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국민의 ‘이불 속’을 단속해온 간통죄가 없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1990·1993·2001·2008년에 이어 다섯번째 위헌법률심판을 거쳐야 했다.
근대적 국가 형벌로서의 간통죄는 1905년부터 시행됐다. 일본 형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대한제국 형법대전은 간통한 유부녀와 그 상대만 처벌하는 성차별적 법령이었다. 유부녀의 정조만을 ‘보호’ 대상으로 삼고, 유부녀와 성관계한 남성은 남의 것을 훔친 도둑으로 보는 전근대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해방 이후인 1947년 법제편찬위원회에서는 간통죄 존치 여부와 처벌 범위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는 간통죄를 넣은 형법 초안을 발의했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를 삭제한 수정안을 의결했다. 이후 정부 쪽 초안과 법사위 수정안이 모두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고, 표결에 참여한 110명 중 과반(56명)을 불과 1명 넘긴 57명이 정부안에 찬성해 간통죄가 법제화됐다.
세월이 흘러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간통죄 존폐 논란이 일었고, 그 무대는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가 됐다. 1990년과 1993년에는 6 대 3, 2001년에는 8 대 1로 합헌 의견이 우세했다. 2008년에는 4(위헌) 대 1(헌법불합치) 대 4(합헌)로 위헌 의견이 처음으로 다수가 됐다. 당시 김종대·이동흡·목영준 재판관 등은 “성에 대한 국민 일반의 법감정이 변하고 있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 모두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과잉금지 원칙에 반한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그러나 위헌 결정 정족수인 6명에 못 미쳐 간통죄의 생명이 연장됐다.
노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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