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치던 중 여성 경기보조원(캐디)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9일 강원도 원주 춘천지법 원주지원에서 첫 재판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원주/연합뉴스
골프를 치던 중 여성 경기보조원(캐디)을 성추행한 혐의(강제추행)로 불구속 기소된 박희태(77) 전 국회의장에 대해 검찰이 9일 벌금형을 구형했다.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오후 춘천지법 원주지원 형사2단독 박병민 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서 검찰은 박 전 의장에게 벌금 300만원을 구형하고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 명령을 함께 부과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은 “사회지도층 인사로서 골프장 캐디를 강죄추행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해 고소가 취하된 점과 동종범죄 전력이 없는 점, 다른 유사 사례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했다”고 구형 이유를 밝혔다.
이날 공판에서 박 전 의장이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혀 별다른 법정 공방 없이 구형까지 이뤄졌다.
피해 여성의 변호인은 “국회의장 등을 지내면서 그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사회적 영향력이 커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줘야 할 피고인이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성추행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 피해자가 피고인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주변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고소를 취하하지는 않았는지 면밀하게 판단해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다.
박 전 의장은 최후 진술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겠다. 죄송하다. 깊이 반성하고 있다. 부디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간청했다. 박 전 의장 쪽 변호인도 최후 변론을 통해 “친절하게 대하는 캐디를 칭찬·격려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신체 접촉이 있었다. 9홀을 마칠 때까지 피해자가 거부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아 용인하는 것으로 오인했다. 언론에 알려진 것만으로도 형벌 이상의 징벌과 고통을 받은 점 등을 고려해달라”고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검찰의 벌금형 구형을 두고, ‘봐주기 구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박 전 의장은 검사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전과가 없고 초범이더라도 여성을 강제추행한 정도면 검찰은 징역형을 구형하고 재판부가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선고하는 게 일반적이다. 검찰의 구형량이 너무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유혜정 강원여성연대 상임대표는 “캐디 등 대부분의 여성 감정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지 않으려고 왠만해선 싫은 내색을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거부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아 용인하는 것으로 오인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박 전 의장의 사회적 영향력 등에 비춰 이번 사건은 일벌백계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박 전 의장은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것이다.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 번 툭 찔렀다는 이런 이야기다”라고 해명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또 검찰은 지난해 11월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한 뒤 박 전 의장을 한 차례도 소환하지 않은 채 두 달 가까이 기소를 미뤄 봐주기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경찰도 언론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토요일 새벽 출석해 조사를 받도록 박 전 의장을 배려하고, 조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도 경찰 수사관의 개인 차량을 제공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박 전 의장은 지난해 9월11일 오전 원주지역의 한 골프장에서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중 캐디 ㄱ(23)씨의 가슴과 엉덩이 등을 여러 차례 만지는 등 성추행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박 전 의장에 대한 선고공판은 오는 16일 오후 2시 열릴 예정이다.
원주/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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