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아침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원 ‘태학관’ 입주자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용산전자상가에서 일하는 한국계 독일인 정훈씨,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박티요르 야드가로브-스베틀라나 김 부부, 나이지리아에서 온 서울대 유학생 누후 야하야,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한국 정보기술회사 취업을 준비중인 올리비아 기라드, 태학관 운영자 이우진씨.
서울 고시원 ‘태학관’의 이색 풍경
“한국어 배우러…” “집값 저렴해…”
이란인 부부·우즈베크 고려인 등
33개 방중 20개에 외국인 살아
“고시 올인 한국인 성취욕 놀라워”
대 이어 25년째 운영 이우진씨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들고파”
“한국어 배우러…” “집값 저렴해…”
이란인 부부·우즈베크 고려인 등
33개 방중 20개에 외국인 살아
“고시 올인 한국인 성취욕 놀라워”
대 이어 25년째 운영 이우진씨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들고파”
“프랑스에는 ‘고시’라는 것이 없어요. 고시촌도 물론 없죠.”(올리비아 기라드)
“나이지리아에 이런 스튜디오(방)는 있지만 크기가 훨씬 넓어요.”(누후 야하야)
간단한 취사시설과 작은 화장실이 딸린 16~26㎡ 정도 크기의 방. 매달 35만~45만원을 받는 것은 여느 고시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의 ‘태학관’에는 좀 특별한 게 있다. 문을 연 지 올해로 25년을 맞은 이 고시원은 33개의 방 가운데 20개의 방에 외국인이 산다. 이란인 부부, 중국인 모녀, 취업을 위해 한국에 온 독일인까지 9개국 출신 외국인들이 한국인 고시생들과 한데 어울려 이웃으로 지낸다.
서울대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 저렴한 방값 때문에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 배낭여행객까지 서로가 서로를 소개해 태학관으로 모였다. 경기 안산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 스베틀라나 김(33)은 남편,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산다. 26일 태학관에서 만난 그는 “아버지가 한국인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국에 왔다. 외국인만 사는 게 아니라 한국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인종도 국적도 각양각색인 태학관 입주민들은 고시원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거나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를 열며 함께 어울린다. 매일매일 ‘비정상회담’이 이뤄지는 ‘유엔식 고시원’인 셈이다. 나이지리아 유학생 누후 야하야(36)는 “무슬림이라 (종교적으로 허용된) 할랄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을 빼곤 이곳 생활에 불편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시촌 속 고시원에 사는 외국인들 눈에는, 고시에 인생을 거는 한국 청년들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이들은 “한국 학생들은 성취에 대한 욕망이 크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뭔가 도전해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조심스럽게 고시촌 풍경에 대한 소감을 말했다. 어머니가 파독간호사였다는 한국계 독일인 정훈(30)씨는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한다. 그는 “한국 청년들이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끼리만 어울리지 말고 마음을 더 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태학관이 빈방 많은 낡은 고시원에서 다국적 공동체로 탈바꿈한 것은 주인의 아들 이우진(35)씨가 운영을 맡으면서부터다. 이씨는 한국 기업의 외국 법인에서 7년간 일했다. 그러다 지난해 일을 그만두고 태학관 경영에 나섰다. 24년간 태학관을 운영한 아버지는 빈방이 생기면 근처 복덕방에 알리고 새 입주자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씨는 인터넷을 통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입주자들을 찾고, 이들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씨는 3층과 4층짜리 태학관 건물 두 동 내부는 리모델링했지만, 수많은 고시생들의 꿈과 좌절이 배어 있는 태학관의 낡은 간판과 입구는 바꾸지 않고 25년 전 것 그대로 두고 있다. ‘큰 배움터’라는 태학관의 본래 뜻답게 ‘글로벌 고시원’의 꿈은 이룬 셈이다.
글·사진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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