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스토리]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 아흔 네 번째 생신
16살에 비단 공장에 돈 벌러 가는 줄 알고 끌려가…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 아흔 네 번째 생신
16살에 비단 공장에 돈 벌러 가는 줄 알고 끌려가…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생신 축하합니다!”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인 14일 오전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94)가 살고 계신 전남 해남군 황산면 자택으로 각양각색 사람 나비들이 날아든다. 이날은 공 할머니의 아흔 네 번째 생신. 할머니의 가족만큼이나 이 날을 기뻐하는 이들은 지난해부터 매주 할머니가 계신 곳(병원이든 댁이든)으로 날아드는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 나비’ 회원들이다. 매주 수요일 할머니를 찾아온다지만 이는 공식적인 일정이고, 사실은 그 외에도 비공식 방문이 더 잦다. 날씨가 좋아서, 꽃이 피어서, 때로는 마음이 울적하고 또 그냥 할머니가 생각나서 이들은 마치 외할머니 댁에 찾아오는 손자들 마냥 할머니 댁 문턱을 넘는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막 걸음마를 시작한 꼬맹이부터 쉰 훌쩍 넘은 중년까지 나이는 제각각이나 할머니 앞에서 저절로 지어지는 아이 같은 표정은 꼭 닮았다.
지역 생협 조합원과 종교인, 시민들로 구성된 이들이 모임의 꼴을 갖추게 된 계기는 지난해 여름, 할머니가 노환으로 크게 앓으시며 병원에 입원하신 때부터다. ‘다 함께 모여서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해남 나비의 원년 회원인 이명숙 한울남도아이쿱생협 이사는 ‘할머니의 상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역사의 아픔이라는 생각에 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그 처음을 돌아본다. 하지만 머리로 시작한 일은 그 사이 뜨거운 가슴으로 이어졌다. 이 사람들, 마치 내 아이의 걸음마를 기록하듯 투병 후 처음으로 발을 딛고 일어서는 할머니의 모습에 환호했고, 달콤한 포도를 나눠 먹으며 함께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다 떨다 다시금 할머니의 아픔이 문득문득 묻어날 때 같이 눈물 흘리고, 할머니가 봐주시는 손금 풀이에 깔깔 웃으며 다시 마음을 다독였다.
“비단공장 돈 벌러 가는 줄 알았제.”
1920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공점엽 할머니는 강단 있는 소녀였다. 가난한 살림 때문이었을까. 총각 있는 집안에서는 혼삿말이 안 들리고 자식 없는 집안에서 첩으로 들이자는 제안만 들려왔다. 하지만 ‘굶어 죽으면 굶어 죽지 그런 노릇 안 한다’고 버텼고, 혼사를 추진하던 어른들도 두 손을 들었다. 조금 더 기다려 좋은 곳 찾아 결혼시킨다고 부모님이 마음을 바꾸시던 그 즈음, 뜬금없이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차려입은 신사들이 찾아왔단다. 일본 가서 비단공장에 취직하면 겁나게 돈도 잘 벌고 편하고 좋을 거라고, 부모한테 부쳐주면 논도 밭도 살 수 있다고.
“암만해도 내가 자신이 없어 ‘그렇게 못 하것는디라우’ 한께, 아부지가 소리지르더만. ‘남도 다 간닥한께 함께 가 기술도 배우고 돈벌이도 해야제 언제까지 집구석에 있을라냐’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이명숙 이사가 되묻는다.
“아부지 밉지 않아요 할머니?”
아흔네 해 켜켜이 고운 주름 쌓인 할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려서 가 고생할 띠넌 밉기도 혔는데, 아부지도 몰랐응께 거그가 그런 덴 줄.”
그렇게 떠난 길을 돌아오기가 그리도 멀고 험할 줄 누구도 몰랐다. 돈 벌러 집을 떠난 열여섯 살 소녀는 일본이 아닌 평양에 도착했다. 처녀들이 무척 많았지만 누구 하나 공장을 보여주지도, 기술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남자들이 오면 그 각시들을 이리 저리 데리고 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속으로, 느낌으로 깨달았다 한다. 어찌할 수 없음을 직감한 할머니는 “차라리 나 좀 (한국 사람이 없는) 먼 디로 보내주라”고 부탁했고 소개소 주인은 할머니를 중국 해성으로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차마 글 몇 줄로 옮길 수 없는 그 고통을 할머니는 문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아냈다. 이성과 정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열여섯 소녀는 중국 해성에서 처음 손님을 일곱이나 받았다. 군인들이 무더기로 외출 나올 일요일이 되면 미리부터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차라리 첩으로라도 갔으믄 요런 험한 꼴은 안 당했을 거인디, 최고 많을 때 하루에 군인덜이 나헌티만 스물일곱까정 오네. 워매 참말로 징한 거.”
죽을 결심으로 쥐약을 구했지만 사방 감시 속에 죽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쥐약을 먹고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발견한 이들이 병원으로 실어가 기어이 살렸다. 살아있음이 원망스럽던 그 시절.
"워메워메 나 고생 원없이 혔네 그려도 안 죽고 살아 논게 이렇게 좋은 세상 반갑고 좋고 기쁘고."
지난달 30일 사람들이 다시 할머니 댁을 찾았다. 공점엽 할머니도 함박웃음으로 이들을 맞이한다.
“이렇게 오신게 워치게 반가운가~ 놀러를 가도 못하고(못 걸응께) 사람이 귀해"
좁다란 툇마루에 벌렁 누워 까르르 웃어대는 어린 아이와 할머니 입에 연신 먹을거리를 넣어드리는 이들. 지역 아동센터 초등학생들은 노래도 부르고 지난주 정성껏 만들어온 목걸이와 팔찌도 걸어드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이어지는 할머니의 답가가 구수한 가락으로 울려 퍼진다. 이날 할머니의 노래를 듣는 직접 들은 이 사람들의 감동은 남다르다. 지난해 여름, 광주와 목포의 큰 병원으로 할머니를 문병 다니던 때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던 일상인가 싶어서다. 지난해 10월 7일 해남 나비는 엷은 분홍색 꽃벽지로 할머니 방을 도배하고 장판을 바꿨다. 대장 염증 등 지병이 거듭 재발하며 병원에서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던 시기에 이들은 할머니의 쾌유를 믿고 빌며 이 방을 새 단장했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할머니는 올해 건강한 모습으로 이곳에서 아흔네 번 째 생신 상을 받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는 말씀 중간 중간 사람들에게 주문 외우듯이 복을 빌어주신다.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게 잘 사시고, 건강하시고, 우리 손자 자손 만 대까지 환영받고 잘 사시고.”
그리고 손을 맞잡아 눈 맞추는 사람들에게 할머니의 말씀이 가 닿는다. 나직하나 힘 있는 그 목소리.
"내 본마음, 천심 하나가 변함이 없응게 남덜 말 안 듣고 살았제. 좋기도 하고 궂기도 하고 세상사가 그라제. 독한 마음 쓰지 말고, 나쁜 마음 쓰덜 말고 그럼 복이 와."
다시 사람들을 보내며 동그마니 앉아 두 손 곱게 모은 채 복을 빌어주시는 할머니의 모습. 마치 작은 불상 같다. 해남/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4일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의 아흔 네 번째 생신을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 나비’ 회원들이 축하해주고 있다. 이정아 기자
14일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의 아흔 네 번째 생신을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 나비’ 회원들이 축하해주고 있다. 이정아 기자
14일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의 아흔 네 번째 생신을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 나비’ 회원들이 축하해주고 있다.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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