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 출소한 필자(성유보)는 지난 1년 사이 동아투위 위원들이 박정희 정권의 재취업 방해 등으로 심각한 생계난을 겪고 있는 현실을 절감했다. 사진은 75년 6월 동아투위 운영기금 마련을 위해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마당에서 열린 바자회 모습. 사진 <자유언론> 중에서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3)
1976년 7월 초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한 뒤 나는 여러 민주인사들에게 감사 인사를 다니면서 지난 1년 동안 동아투위와 위원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있었다. 권영자 위원장을 비롯해 장윤환·고 김인한·안성열·고 홍종민·박지동·박종만·문영희·오정환·이종덕 위원, <동아방송>의 이규만·김태진 위원 등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발간된 ‘동아투위 소식’도 훑어보았다. 듣고 보니 50대 선배들부터 주축인 30~40대 위원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가족들을 굶어죽지 않게 할 것인가?”라는 생계 고민이 심각한 실정이었다.
사실 내가 구속되기 직전인 75년 6월17~18일 동아투위는 심각한 활동자금난을 덜고자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마당을 빌려 바자회를 열었다. 고 윤보선·고 천관우·고 김옥길·고 법정 스님·고 김대중·고은 등이 기증해준 글씨와 투위 위원 각자가 아끼던 물건들을 내놓았다. 나는 73년 1월 결혼식 때 권도홍 선배가 선물해준 최영림 화백의 작은 그림을 출품했다. 바자회는 2000여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위원들과 그 가족들의 생계는 점점 더 막막해져 갔다. 75년 7월16일치 ‘동아투위 소식’에는 생계 문제에 대한 절박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우리들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일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이며, 우리들이 굽힌다는 것은 우리들이 사는 일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스스로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들의 행렬은 계속될 것이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위원들의 처절한 생존투쟁마저 내버려두지 않았다. 바자회의 성공에 고무된 동아투위는 신용조합 형태로 ‘132 가게’라는 잡화류 백화점을 열기로 하고 신문로 옛 경기여고 뒤편 허름한 건물 2층을 빌렸다. 8월1일 개장한다는 인사장도 돌렸다. ‘132’는 당시 동아투위 동지들 수였다. 그런데 7월20일까지 중도금을 달라고 독촉하던 건물 주인이 23일 돌연 “경찰이 오라 가라 해서 못살겠다”며 해약을 요구했다. 급기야 7월 말 그는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잠적해 버렸다. 가게를 열 수가 없었다.
또 6월 하순께 장윤환·고 이인철·고 우승용·이종대·박순철 위원 등이 범우사 윤형두 사장의 도움으로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번역해 8월 말 책이 나왔으나 문공부는 50일이 지나서야 등록필증을 내주었다.
독재를 반대하고 독재자 집단을 비판한다고 비판자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그 가족들을 사실상 굶어죽게 만드는 독재사회란 얼마나 야비한 것인가? 곤경에 처한 동아투위에 동아일보사도 독재정권 못지않은 야비함을 보여주었다.
동아일보사는 75년 7월 초 일부 무기정직 위원들에게 ‘회사 복귀 요건’을 제시했는데, 그 조건이란 ‘노조 결성 때 인사조치 당한 전력이 없을 것, 투위에서 간부직을 맡지 않았을 것, 공무국에서 단식농성을 하지 않았을 것, 회사 앞 도열시위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았을 것, 복귀 후 어떤 집단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쓸 것, 소송 중인 부당인사조치 무효확인 소송을 철회하고 그 사본을 제출할 것’ 등이었다. 더구나 회사는 이러한 굴욕적인 조건조차 수용하고 복귀 신청을 낸 30여명의 위원들에게 ‘부장회의에서 투표’, ‘각 부에서 찬반투표’라는 해괴한 짓을 벌여 고작 4명만 받아들였다. 이런 동아일보사에 무슨 ‘언론자유 정신’을 기대하겠는가. 결국 동아투위는 결성 6개월 만인 75년 9월17일 집회에서 “매일 회사 앞 집회와 시위는 접는다”고 발표했다.
그날 이후 위원들은 생활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공안당국의 방해로 직장에서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자영업을 하려던 위원들도 공안당국의 온갖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많이 취업한 곳이 학습지 임시 교열원이었다. 그나마 돈을 버는 위원들은 쥐꼬리 수입에도 투위에 ‘십일조’를 내긴 했지만, 76년 들어 동아투위 사무실은 권영자 위원장, 박종만 총무, 고 안성열 위원 등 몇몇만 지키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76년 봄에는 ‘명동성당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고 문익환 목사, 고 김대중, 함세웅 신부 등 11명이 구속되고 고 함석헌 선생 등 6명이 불구속 기소되면서 재야·종교계·학생운동조차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동아투위는 언론자유 운동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상설 집회 시위를 중단한 지 한달쯤 지난 75년 10월 동아투위 70여명은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1돌 기념식’을 열었다. ‘10·24 선언 기념식’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왔고, 오는 10월 40돌 기념행사를 할 예정이다. 동아투위는 국민들의 언론자유에 대한 염원이 계속되는 한 그 깃발을 스스로 내릴 수 없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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