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 붕괴 참사 20주기 추모식이 열린 21일 오전 서울 성동구 성수대교 북단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유가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아니 이게 웬일이야.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21일 오전 서울 성수동 성수대교 붕괴참사 희생자 위령비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습니다. 그동안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지적받아왔던 위령비 주차장은 각 언론사 취재 차량으로 가득찼습니다. 20년동안 3~4가족이 단출하게 위령제를 치르던 유족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세월호 사건과 얼마전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까지 연이은 대형참사 때문에 언론의 관심이 몰린 탓입니다. 한 유족은 “그동안 관심도 없다가 20주기라서 이렇게 많이 온 거냐”며 되묻기도 하셨고요. 저도 그런 기자중에 하나였습니다.
위령제는 위령비 앞에 설치된 천막 아래에서 진행됐습니다. 유가족 10여명은 미리 설치해둔 의자에 앉아있었고, 차례대로 자신의 헌화와 참배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유가족들이 하나둘씩 눈물을 훔쳤고, 그때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앞에서 유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도 그런 사진과 영상이 더이상 이런 참사가 없게 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면 다행이겠다”는 생각만 애써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디 유가족들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가족이 10여명 있었는데, 방송사 카메라만 10대가 넘어보였습니다. 그에 비해 천막은 너무 비좁았습니다. 펜기자·사진기자들까지 뒤엉켜 천막 안이 북적대던 와중에 유가족이 위령비에 헌화하고 절하는 장면을 담으려던 한 방송사 카메라 기자가 위령비 뒷쪽을 밟고 올라선 겁니다. 한명이 오르니 다른 사람들도 밟게되고 제가 본 것만 3명의 카메라 기자가 위령비를 밟았습니다. 예전에 정치인들이 5·18 묘역을 참배하러 가 묘지 상석을 밟는 바람에 지탄받았던 일이 떠오르더군요.
우비를 입은 다른 카메라 기자는 한 유족이 참배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유족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빗물을 잔뜩 묻혀놓기도 했습니다. 한 펜기자는 한창 추도사를 듣고 있던 한 유족에게 다가가 ‘사연 취재’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유족들이 마련한 국화가 바닥에 나뒹굴었을 때입니다. 그 국화는 20년째 위령제 준비를 도맡아 하고 있는 유족회 총무 김학윤(48)씨가 지난 18일 서울 양재동 꽃시장을 둘러보며 직접 고른 국화였습니다.
위령제는 어찌보면 제사입니다. 집안 제사를 지내는데 누군가가 신줏단지를 밟거나, 제삿상에 정성스레 올린 제물을 망쳐놓은 꼴이 된겁니다. 이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본, 사고때 시아버지를 잃은 한 유족은 “이런 것 때문에 유족들이 위령제에 안 오고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내요. 우리 어머님도 지금 성당에서 미사하고 있어요. 10주기때 빼곤 지금까지 기자들이 거의 없었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유족과 희생자들에 대한 언론의 ‘무례함’은 20년전에도 마찬가지였나봅니다. 성수대교 참사 당시 무학여고 학생이었던 ㅂ씨는 “(사고가 난 뒤)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앉아 있는데 기자들이 말을 걸어서 정말 싫었어요.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바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수업시간에까지 그러는지 모르겠더라고요”라고 말했고, 당시 교사도 “언론의 과도한 취재경쟁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불편해 했던 게 기억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기자들의 취재윤리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매우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슬픔을 겪은 사람들을 취재하러 갈때는 덜컥 겁부터 납니다. 자칫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더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취재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특히 이번엔 20년이 지난 슬픔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날 기자들이 보여준 행동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이 아니었나 자문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언론사는 늘어나고 있지만,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반비례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명목으로 언론의 ‘무례(또는 실례)’는 그동안 어느정도 용인되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요? 바닥에 나뒹굴던 국화가 아직도 눈에 밟힙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1994년 10월21일 오전 7시38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등굣길 학생과 출근길 직장인을 태운 버스와 승용차가 한강으로 추락해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20년 전 참사의 현장과 다를 바가 없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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