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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오사카서 찾은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의 뿌리

등록 2014-09-26 19:54수정 2015-06-29 14:20

[토요판] 커버스토리 / 범죄의 기원, 이순봉의 흔적을 찾아

오사카; 어떤 범죄의 기원
자이니치 이순봉 부녀의 치부와 파국
피살된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당시 67살)씨는 ‘동해상사’ 등을 운영하던 부유한 재일동포 이순봉(사망 당시 87살)씨와 딸 초지(71)씨의 재산관리인이었다. 송씨는 2000년대 소송을 통해 관리하던 이순봉씨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획득했다. 이순봉씨가 2004년 병으로 숨진 뒤 재산을 관리하던 초지씨는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27억엔(한화 약 259억원)의 상속세를 탈세한 사실이 드러나 2008년 3월 체포됐다. 위 사진은 당시 일본 방송이 보도한 초지씨의 체포 당시 모습이다. 이후 초지씨는 2012년까지 형사재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초지씨가 한국의 부동산을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송씨는 갑자기 거부가 됐고 그 부가 뇌물 범죄를 낳았다. 범죄를 낳은 부의 뿌리를 좇았다. 지금은 송씨 가족의 것이 된 부를 만든 이순봉씨와 딸 초지씨의 삶을 오사카에서 추적했다.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 재판 쟁점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소설가·저널리스트 톰 울프의 표현을 빌리면, 사건의 ‘정서적 실체’(emotional reality)를 보여주고 싶었다. 법률가들의 ‘실체적 진실’이 멈춘 곳 너머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오사카/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교도통신


지난 5일 밤 9시께 오사카시 이쿠노구를 관통하는 히라노강 근처 주택가 야경. 강의 오른편이 모모다니이고 왼편이 나카가와니시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천변 주변에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재일한국인이 밀집해 사는 이 지역을 이카이노라 부른다. 쓰루하시, 모모다니, 이마자토를 합쳐 부르는 옛 지명이다.
지난 5일 밤 9시께 오사카시 이쿠노구를 관통하는 히라노강 근처 주택가 야경. 강의 오른편이 모모다니이고 왼편이 나카가와니시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천변 주변에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재일한국인이 밀집해 사는 이 지역을 이카이노라 부른다. 쓰루하시, 모모다니, 이마자토를 합쳐 부르는 옛 지명이다.

차별받은 자이니치, 악착같이 벌어 현금 60억엔 숨겼지만…

▶ 김형식(44)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 첫 공판이 다음달 24일 국민참여재판의 형식으로 열린다. 살해된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숨질 당시 67살)씨는 본디 재일동포의 한국 부동산 재산관리인에 불과했다. 이상하고 복잡한 소송을 통해, 갑자기 부자가 됐다. 느닷없는 부는 죄를 낳았다. 살해되지 않았다면 송씨는 뇌물공여죄 수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 밖에도 전과가 많았다. 부가 형성되고 이전되며 결국 죄를 낳는 긴 이야기의 끝에 젊은 야당 정치인이 있다. 곧 시작될 미래의 재판을 앞두고 일부러 과거로 갔다. 부와 죄와 인생이 만나고 얽히는 곳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이러니가 있었다.

