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 교육부의 26일 토론회 뉴스를 듣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이번 정책이 대일 외교에서 우리나라의 국익을 근본부터 훼손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최악의 관계에 빠진 한-일 양국이 맞서고 있는 가장 치열한 전선은 다름 아닌 ‘위안부 문제’로 대표되는 역사 문제다. 그럼, 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기술이 지속적으로 후퇴해 왔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교과서 운동을 이끌고 있는 ‘아이들과 교과서 전국네트워크21’의 집계를 보면, 1997년판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엔 7종 모두 위안부 관련 기술이 있었지만, 2002년판에는 2종, 2006년판에는 1종으로 줄었다. 2012년 12월 집권한 아베 정권은 교과서 집필 기준이 되는 ‘학습지도요령’과 ‘검정기준’을 강화해 교과서에 대한 국가 통제를 노골화하고 있다. ‘자학사관’에 찌든 현행 역사 교과서들을 싹 바꾸겠다고 별러온 일본 우익들의 숙원이 현실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베 정권도 손을 대지 않는 정책이 있다. 바로 지금 박근혜 정권이 추진하려는 ‘국정’ 교과서 제도다.
일본은 지난 군국주의 시절 의무교육이던 초등학교의 모든 교과서를 국정으로 사용했다. 정부가 전국의 모든 아이들을 똑같은 교과서로 가르쳐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든 뒤 전쟁터에 내보내 일왕을 위해 아낌없이 죽도록 만든 것이다.
패전 뒤인 1948년 일본은 국가가 교과서로 국민의 정신을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성에 기초해 기존의 교과서 국정제를 폐지하고 검정제를 시행했다. 이후에도 검정제를 통해 교과서를 통제하려는 국가의 집요한 시도는 이어지지만 1962년 시작돼 무려 32년 동안 이어진 이른바 ‘이에나가 재판’ 등을 통해 국가가 교과서로 국민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결국 아베 정권도 검정제의 틀은 유지하며 간접적인 방식으로 교과서 통제 강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국 정부와 언론은 아베 정권의 교육정책과 교과서 우경화에 대해 “아이들에게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가르치기보다는 정부의 견해를 주입하겠다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비판해 왔다. 이젠 한국 정부가 ‘엉터리’ 교학사 역사 교과서 채택률이 사실상 제로를 기록하자 아이들의 교육 내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하겠다며 국정화 카드를 빼들었다. 아베 정권보다 더 대담한 짓을 하려는 것이다.
피해자라 해도 스스로 떳떳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 일본은 앞으로 한국 정부의 비판에 어떻게 반응할까. 국제사회의 여론은 국정 교과서로 돌아간 한국과 그렇지 않은 일본의 역사 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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