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원심 깨고 원고승소 판결
“의학적 입증보다 건강으로 판단
극심한 스트레스 질병과 연관성”
“의학적 입증보다 건강으로 판단
극심한 스트레스 질병과 연관성”
1989년 삼성생명에 입사한 정아무개(50)씨는 영업소장, 지점장 등으로 일하며 10년 동안 남들처럼 승진도 하고 무난하게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회사가 경비를 절감한다며 임직원들에게 희망퇴직원을 받기 시작했고, 3년 동안 대규모의 인력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정씨는 자신이 구조조정 대상이 되자 스트레스를 받았고,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신경이 불안해졌다. 다른 영업소 소장이 퇴직한 덕분에 정씨는 구조조정을 피했지만, 다른 동료를 해고시키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회사 지시로 정씨는 실적이 좋지 않은 다른 영업사원을 강제로 이직시키고, 일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15명을 강제로 이직·해직시키면서 해당 영업사원들로부터 심한 욕설과 협박을 듣기도 했다.
그 무렵 정씨는 가족이 있던 곳을 떠나 영업환경이 어렵고 연고도 없는 다른 지역 소규모 영업소장으로 발령났다. 정씨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주말이나 휴일에도 자주 출근했고, 고액연금상품 특화팀을 운영하면서 업무량도 부쩍 늘었다. 직장 동료가 폭행사건을 일으켜 해고당하자 이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자기 돈을 써가며 처리하기도 했다.
영업 스트레스뿐만이 아니었다. 회사는 진급 기준으로 각종 자격증과 어학점수를 요구했다. 정씨는 2004년 자산관리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시험이 끝나고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다 정신이 혼미해지자 심근경색이 아닐까 싶어 병원에 갔다. 평소 엘리베이터 같은 좁은 공간에 있으면 불안하고 뒷골이 당기는 증상을 호소하던 터였다.
정씨는 그 이틀 뒤 아침회의 시간에 호흡곤란으로 쓰러졌고 공황 발작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정씨는 계속 근무하다 2011년 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호흡이 가쁘고 불안하며 우울한 증세가 계속되자 다시 병원을 찾아 재차 공황 장애 진단을 받았다.
정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하자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정씨의 공황장애가 업무로 인해 발병했다는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렵고 공황 장애가 발병한 후에도 계속 업무를 했다”는 이유를 들며 정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서울고법 행정1부(재판장 고의영)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업무상 재해는 반드시 의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업무상 재해는 보통 사람을 기준으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해당 근로자의 건강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차장 진급을 앞두고 있던 원고는 과중한 업무와 병행해 수개월 동안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등 통상을 넘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공황 장애 진단 후에 일을 계속했다고 해서 업무와 질병이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며 정씨에게 요양급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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