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순 할머니(오른쪽)가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집에서 박진옥 나눔과나눔 사무국장한테서 자신을 비롯한 독거노인들의 삶을 기록한 구술생애사 책 <나는 종로에 사는 사람입니다>를 받으며 환히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장례 약속한 ‘종로구 장례지원단’
노인 9명 구술 책으로 엮어 전달
사진 본 할머니 “못생겼네” 웃음
앞으로도 신청자 생애 계속 정리
노인 9명 구술 책으로 엮어 전달
사진 본 할머니 “못생겼네” 웃음
앞으로도 신청자 생애 계속 정리
김옥순(85) 할머니가 60년째 사는 집은 최근 젊은이들의 명소로 뜨고 있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 낙산공원 바로 옆에 있다.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불편한 김 할머니는 낙산의 가파른 비탈길을 수십분씩 걸어 오른다고 했다.
20일 오후 10㎡ 남짓한 김 할머니의 작은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홀로 사는 노인 17명에게 ‘뒷일’을 약속한 종로구 마을장례지원단의 박진옥(나눔과나눔 사무국장)씨였다. 손에는 김 할머니 등 9명이 구술한 각자의 삶을 정리한 책 <나는 종로에 사는 사람입니다>가 들려 있었다. 9명 모두 사후에 장례를 치러 드릴 이들이다. 박 사무국장의 손을 꼭 잡고 반갑게 맞이한 김 할머니는 책에 실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는 “에휴, 내가 봐도 못생겼다”며 수줍게 웃었다.
김 할머니가 구술하고 작가가 받아쓴 생애는 이렇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직업군인인 남편을 만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22살 때 숨졌다. 60년 전 서울에 올라온 뒤 미싱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환갑 무렵 폐병으로 8년을 고생하던 남편이 세상을 떴다. 모아둔 돈은 시어머니 병수발에 모두 들어갔다. 자신도 교통사고 후유증에 녹내장·신장질환으로 안 아픈 곳이 없다.
“혼자 방에 있으면 별생각이 다 들어서 잠이 안 와. 내가 죽은 다음엔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우울증에 빠지면 안 되니 악을 쓰곤 있는데 며칠 전에도 밤을 꼴딱 새웠어.” 기초생활보장 수급비만으로 생활하는 김 할머니는 “지금 사는 꼴이 이렇다”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성당 노인대학이나 노인복지관을 다니며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나온 책을 돌리겠다며 여러 권을 챙겼다.
“내가 죽으면 아무 데나 내버리면 된다”고 했던 최정웅(72) 할아버지도 이날 오후 고시원 방에서 책을 전달받았다. 책을 잡은 손은 뇌종양 때문에 덜덜 떨렸다.
최 할아버지의 생애는 이러했다. 사대문 안에서 이름난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젊은 시절 후회 없이 놀았던” 탓에 재산을 모두 날렸다. 아내와는 이혼하고 이제는 자식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최근 세번이나 기절해 쓰러졌는데 그때 죽었어야 했다”고 한숨을 내쉰 그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 풀어놓은 이유를 설명했다. “종종 만나서 소주 한잔 하며 얘기하는 친구들은 있지. 그래도 이렇게 차근차근 말한 적은 없었어. 덕분에 마음이 후련해졌지.”
나머지 7명의 삶의 궤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베트남전 파병 등 현대사의 굴곡과 이를 헤쳐나간 노년세대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담겼다.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고향에 돌아왔지만 자식이 셋이나 딸린 남자에게 후처로 시집간 할머니, 1·4후퇴 때 가족을 잃고 피란민촌에서 만난 양어머니에게 매맞다 도망쳤다는 할머니,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고 혈혈단신 시장에서 지게꾼으로 평생을 산 할아버지가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한달 넘게 종로구 쪽방촌과 달동네를 오가며 노인들을 상대로 여러 시간 인터뷰를 하고 내용을 글로 정리한 서현주 작가는 24일 “독거노인이라고 해서 불쌍하게 바라보는 편견 대신에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삶을 담고 싶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열심히 말씀해주셔서 이를 정리하는 작업 역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모인 글은 종로구에 마을장례사업을 제안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편집을 거쳐 200쪽 분량으로 나오게 됐다.
책의 주인공들이 세상을 뜨면 상주 구실을 대신할 박 사무국장은 “장례는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고 추억하는 것인데, 구술생애사 정리를 통해 그분들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마을장례지원단은 앞으로 결연장례 신청자들의 생전 밝은 모습을 담은 ‘행복한 영정’도 찍을 계획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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