전철 문이 열리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훅, 얼굴을 덮었다. 9월4일 오전 11시의 오사카 공기는 뜨겁다. 긴테쓰 오사카선 쓰루하시(鶴橋)역도 그렇다. 식당에서 나눠주는 뜨겁게 데운 물수건을 얼굴에 댄 것 같은, 축축한 열기가 느껴진다. 일본 기상청 자료를 보면, 이날 오사카의 낮 최고기온은 28.1℃, 습도는 81%였다.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출구를 나오면 이번엔 습기에 연기가 더해진다. 다른 일본의 전철역처럼, 쓰루하시는 제이아르(JR)선, 긴테쓰 오사카선, 센니치마에에선 등 3개의 전철 라인이 교차한다. 출구가 많다. 동쪽 출구(히가시데구치)로 나온다고 바로 길가가 보이는 게 아니다.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상점가에 어리둥절한 초행자는 길을 잃기 쉽다. 그가 자이니치나 쓰루하시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맛집을 찾아 관광온 한국인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목청 높여 호객행위를 하는 종업원의 머리 뒤로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하다. 한국의 일간베스트 저장소와 같은 인터넷 극우모임 ‘재특회’가 최근까지 이 근처에서 재일한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혐한시위)를 한 사건이 벌어진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燒き肉’(야키니쿠)라고 쓰인 일본어 간판만 아니라면, 한국의 삼겹살집 앞을 지난다고 착각하기 쉽다. 상점가 지붕 밑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고 든다. 일본은 불교문화 때문에 19세기 말 메이지유신 이후에야 육식의 역사가 시작됐다. 연기가 나도록 고기를 구워 먹는 문화는 역시 일본적이지 않다. 고깃집을 끼고 계속 걸으면 좁은 골목 양옆으로 한국 음식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다. 부침개 앞에 꽂힌 ‘ジジミ’(지지미) 같은 가타카나 팻말을 지나치면 드디어 센니치마에로가 나온다.

쓰루하시에서 자이니치 역사를 떠올리다

이자카야(居酒屋) 간판부터 온갖 상점 간판이 늘어선 센니치마에로를 따라 동쪽으로 걷는다. 여러 상점 간판 사이에 간혹 가타카나로 ‘ホルモン’(호루몬)이라 쓰인 간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관광객은 걸음이 더 느려질 수 있다. 소·돼지 곱창을 파는 식당이다. 한국인 식당이 많다. 호르몬과 상관없다. ‘던지다’라는 뜻의 일본어 ‘호루’(放る·抛る)와 ‘것’이라는 뜻의 대명사 ‘모노’(もの)를 합쳐 가타카나로 표기한 단어다. 일본인은 내장을 먹지 않았다. 일제 때 쓰루하시에 모여 살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내다 버린 내장을 싸게 사다 먹었다.

사거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다. 대부분 4층을 넘지 않는 낮은 스카이라인의 건물 사이로 걷다 보면 ‘韓流’(한류)라는 간판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돌 그룹 ‘빅뱅’이나 ‘엑소’, ‘소녀시대’의 대형 앨범 사진이 이런 가게의 입구에 크게 걸려 있다.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거나 음악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곧이어 미유키도리 상점가에 진입한다. 여기서부터 500m 길이 골목에 한류 상품 가게와 한국 식품점 등이 즐비하다. 한국어 대화가 많이 들린다. 자이니치(재일)의 역사를 조금 아는 한국인이라면 이 상점가를 보고 “조센이치바”(조선시장·朝鮮市場)라고 부를 것이고, 역사보다 맛집에 관심 많은 관광객이라면 “코리아타운”이라고 말할 것이다. 재일동포 소설가 양석일의 <피와 뼈>를 읽은 귀밝은 사람은 1973년 이후 공식 명칭에서 사라진 ‘이카이노’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쿠노구 재일한인의 밀집지역이던 쓰루하시, 모모다니(桃谷), 이마자토(今里)를 합쳐 부르는 옛 지명이다. 무엇이라 부르든 1920년대부터 한국인들이 모여 살아왔던 이쿠노구의 공간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피살된 서울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당시 67)씨에게 한국의 부동산 관리를 맡겼던 재일동포 이순봉(사망 당시 87)씨와 딸 초지(71)씨의 집과 다수의 사무실도 이쿠노구에 있다. 송씨의 부의 뿌리가 여기 뻗어 있다.

