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에스토니아호 사고는
1994년 9월28일 발트해에 침몰한 에스토니아호 사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최악의 해상 재난 사고다. 탑승자 989명 가운데 무려 852명이 희생됐다.
에스토니아호 사고 14년 뒤인 2008년 스웨덴·핀란드·에스토니아가 함께 내놓은 최종 사고 보고서를 보면, 선체 결함과 사고 원인, 선장 탈출까지 세월호 사고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1994년 9월27일 저녁 7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을 향해 출발한 에스토니아호는 이튿날 새벽 배에 이상 징후가 포착된 지 1시간여 만인 새벽 1시48분 발트해에 침몰한다. 에스토니아호는 세월호와 같은 로로선(Roll on Roll off Ship)이다. 여닫을 수 있는 경사형 출입구를 통해 화물차 등이 아래쪽 화물칸에 진입하는 방식으로 화물을 선적한다. 에스토니아호는 1만5000t급으로 세월호(6825t)보다 배 이상 컸다.
발트해의 기상 상태가 매우 나쁘다는 것은 예보돼 있었다. 사고 당시 파고가 6m까지 일었다. 그러나 화물칸에 실린 차량들 가운데 제대로 고박(고정 결박)된 차량은 거의 없었다. 겨우 ‘사이드브레이크’만 걸려 있었고, 일부 화물차는 바퀴가 밀리는 것을 막는 쐐기만 덧대어졌다. 고박이 된 트레일러도 고작 네 군데만 묶였다. 배는 출항 때 이미 1~2도 기울어진 상태였다.
9월28일 새벽 ‘격벽’이 없어 뻥 뚫린 화물칸이 침수되면서 선체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쿵’ 소리와 함께 기울기 시작해 빙그르르 돌다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도 세월호와 같다. 에스토니아호도 세월호처럼 ‘탈출 방송’이 늦어 인명 피해를 키웠다. 항해사들은 선원들이 침수 사실을 발견하고 21분이 지난 뒤에야 승객들에게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을 내보냈다. 항해사들은 승객들의 탈출을 돕는 대신 선원들에게 곧바로 탈출을 지시한다. 세월호처럼 이 배에서도 구명선이 내려지지 않았다. 에스토니아호 생존자 137명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승무원이었다. 세월호 역시 선장과 항해사 등 15명이 사고 초기에 구조돼 승객들의 생존율보다 월등히 높았다.
스웨덴 정부는 3개월 시도 끝에 인양을 포기했고, 대다수 희생자는 차가운 발트해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했다. 스톡홀름/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에스토니아호 사고 이후 개발된 최신 선박 안전 기술이 적용된 여객선 그레이스호가 스톡홀름 항구를 떠나고 있다.
에스토니아호는 인양되지 못했고 800여명의 주검도 찾지 못했다. 에스토니아호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에는 ‘그들의 이름과 운명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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