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냐’ ‘회사 일은 잘 되냐’ 등 만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하는 그런 상투적인 위로와 관심은 노 생큐다.

그러니 나를 좀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다. 오늘 같은 날, 제발!

‘위장 워커홀릭형’ 돌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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