이순봉씨의 삶에 대한 기록은 죽은 지 오래된 동물의 뼈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한겨레>가 단독으로 입수한 오사카지방재판소(오사카지방법원)의 초지씨에 대한 형사재판 판결문에 이순봉씨 인생의 골격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이순봉씨는 1917년 3월27일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순봉씨는 숨진 재력가 송씨의 부인 이아무개씨의 아버지와 7촌 재당숙 사이였다. 송씨의 부인과 8촌뻘이다. 이순봉씨는 “열다섯살 때쯤 일본으로 갔다”고 송씨 부인의 친척은 지난 11일 <한겨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기억했다. 대략 1930년대 초로 추정된다. 1920~30년대에 재일한국인이 급증했다. 1920년에 재일한국인은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1930년 10월 오사카부의 한국인(당시 조선인)은 9만6943명으로 늘었다. 압도적 다수는 제주 출신이었다. 1923년 오사카와 제주를 오가는 ‘기미가요마루’가 취항했다. 가난한 제주의 억센 남자들이 오사카에 왔다. 쓰루하시 자이니치의 60년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 <피와 뼈>의 주인공 김준평이 어묵공장 노동자로 일한 것처럼, 대부분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했다. 그다음으로 서울과 경상도 출신이 많았다. “(재일동포) 모두가 서울과 경상도, 제주도”(김길호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라고 표현될 정도였다. 이순봉씨 같은 전라도 출신은 적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차별과 비싼 집세를 피해 도심 변두리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1920년대부터 한국인 모여살던
오사카 이쿠노구의 역사적 공간
피살된 강서구 재력가 송씨에게
한국의 부동산 관리를 맡겼던
이순봉·이초지씨 집도 이곳이다

1917년 장성서 태어난 이순봉씨
1930년대 일본 건너와 돈 모으다
1970년 8개 부동산·대금업 회사
설립하고 한국에 있는 땅을 매입
송씨 죽은 빌딩 터도 그즈음 사

돈 이야기만 나오면 표변하던 ‘미나미의 호랑이’

이순봉씨의 초기 일본 생활은 흐릿하다. 학교는 다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송씨의 친척들도 잘 모른다. “한국말도 잘하고 일본말도 잘”(송씨 사문서위조 혐의 형사재판 기록)하는 것으로 묘사된 오아무개씨와 일본에서 결혼한 시점도 분명치 않다. 고학으로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이순봉씨의 지인 사이에 알려져 있다. <한겨레>는 이순봉씨가 졸업생인지, 전공학과는 무엇인지 와세다대학에 이메일로 질의했다. 와세다대학 홍보실은 지난 18일 답변 메일에서 “교우회 명부를 확인해보았으나 이순봉씨의 이름은 없다”며 “다만 졸업생 이름이 전부 교우회 명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조건을 달았다. 이순봉씨와 1960년대부터 알고 지냈던 지인은 송씨의 사문서위조 혐의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이순봉은 밀항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했다기보다 나중에 돈이 많아지자 명예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부인 오씨 이야기로는 ‘결혼했을 때 대학교도 나왔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고 첫날밤에 고백을 했다. 모든 것을 속은 상태에서 시작을 했는데 그래도 자리를 잡아서 안정이 되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지난 3~5일 이쿠노구의 코리아타운을 찾았다. 한류붐 이후 이곳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 한국 가수와 배우들의 사진 등을 파는 한류숍이 많다. ‘조센이치바’라는 옛날 이름보다 요새 ‘코리아타운’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순봉씨와 초지씨의 사무실과 자택 모두 근처에 있다.
지난 3~5일 이쿠노구의 코리아타운을 찾았다. 한류붐 이후 이곳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 한국 가수와 배우들의 사진 등을 파는 한류숍이 많다. ‘조센이치바’라는 옛날 이름보다 요새 ‘코리아타운’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순봉씨와 초지씨의 사무실과 자택 모두 근처에 있다.
설령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더라도 이순봉씨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는 “재일 조선인은 일류 대학을 나와봤자 일자리가 전혀 없었다. 성한이의 주변에는 일류 대학을 나온 친구가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학 연구실에 남거나 부모를 도와 짐승의 머리와 내장을 조리하는 일을 하거나 다방 지배인이 되는 게 고작”(<피와 뼈> 3권-아비의 초상)이었던 사회였다.

이순봉씨는 국가기관이나 미군으로부터 재봉틀을 불하받아 중개하는 사업과 택시 영업 등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이후 부동산임대업과 대금업을 했다. 이순봉씨가 처음 회사를 세운 것은 1954년(쇼와 29년) 3월이다. 이후 1970년까지 이순봉씨는 모두 합쳐 8개의 부동산 및 대금업 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에 땅을 산 것도 이즈음이다. 이순봉씨는 1967년 부동산임대업을 목적으로 순봉산업을 설립했다. 송씨가 관리하다 나중에 소송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서울 종로구 장사동 토지 및 송씨가 살해된 빌딩 터를 포함한 강서구 내발산동 토지 4곳 등 총 5곳의 부동산을 순봉산업 명의로 구입한 것도 1967년이다. 37살에 자기 회사를 설립했고 53살에 8개의 회사를 거느린 부자가 된 것이다.

