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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성폭력 피해 어린이에 ‘반복 진술’ 요구…실체 규명 되레 혼란

등록 2014-01-20 20:33수정 2014-01-21 10:31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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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쏙] 성폭력 조사의 함정
어린이 대상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어린이의 진술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 증거다. 그런데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어린이가 여러 차례 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바뀔 수 있어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더 어려워진다.

“피고인은 형사 책임이 없습니다. 피고인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재판장 유상재)는 손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법정에 선 ㄱ(73)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무죄’라는 표현의 사용을 꺼렸다. 선고를 마치면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하기는 하나, 피해자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으니 절대 손녀를 찾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ㄱ씨가 무죄를 받은 결정적 이유는 유일한 증거인 손녀(15)의 진술이 여러 차례 바뀌었기 때문이다. 손녀는 경찰·검찰·법원을 거치며 모두 5차례 진술을 했다. 5년 전 할아버지의 범행 시기를, 봄이라고 했다가 가을이라고 했다가, 1학기였다고 했다가, 답을 않기도 했다. 손녀는 법정에서 이뤄진 마지막 진술에선 “(할아버지에게) 당한 건 몇 개 없는데 왠지 벌을 안 줄 것 같아 꾸며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반감 등으로 사실관계를 확대하거나 허위로 가공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검찰은 항소했다.

■ 어린이 진술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판사들은 “성폭력 피해 어린이의 진술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지가 형사재판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들 말한다. 어린이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는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지만, 실제 사건으로 들어가면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2012년 15살 딸을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ㄴ(41)씨의 경우 딸이 범행 시점을 자꾸 바꾸는 등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하지만 항소심인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김주현)는 “시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에 합리성이 없다며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며 ㄴ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난해 수원지법 형사15부(재판장 이영한)는 재혼한 아내의 11살 딸에게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ㄷ(53)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지능지수 62의 가벼운 정신지체 상태이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일부 사실과 다른 진술도 초등학생 수준에서 이해할 만한 행동이다”라며 피해 어린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항소심인 서울고법 형사11부(재판장 김종근)는 지난해 12월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은 범행 시기·장소·내용 등 중요한 부분에서 모순되고 일관성이 없으며 여러 정황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묘사가 전혀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답한다”며 무죄 판결했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서 유무죄를 다투고 있다.

서울고법 김상준 부장판사의 논문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를 보면, 1995년부터 2012년 8월까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진 성폭력 범죄 311건을 분석한 결과 유무죄 판단 차이를 초래한 증거 유형은 피해자·목격자의 허위·오인 진술(복수응답)이 98.4%를 차지했다.

성폭력 피해 어린이의 법률 지원을 하는 해바라기여성아동센터 박혜영 부소장은 “아이들은 수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범행)시기에 대한 대답이 바뀔 수 있다. 행위 자체에 집중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성폭력 전담부 판사도 “아이가 허위진술했다고 하면, 왜 그런 자백을 하게 됐는지 따져봐야 한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진술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주변 가족들이 ‘아버지 징역 가게 할 거냐’는 식으로 말하면 피해자도 피해를 축소하게 된다. 특히 친족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는 무조건 부인하고 피해자는 진술 번복이 심한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5∼7번 되풀이하면서 내용 바뀌어
“신빙성 없다”며 무죄로 뒤집히기도

“아이들 수개념 부족해 대답 부정확
주변 압박으로 피해 축소할 수도
행위 자체에 집중해서 판단해야”

어린이 진술 신빙성 높이기 위해선

초기에 자세히 조사하고 영상촬영

전문가 의견조회제 의무화시켜야

■ 반복 진술은 ‘독’ 성폭력 피해 어린이의 진술은 여러 번 거듭될수록 ‘오염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따라서 수사 과정에서 피해 어린이의 진술을 제대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 진술은 영상녹화를 하거나 많아도 두세 차례 받는 것이 보통인데, 어린이의 진술 번복으로 무죄가 된 ㄱ씨의 경우 피해자인 손녀는 5차례나 진술했다. ㄴ씨의 딸은 6차례였다. ㄷ씨 사례에서도 의붓딸은 4차례 진술했는데, 유죄로 판단한 1심 재판부는 딸이 경찰에서 녹화한 두 차례의 영상진술만을 증거로 삼은 반면, 무죄판결한 2심 재판부는 경찰 신고 이전 상담교사 두 명에게 피해사실을 알릴 때 진술한 것까지 모두 4차례의 진술을 두고 일관성이 없다고 봤다.

