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위치에 따라 1~8까지 숫자를 그래픽화해 큼직하게 그려넣었다. 사진 방준호 기자
번화한 상점가 뒤로 20~30년 된 건물들이 바투 붙은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일대 골목길은 좁고 깊다. 이곳 축축한 회색 콘크리트 담벼락에 지난해부터 밝은 색깔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골목 위치에 따라 1~8까지 숫자를 그래픽화해 큼직하게 그려넣었다.
13일 기자와 함께 골목길을 돌던 서울서부지검 소창범 검사는 “골목 분위기도 산뜻하게 바꾸고, 숫자를 적어 좁은 골목길에서 범죄에 맞닥뜨려도 위치를 경찰에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 동네 가로등 54개는 원래보다 4배 밝은 엘이디(LED) 가로등으로 바뀌었다. 시시티브이(CCTV) 카메라 3대가 새로 달렸고, 꺾어진 골목 안을 미리 볼 수 있는 반사경 11개도 설치됐다. 환경을 바꿔 범죄 가능성을 줄이는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셉테드) 사업 결과다.
서울서부지검은 법무부의 자문, 지역 주민과 인근 홍익대 미대생들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9월부터 골목길 바꾸기를 시작했다. 법무부는 도화동을 비롯해 지난해 14곳, 올해 11곳을 선정해 셉테드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박훈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 주무관은 “주로 지하철역, 번화가와 가까운 후미진 노후건물 밀집지역을 핫스팟(범죄우려지역)으로 정했다”고 했다. 셉테드 선정 지역 중 한 곳은 면적이 동 전체의 5%에 불과하지만, 최근 1년간 경찰 출동 횟수(63차례)의 3분의 1(21차례)이 집중될 정도로 우범지역이라고 한다.
셉테드 개념은 1970년대 미국 도시설계학자 레이 제프리가 제시했다. 국내에는 2010년 한국셉테드학회가 만들어졌다. 올해부터 500가구 이상 공동주택은 국토교통부가 셉테드를 반영해 정한 ‘범죄예방 건축기준’에 따라 지어진다.
셉테드는 주로 침입 범죄와 길거리 범죄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사경과 밝은 가로등은 사각지대를 줄여 ‘자연적 감시’를 가능하게 한다. 동네 주민들의 활동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컴컴한 공터 등을 공원으로 꾸미면 주민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경비인력을 두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민들의 눈이 어디든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을 범죄자들에게 심어주려는 것이다. 밝은 색채의 벽화 등을 그리면 동네가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고 한다. 박 주무관은 “잘 관리되는 지역에는 담배꽁초 하나 버리기 어려운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다.
법무부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셉테드 사업 결과, 대상 지역 주민들의 범죄안전 체감도가 평균 17%포인트 높아졌다고 했다. 소 검사는 “단순한 환경 변화를 넘어 주민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통해 범죄를 지속적으로 줄여가는 것이 남은 과제”라고 했다.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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