1950년대에 부동산업과 대금업으로 재일한국인이 돈을 번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독한 삶으로 추정된다. 5일 오사카 현지에서 만난 재일동포 2세 사업가는 “먼저 재일동포를 상대로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잘되면 일본인을 상대로 확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일본) 은행은 재일조선인이 론을 취급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피와 뼈> 3권) ‘론’이란 은행이 회사의 외상매출채권을 사서 대신 채무를 받는 것을 뜻한다. 일본 은행이 재일 한국인 사업가의 외상매출채권을 사주지 않아 할 수 없이 비싼 이자를 주고 재일동포 사채업자에게서 돈을 꾸는 장면이 소설에 묘사된다. 재일동포 사회는 정의로운 약자들의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던 것 같다. 착한 사람이 있었고 나쁜 사람이 있었으며, 순리에 따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독하고 악착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순봉씨는 후자에 속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악착같이 동포를 상대로 대금업을 했고 이자를 받았고 단기간에 돈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이순봉씨는 독하게 돈에 집착한 인물로 기억된다. 지난 5일 전철 이마자토역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재일동포 ㅅ(76)씨는 젊은 시절의 이순봉씨를 “리토라”라고 기억했다. 이순봉씨의 성씨 ‘리’와 ‘호랑이’라는 뜻의 일본어 ‘토라’(とら)를 붙인 별명이다. ‘리 호랑이’다. 그는 “1950년대 말에서 5·16(쿠데타)이 터지던 1961년까지 3~4년 동안 (이쿠노구) 모모다니에서 이순봉씨와 세 집 건너 이웃으로 지냈다”고 기억했다. 거칠고 힘든 시절로 그는 당시를 기억했다. 지금과 같은 공간이지만 당시 조센이치바에는 ‘빅뱅’도, 한류도 없었다. 대신 차별이 짓눌렀고 가난이 옥죄었다. 막걸리와 순대, 돼지고기는 음식 한류가 아니라 차별받는 식민지 출신자임을 드러내는 낙인 같은 입맛이었다. 당대의 자이니치들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ㅅ씨는 손가락을 관자놀이에서 턱까지 칼을 긋듯 그어내렸다. 칼자국이 많았다는 뜻이다. 폭력단에 들어간 자이니치가 많았다고 그는 말했다.

<주간아사히>도 2008년 3월28일치 기사에서 이순봉이 ‘ミナミのとら’(미나미노토라), 곧 ‘미나미의 호랑이’로 불렸다고 보도했다. 미나미는 쓰루하시역과 가까운 난바역 근처의 오사카시 중심지역이다. 이순봉씨는 번화가 미나미에도 회사 사무실을 가졌다. <주간아사히> 보도를 종합하면, 이순봉씨는 180㎝의 장신에 몸집이 컸다. 돈은 많았는데 검소하고 수수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다만 “돈 이야기가 나오면 표변”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줄 경우 변제 기한을 조금이라도 넘기면 돈이 있는지 없는지 채무자에 묻지도 않고 곧장 담보 부동산을 압류했다.

재일한국인 이순봉·이초지 부녀가 갖고 있던 ‘순봉산업’ 명의의 땅을 관리하다가 마술처럼 이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해버린 송아무개씨의 복잡하고 이상한 재산 형성 과정을 커버스토리로 보도한 지난 8월2일치 <한겨레> 토요판 1면. 송씨는 지난 3월 자신의 빌딩에서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고, 살인 용의자 팽아무개(44)씨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살인을 교사했다고 진술했다.
재일한국인 이순봉·이초지 부녀가 갖고 있던 ‘순봉산업’ 명의의 땅을 관리하다가 마술처럼 이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해버린 송아무개씨의 복잡하고 이상한 재산 형성 과정을 커버스토리로 보도한 지난 8월2일치 <한겨레> 토요판 1면. 송씨는 지난 3월 자신의 빌딩에서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고, 살인 용의자 팽아무개(44)씨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살인을 교사했다고 진술했다.

