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저녁 부산 중구 민주공원 작은방에서 ‘베
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역사적 증
언’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110석 규모의 민주공원
작은방에 280여명의 시민이 모였다. 사진 김영동 기자
“1966년 2월13일 일요일 새벽 귀를 찢는 포성과 총소리에 온 마을이 떨었습니다. 그날 우리 마을 주민 65명이 한국군에 희생됐습니다.”
지난 8일 저녁 부산 중구 민주공원 작은방(소극장)에서 열린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역사적 증언’ 간담회에 증인으로 나선 응우옌떤런(64)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픈 기억을 더듬어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110석 규모의 민주공원 작은방은 베트남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려고 모인 시민 280여명으로 가득 찼다.
베트남 중부의 빈딘성 따이빈사에 살던 응우옌떤런씨은 “한국군은 그날 오후 4시께 집 안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던 나와 어머니, 여동생을 마을 밖 논으로 끌어냈다. 이미 그곳에는 20여가구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한 군인의 외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수류탄이 떨어졌다. 내 발밑에서 수류탄이 터졌고,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그는 “나는 그날 밤 작은아버지 집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깨진 여동생은 3시간여 동안 신음을 내다 몸이 굳었다. 하반신이 사라진 어머니도 곧이어 숨을 거뒀다. 고아가 된 나를 마을 주민들이 키워줬다”고 말했다.
74명이 숨진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 퐁니·퐁넛마을 학살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56)씨는 “한국군 2명이 마을의 방공호에 숨어 있던 우리 가족에게 수류탄을 보이며 나오라고 했다. 한명씩 나갔는데, 그들이 총을 쐈다. 오빠는 덤불숲에 쓰러져 있었고, 남동생은 얼굴에 총을 맞았다. 언니는 집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이모는 조카를 업은 채 우리 집에 불을 지르려는 한국군을 말리려다 칼에 찔렸다”고 증언했다. 시장에 갔던 그의 어머니도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다. 응우옌티탄씨도 배에 총을 맞았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는 “가족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오빠뿐이었다. 몸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오빠는 아직도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하루하루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살고 있다”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콩 활동을 하다 다치거나 사망한 이들에게 보상을 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보상에서 제외됐다.
청중들은 이들에게 “용기를 내줘 고맙고, 미안하다. 우리가 베트남에 잘못했던 부분을 먼저 사죄해야, 일본의 위안부 역사 왜곡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후인응옥번(53)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증거와 흔적)박물관장은 “한국도 위안부 문제와 전쟁 피해를 겪은 나라다.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과 그 고통이 같다고 본다. 고통은 함께 나눌 때 덜어진다”고 말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게 하려면 한국 정부가 먼저 나서 베트남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들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부산지부 회원 170여명은 이날 저녁 6시30분부터 40여분 동안 민주공원 들머리에서 간담회 반대 집회를 열었다.
글·사진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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