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다음달 1일까지 전세계 97개국의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 등이 모이는 ‘세계헌법재판회의’ 3차 총회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다. 이를 계기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소산인 헌법재판소의 26년에 걸친 활동과 그에 대한 평가, 남은 과제 등을 세 차례 짚어본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1992년 12월24일. 헌법재판소는 형사소송법 제331조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형사재판을 받던 구속 피고인이 무죄·선고유예·집행유예 등 실형이 아닌 판결을 선고받으면 검찰이 발부받은 구속영장은 효력을 잃게 되지만, 검사가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한다는 의견(구형)을 밝힌 경우엔 영장의 효력이 유지된다는 조항이었다. 구속돼 재판을 받은 피고인이 1·2심에서 거듭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검사의 구형량에 따라 영장 만기일까지 구치소에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는 뜻이다.
당시 헌재는 해당 조항이 법관의 판단에 따라서만 구속할 수 있다는 영장주의에 어긋나는 위헌 법률이라고 판단했고, 법규정은 효력을 잃었다. 당연스럽게 여겨지던 형사사법 관행을 일거에 바꾼 결정이었지만, 헌재의 초창기는 험난함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정말 단칸방 신세였다. 공간이 모자라 장관급 재판관들이 방 한칸에 책상을 맞대고 모여 있었고, 재판정 같은 건 엄두도 못 냈다.”
헌재 관계자는 당시를 “맨땅에 헤딩하던 때”라고 평가했다. 1988년 출범 당시 헌재 직원은 운전기사부터 재판관까지 다 더해도 145명에 불과했고, 한해 예산이라고 해봐야 4억4800만원이 전부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헌법재판의 선례가 없다는 점이었다. 헌재의 전신인 헌법위원회는 1972년 유신헌법에 의해 출범된 뒤부터 헌재가 만들어진 1988년까지 16년 동안 단 한건의 위헌심판도 심리하지 못했다. 위헌심판권을 가진 대법원이 단 한번도 위헌심판을 제기하지 않은 탓이다. 군부독재에 맞선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인 직선제 개헌(9차 개헌)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는,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가진 것도, 물려받을 유산도 한푼 없는 천애의 고아와도 같았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헌재는 국민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군부독재 시절 만들어진 갖은 악법들이 헌재엔 성장의 자양분이 됐다. 정부·여당의 추천을 받은 재판관이 많은 만큼 ‘변화’에 소극적인 경우도 많았지만, 1기 재판관(임기 6년) 시절 헌재는 보호감호제의 근거 법률이었던 사회보호법, 변호인접견권을 무시한 행형법 등에 위헌 결정을 냈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과 위헌정당해산심판 사건 등을 심리하면서 헌재의 존재감은 극대화했다.
헌재의 한 연구관은 “참여정부 시절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 등 중요 사건을 결정하면서 국민이 헌재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천했던 헌법재판 노하우도 그 시기 급격히 축적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뿌리내린 헌법재판소 모델은 아시아권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몽골과 인도네시아 등은 헌법재판소를 만들면서 한국 헌재를 찾아 재판 과정과 심리 절차 등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2012년 아시아권 10개 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 창립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됐고, 올해 9월28일~10월1일에는 세계헌법재판회의 제3차 총회가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다. 발레리 조르킨 러시아 연방헌법재판소장, 안드레아스 포스쿨레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장 등 97개 나라 350여명의 헌법재판기관 관계자가 참석하는 이번 총회에서는 ‘헌법재판과 사회통합’을 주제로 한 5개 세션에서 세계적으로 심화하고 있는 사회갈등과 관련한 해법을 논의할 예정이다.
노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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