일본에서 쫓겨날까봐 한국의 부동산 구입?

송씨 및 송씨 부인 이씨와 1970년대부터 알고 지낸 복수의 친척들은 지난 11일 <한겨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순봉씨는 가끔 부동산 구입 상담을 하러 60년대에 한국에 들어왔다. 송씨 부인의 아버지가 주로 상담을 해줬다. 이순봉씨가 답례로 오사카로 그를 초대했다. ‘외식하자’며 나갔더니 우동 한그릇을 사줬다고 한다”고 전했다. 다만, 미나미의 호랑이도 차별이 무서웠던 것 같다.

송씨 부인의 친척들은 “이순봉씨는 자주 ‘언젠가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이) 쫓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에 부동산을 산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봉씨가 강서구에 땅을 산 이유에 대해 “이씨 집성촌을 만들고 싶다”고 전해 들었다고도 했다.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다만 1967년부터 오랫동안 이순봉씨는 몇차례 사기를 당할 뻔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한국의 부동산을 지켰다. 1996년 요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이순봉씨는 3남4녀를 뒀다. 아들 1명과 딸 2명은 2004년 전에 숨졌다. 장녀 초지씨가 재산을 관리했다.

본인은 못 배웠던 이순봉씨는 자녀 교육을 중시했던 것 같다. 장녀 초지씨는 대학을 졸업했다. 초지씨는 아버지 사업을 본격적으로 물려받기 전에는 가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아버지 이순봉씨의 사무를 도왔다. 피아노·다도 등을 가르치며 교습비를 받았지만 부족했다. 아버지한테 용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장남은 의사가 됐다. 가족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정월 등 한달에 한번 정도 모여서 이순봉씨의 자택 근처 중국 식당에서 회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순봉씨는 가족들에게 부동산 회사 등 자신이 소유한 법인의 경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동산 구입 여부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했다. 다만 장남은 가족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순봉씨의 처 오씨, 초지씨, 둘째 및 셋째 아들, 넷째 딸은 한국적이며 나머지 자녀들은 일본 국적을 가져 귀화한 점도 눈에 띈다.

이순봉과 딸 이초지는 왜
부동산이 다 송씨에게 갔는데도
정당한 대응을 하지 않았을까
탈세사건으로 수사·재판받느라
소유권 지킬 겨를 없었을 것

이순봉은 2004년 숨질 당시
약 60억엔 현금을 골판지 상자에
담아 유산으로 남겼지만
2008년 검찰 등은 탈세혐의로
자택 압수하고 딸 이초지 체포

2000년부터 이순봉씨와 숨진 재력가 송씨의 삶이 급격히 얽히기 시작했다. 이순봉씨는 여러번 사기당할 뻔한 끝에 8촌 친척인 송씨의 부인 이씨를 1995년 부동산 재산관리인으로 고용했다. 송씨가 부인을 도왔다. 그러다 갑자기 송씨가 이초지씨로부터 부동산을 샀다며 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제기했다. 무변론으로 송씨가 승소했다. 2004년 송씨는 위임장과 매매계약서를 위조했다는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발당했다. 한국 검찰은 오사카부경찰본부에 사법공조를 요청했다. 오사카부경찰본부 형사부가 한국 외교부의 요청을 받고 2005년 딸 초지씨를 찾아가 이순봉씨가 송씨에게 부동산을 정말 증여했느냐고 물었다. 송씨가 법정에 제출한 위임장 사본도 보여줬다. 이에 대해 초지씨는 “(송씨가 제출한) 모든 매매계약서, 영수증, 위임장을 확인했으나 전혀 본 적이 없는 서면뿐이며 나나 아버지가 작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오사카경찰은 이와 같은 사정청취보고서를 한국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은 2006년 “송씨가 문서를 위조했다”며 기소했고 2009년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송씨에게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징역 8년, 송씨 부인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판사 출신인 법무법인 세종의 이홍철 변호사가 송씨의 변호를 맡았다. 그런데 유죄가 무죄로 뒤집어졌다. 서울고법 2010년 6월 2심 판결을 통해 송씨는 부자가 됐다. 당시 쟁점은 송씨가 법정에 제출한 매매계약서, 위임장 등이 위조됐는지 여부였다. 1심 재판부가 ‘위조’라고 판단한 사실들을 2심 재판부는 모두 뒤집었다. 1심 재판부는 위임장에 기재된 부동산의 면적이 잘못 적힌 것을 근거로 위조됐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달리 기재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며 송씨가 문서를 위조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쟁점마다 이처럼 판단이 정반대였다.

