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일치 합의가 아니면 인권헌장을 선포할 수 없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이하 시민위원회)의 표결로 통과된 ‘서울시민인권헌장’에 대해 일방적으로 선포 유보 결정을 내린 서울시의 조처에 시민들의 반발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인권헌장 제정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잇따라 서울시의 합의 방식에 대해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홍 교수는 지난달 30일 올린 페북 글에서 “지난 넉 달 동안 ‘민주주의가 어디 쉬운 일이냐’는 생각에 인내심을 발휘해 6차에 걸쳐 토론을 했다”며 “(예정에 없던) 성 소수자 반대 단체들만 모아 놓고 간담회와 공청회도 했다.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의견수렴 방법을 총동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실제로 최종 표결에서 압도적 다수가 찬성한 것은 처음에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분들이 모두 찬성 쪽에 표를 던졌기 때문”이라며 “그런데도 반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인권헌장을 선포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누가 좀 그럴듯한 설명을 해주시길 부탁합니다”라고 적었다.
홍 교수는 2일 올린 페이스북 글에서도 6차례에 걸친 토론 과정을 소개하며 “위대한 시민의 실험을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도대체 시민회의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산도 예산이지만, 이 과정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의 노력은 누가 보상할 겁니까? (박원순) 시장은 왜 아직도 이 엄중한 사태에 일언반구도 없는 겁니까?”라고 지적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도 페이스북에서 “서울시민 인권헌장 사태가 심각한 문제라고 보는 것은 서울시가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명시하는데 소극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다”라며 “시민들에게 인권헌장을 만들라고 해놓고, 서울시 공무원이 회의진행을 방해하고, ‘만장일치가 안 되면 헌장제정을 못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차별금지 사유에 ‘성 정체성 및 성적 지향’이란 걸 넣지 말아야 한다는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의 반인권적인 언행에 부담을 느낀 서울시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입장을 갖고 나왔다”며 “이미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된 그대로 열거하자고 했던 것인데도 상위법에 있는 이마저도 담을 수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꼬집었다.
한편 참여연대는 1일 성명 내어 “서울시가 시민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만장일치로 합의된 것만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은 헌장 제정을 위임한 애초 결정을 뒤집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장도 같은 날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인권헌장의) 이행 책임을 가진 서울시는 시민위원회가 내놓은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관련 링크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67072.html)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인권변호사 출신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해왔고 시민이 직접 참여해 만든 인권 규범이라는 점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인권헌장 제정이 사실상 무산됨에 따라 누리꾼의 관심은 박 시장에게 쏠리고 있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박 시장에게 잇따라 멘션을 보내며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트위터 사용자 ㅂ아무개씨는 “정당한 표결로 시민의원 과반수 이상이 찬성한 안을 서울시가 말을 바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다. 민주주의 합의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억지 논리이며 신뢰를 깨는 행위”라고 적었다.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사안이라 박 시장이 회피하고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인권헌장이 기득권 싸움이나 한두 차례의 생색내기 등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평등해야 할 인권’의 진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YeIrine), “박원순 시장님께 여쭙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보여진 시장님의 납득 가지 않는 태도에 관해,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시장님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walkingonmyway) 등의 의견이 박원순 시장 트위터로 접수됐다. ‘트위터 소통’을 내세우던 박원순 서울시장(@wonsoonpark)은 2일 오후까지 관련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앞서 지난달 28일 시민위원회는 4개월의 논의 끝에 50개 조항으로 구성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채택했다. 차별금지조항에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포함시킨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시민위원회가 표결로 통과시켰으나, 이날 서울시는 “만장일치 합의가 안 되면 인권헌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사실상 인권헌장 채택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이견 없이 합의됐던 45개 조항마저 발목이 잡히면서, 세계인권의 날인 12월10일 개최하기로 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식’도 무기한 연기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수진 기자
jjin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