어린이가 진술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은 주로 수사 과정에서 피고인이 계속 혐의를 부인하거나, 어린이가 진술한 정황이 객관적 정보와 다른 경우, 또는 초기 진술이 누락된 경우다. 사건을 맡은 경찰·검찰은 혐의를 확실하게 하려고 어린이를 계속 불러 캐묻는다. 박혜영 부소장은 “처음 경찰 조사에서 영상진술을 받을 때 재조사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세히 진술을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최근 수년 사이 어린이 성범죄 형량이 크게 올라, 혐의가 입증되면 피고인한테 중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판사들이 어린이의 진술을 까다롭게 보게 한다는 분석도 있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큰 폭으로 가중돼 법원 입장에서는 그만큼 중형의 부담이 커 엄밀한 입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도 “형량을 높이면 그에 합당한 혐의 입증을 더 치밀하게 해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입증 절차를 소홀히 하고 형량만 높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헌법재판소는 성폭력 피해 어린이가 법정에서 직접 진술하지 않고 경찰에서 진술한 1회 영상녹화물만으로 증거 채택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 조항(옛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18조 2의 5항)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여지가 있다는 재판관 3인의 소수의견이 있었지만, 6명의 재판관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법이라 볼 수만은 없다. 아동의 2차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이다. 아동을 법정에서 신문하는 것보다 사건 초기에 생생한 진술을 담은 영상녹화물이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 어린이 진술의 신빙성 높이는 방법 보완해야 2010년 4월부터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전문가 의견조회 제도’가 도입됐다. 경찰·검찰·법원에서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등 전문가에게 의뢰해 피해 어린이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이 법에 따라 경찰과 검찰은 13살 미만 어린이 및 장애인 대상 성범죄에 대해 수사할 때 전문가 의견조회를 꼭 받아야 한다. 하지만 법원에선 의무사항이 아니다. 서울고법 성폭력 전담부의 한 판사는 “최소한 아동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려면 전문가 의견조회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어린이가 부모나 수사기관의 ‘의도’에 영향을 받지 않고 편안한 상태에서 진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린이에게 유도신문한 정황이 드러나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성폭력 피해 어린이의 진술 분석을 한 김태경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똑같은 환경에서 진술녹화를 한다. 또 아이들의 진술을 생생하게 받자는 취지로 경찰 수사지침의 진술녹화 매뉴얼에 ‘가능한 한 빨리 진술조사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사건 직후 진술조사가 중요하긴 하지만 사례마다 준비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말수가 적은 아이는 사건 직후 더 얼어붙어 아예 말을 안 하기 때문이다. 이 지침이 과연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2008년부터 ‘진술 조력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경력 10년 이상인 전문 진술조력인이 피해 어린이의 성향에 따라 진술녹화실의 탁자 위치까지 다시 배치하는 등 어린이가 정확한 진술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12월 이 제도를 도입했다. 심리학 전공자 등 전문상담가가 의사소통이나 자기표현이 어려운 13살 미만 성폭력 피해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해 수사나 재판에 참여해 피해자의 의사소통을 보조하고 있다. 수사기관의 직권이나 피해자 신청으로 조력인 사용이 가능하다. 진술하기 전 피해자와 면담해 낯가림이 심하진 않은지, 어떤 단어를 어려워하는지 등을 살피고, 진술 때는 자리 배치부터 질문의 길이까지 고려해 조사자와 피해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돕는다.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 배복주 소장은 “현재는 진술 조력인 제도의 목적이 ‘원활한 조사를 위해’라고 돼 있는데 ‘피해자의 의사소통을 조력하기 위해서’가 돼야 한다. 신뢰 관계인, 증인 지원관 제도 등도 시행되고 있는데, 아동의 일상적인 용어나 표현의 맥락을 따져서 소통해야 하지만 지금은 마치 통역하는 것처럼 단어 한두 개씩 바꿔주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진술의 맥락과 의도, 분위기 전반을 살펴 진정으로 의사소통이 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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