민단도 모르고 총련도 모르는 ‘호랑이의 흔적’

2심 재판부가 판결의 근거로 삼은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순봉씨와 초지씨의 ‘태도’였다. 당시 강형주(사법연수원 13기)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백아무개씨가 2002년 9월26일경 일본에 가 (이순봉씨의 부인) 오아무개씨와 초지씨에게 이 사건 부동산의 소유권이 송씨에게 이전된 사실을 알리고 2002년 11월경에는 이순봉씨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으며 그 후 이아무개씨 등도 일본에 가 이순봉씨의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음에도 이전에 이아무개(과거 재산관리인)의 배신행위에 대해 즉각 고소를 하고 한국에 들어와 검찰에서 진술까지 했던 이순봉씨가 사망하기까지 이 사건 부동산을 회복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나 문책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강 부장판사는 “공시지가로만 300억원이 넘는 이 사건 부동산을 송씨 등에 의해 빼앗긴 사람들의 반응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강 부장판사는 인천지법원장을 지내다 최근 법원행정처 차장에 임명됐다.

<한겨레>가 만난 송씨 부인의 친척들은 “당시 초지씨가 일본에서 다른 형사사건으로 대응할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송씨의 위임장 및 매매계약서 위조 혐의가 1·2심에서 치열하게 다퉈지던 2008~2013년 초지씨는 일본에서 탈세 사건으로 검찰 수사 및 법원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이순봉씨가 2004년 숨질 당시 모두 8개의 회사와 약 60억엔의 골판지 상자에 담긴 현금을 유산으로 넘겼다. 오사카 검찰이 어떻게 이를 인지했는지는 보도나 판결문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2008년 3월 오사카 검찰과 국세국은 탈세 혐의로 모모다니의 초지씨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초지씨를 체포했다. <아사히신문> <교도통신> 등 일본의 신문·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됐다. “사상 최고액의 탈세” “헤이세이의 탈세왕” 등의 일본 뉴스가 잇따랐다. 한국에서는 당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오사카지방재판소 판결문을 종합하면, 이순봉씨가 요통으로 입원한 1996년 이후 초지씨가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실질적으로 재산을 관리했다. 이순봉씨는 자산의 대부분을 1998년까지 한국의 금융기관에 가명계좌로 숨겨 보관했다. 1997년 금융위기가 닥쳤다. 이순봉씨는 이후 한국과 일본의 금융기관에 보유하던 예금계좌를 조금씩 해약해 모두 현금화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돈을 모두 골판지 상자에 넣어 초지씨의 모모다니 자택 차고에 보관했다. 2010년 오사카검찰은 초지씨를 탈세 혐의로 기소했고 초지씨는 2011년 5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6개월에 벌금 5억엔을 선고받았다. 초지씨는 항소했으나 2012년 9월 2심에서도 유죄가 인정됐다. 초지씨가 검찰 수사를 받고 1·2심 유죄 판결을 받던 2008~2012년은 송씨의 사문서위조 혐의 재판 1심·2심·파기환송심 등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 송씨 부인의 친척들은 “초지씨가 당시 탈세 혐의 수사를 받고 있어 한국의 부동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유권을 지키지 못했다. 한국의 부동산을 소유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상속세 탈세액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주장했다.

