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새 분위기가 급변했다. 현 정부에서 금기어로 여겨지던 ‘재벌 총수 사면·가석방’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가석방 가능성을 암시했다는 첫 보도가 나온 뒤 재계와 보수언론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확대재생산한 결과다. 황 장관의 진의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재벌 총수 사면·가석방을 위한 ‘군불 때기’가 효과를 내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일보>가 24일 “구속된 기업총수 경제살리기 헌신 땐 다시 기회 줄 수도”라는 제목으로 황 장관 인터뷰를 내보내면서 ‘가석방 검토론’이 촉발됐다.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법무부는 이날 오후 “원론적 얘기”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총수가 수감중인 기업들을 중심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황 장관이 여론을 떠보려고 ‘풍선’을 띄웠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파장이 커졌다. 에스케이그룹 관계자는 “기업인이라고 특혜를 받을 이유는 없지만, 법적 요건이 되는데 배제돼서도 안 된다. 경제 살리기라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기회를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징역 4년을 선고받고 1년9개월째 수감돼 있는 최태원(54) 회장이 수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다. 씨제이그룹 관계자도 “기류에 변화가 있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선처해준다면 정부의 경제 살리기 기조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했다. 이재현(54) 씨제이 회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지병으로 구속집행정지 상태에 있다. 이호진(52) 전 태광그룹 회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4년6월형을 선고받았는데 수술 때문에 보석으로 풀려나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까지 거들고 나섰다. 그는 25일 기자들과 만나 “황 장관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대선 당시 대통령 특별사면권을 엄격히 제한하겠다고 공약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국내에 없는 기회를 활용해 장관들이 총대를 멨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하지만 법무부는 원칙을 밝혔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법무부 고위 관계자는 25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준비하는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형기의 3분의 1이 지난 최태원 회장이 가석방 대상으로 거론되는 데 대해 “형기의 80%를 채운 뒤 가석방해도 ‘말’이 나온다”고 했다.
황 장관이 같은 인터뷰에서 “가석방 제도가 가진 자,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악용됐던 측면이 있다”며, 지난해 7월 형기를 80% 채운 박연차(69) 전 태광실업 회장의 가석방이 불허된 점을 언급한 것도 진의를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황 장관 발언은 원론적 얘기로 보이는데 보수언론들이 덩치를 키웠다. 장관의 계획적 ‘판 깔기’라기보다 기득권층 이해를 반영하는 보수언론의 ‘판 깔기’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깜짝 특별사면’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만은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8·15 특별사면 때 “내 임기 중 일어난 사회 지도층의 권력형 부정과 불법에 대해선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듬해 12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필요하다며 이건희(72) 삼성전자 회장 단 한 사람을 위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이런 가운데 검찰은 또 다른 재벌 수사를 개시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임관혁)는 박삼구(69)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횡령 의혹을 포착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금호아시아나가 계열사 간에 납품 단가를 부풀려 거래하며 비자금을 만든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철 최익림 정세라, 세종/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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