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27일 충북 옥천군 이내면 이원시장. 장날인 이날 시장에 모인 조선인 300명은 오후 1시를 기해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일본군 헌병이 발포했고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피고 공재익은 솔선해 헌병에게 ‘사람을 살해하고 그대로 끝난다고 생각하느냐?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면서 완강하게 항쟁했다. 피고 조기시, 최덕용, 이금봉도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졌다. (이 장면을 본) 군중이 기세를 타 돌을 던지고 곤봉 등을 들어 헌병을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옥천 만세운동 두 달 뒤인 1919년 5월12일 열린 재판에서 일본인 재판장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에게 징역 2년에서 3년형을 선고했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충북 옥천을 비롯한 각 지역으로 파급돼 길게는 4월까지 계속됐다. 당시 상황이 판결문에 고스란히 남았다.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은 3·1 운동 당시 재판을 받은 220명, 55건의 판결문을 한글로 번역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을 발간했다고 26일 밝혔다. 기록원이 소장한 일제강점기 판결문은 2637권에 이르지만, 한문과 일본어로 쓰여져 연구자 등만 찾을 뿐 일반인들에게까지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은 이 가운데 서울과 경기·강원·충청도 등 중부지역의 판결문을 선별해 번역한 뒤 원문과 함께 책에 담았다. 전라도나 경상도 쪽의 당시 판결문 자료집은 내년께 발간을 목표로 준비중이다.
판결문에 담긴 사례를 보면, 강원도 횡성에서 1919년 3월27일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는 신재근씨로 당시 64살이었다. 그는 장도훈씨 등과 함께 ‘5촌’(약 15㎝) 크기의 종이로 만든 태극기 20장과 독립선언서 40장을 시장에 모인 300여명에게 나눠주고 이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신씨는 이후 열린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충남 천안의 광명학교 여학생이었던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씨는 1919년 3월20일 천안 입장면 양대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무렵 학생 80여명을 인솔해 양대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함께 외쳤다. 민씨는 당시 17살, 한씨와 황씨는 18살이었고 모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웃한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 열사가 봉기한 날은 이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날로부터 열흘 뒤인 4월1일이었다.
이춘진 국가기록원 연구사는 “판결문에 담긴 3·1운동 당시 상황을 보면 1919년 3월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운동이 각 지방으로 파급돼 3월 하순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계속됐음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선포된 선언서나 취지에 적극 동조하면서 주로 장이 열리는 시장에서, 고개에서, 산봉우리 등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주로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이었던 면사무소와 군청, 주재소, 우편소 등이 운동의 대상이었다.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6살 학생부터 70살에 가까운 노인까지 다양했다. 교사와 학생뿐 아니라 농부, 인력거꾼, 잡화상, 이발사, 승려, 날품팔이, 수공업자, 의사, 시계수리공, 채소행상 등이 참여했다.
국가기록원은 이번 자료집 발간과 더불어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을 선별해 누리집에서 따로 모아 공개했다. 올해 사업이 마무리되면 인명이나 지역별·죄명별로 검색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2만4000여명의 판결문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볼 수 있게 된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이번에 발간된 자료집이 3·1 운동 연구에 도움이 되고, 3·1절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민족정신을 기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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