‘미나미의 호랑이’의 흔적은 9월3~5일 오사카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많은 재일한국인들이 종종 자존을 위해 일본 정부와 싸웠고 때로 이념 때문에 서로 다퉜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재일조선인연맹’이 만들어졌으나 남과 북이 갈린 것처럼 민단과 총련으로 갈렸다. 6·25 전쟁 때 재일한국인들도 입장이 갈렸다. 그러나 이순봉씨는 정치 활동은 물론 조선인 모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4일 쓰루하시 근처의 오사카민단서지부 사무실을 찾아 이순봉씨 및 그의 자녀들의 연락처를 물었으나 현정웅 지부장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라고 답했다. 그는 재일동포 2세로 오사카에서 오래 살았다. 오사카 출신으로 재일동포 3세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사카부본부의 간부에게 이순봉씨에 대해 문의했으나 그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답했다. 나가호리바시역 근처에 위치한 오사카한국상공회의소에 방문해 장철남 사무국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장 사무국장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7년 오사카부에 사는 재일한국인은 13만6000여명이다. 민단과 총련의 이념적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두 사무실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서로 역사와 삶을 공유하는 이 커뮤니티의 누구도 ‘이순봉’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3일 오전 11시께 초지씨가 살던 이쿠노구 나카가와니시의 자택을 찾아갔으나 우편물만 쌓여 있다. 이웃집 일본인 거주자에게 행방을 물었으나 “(탈세)수사와 재판을 받은 2년 전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답했다. 오사카검찰과 국세국이 2008년 합동으로 압수수색했던 ‘동해상사’ 사무실은 벽이 헐려 외부 공사 중이었다. 공사하는 인부들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누구도 이순봉씨를 알지 못했다. 오사카지방법원 판결문, 한국 법원의 송씨 판결문, 주변 취재 등을 통해 확보한 모든 주소지에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거나 “이순봉을 모른다”는 답을 들었다. 2004년 사법공조 당시 이순봉씨와 초지씨를 직접 조사했던 오사카경찰청을 찾아 추가 설명과 자료를 요청했으나 “개인정보라 답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초지씨는 2심에서 항소가 기각돼 2012년 9월 2년6개월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초지씨가 상고했는지, 아니면 포기하고 복역 중인지 명확치 않았다.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초지씨의 현 상태에 대해 문의했으나 “우리 쪽에서 답할 게 없다. 오사카검찰에 문의하라”고만 답했다. 초지씨가 상고심을 포기하고 형의 집행단계로 넘어갔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오사카지방검찰청에 초지씨가 현재 복역 중인지, 잔여 형기가 얼만지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고 답을 거절했다. 초지씨가 만약 상고를 포기했다면 2015년 3월까지 복역할 것으로 추정된다.

혐오하기엔 차별받았네, 옹호하기엔 지독했네

5일 밤 이쿠노구를 가로지르는 히라노강은 고요했다. 히라노강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이내 공간에 ‘미나미의 호랑이’의 모든 과거가 있었지만, 지금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차별사회에서 정치나 공동체 활동에 눈감고 부동산업과 대부업으로 오로지 돈만 번 한 자이니치가 형성한 부는, 집단적으로 차별받아온 가난한 호남 출신이었으나 범죄 전과가 많고 이상한 소송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사내에게 와서 죄를 낳았다. 차별이 뒤틀린 부를 낳았고, 왜곡된 부가 한국에서 죄를 낳았다. 이순봉씨는 마냥 혐오하기엔 부당한 차별에 견딘 삶을 살았고, 그저 옹호하기엔 지나치게 돈에 집착한 사내였다. ‘미나미의 호랑이’의 삶은 아이러니했다.

5일 밤 9시 반, 미유키도리를 빠져나오는 골목에 셔터가 내려진 한류 상품 가게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말인 6일 토요일엔 다시, 이곳을 ‘조센이치바’가 아니라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르는 젊은 맛집 관광객들로 거리가 북적거릴 것이었다. 다행히 재특회는 오지 않았다. 6일 오사카 최고기온은 32.6℃, 습도는 56%였다.

※참고문헌: 오사카지방재판소 이초지 탈세 판결문, <재일한인타운의 사회-공간적 재구성과 정체성의 정치: 오사카 이쿠노쿠를 사례로>(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회생활학과 임승연 석사논문), <피와 뼈> 1~3권(양석일 지음·김석희 옮김, 자유포럼), 김길호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제주문화·2006)

오사카/글·사진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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