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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통역기 없어도 웃고 울던 그때 그 시절은 흘러갔지만…

등록 2015-09-04 21:54

[토요판] 커버스토리 / 알마티 고려극장 이야기
“그러니 하루, 하루도, 하루라도 발리, 빨리, 중전이 세자를 자리에 앉히려고 저 난리인 것인지.” “마마께서도 아드님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제 막 돌을 지났을 뿐. 지금 왕은 매일 군녀, 군녀, 궁녀들과 주새차끼, 주새, 주색잡기에만 시간을 보내고 간신배에게 모두 맡겨 놓으니 이 모양인 것이야.”

지난달 17일 젊은 배우들은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관객석에 앉아 서툰 발음으로 대본을 읽었다. 러시아어 또는 카자흐스탄어가 모국어인 고려인 배우들에게 한국어 발음은 쉽지 않아 보였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정도 규모의 작은 극장에는 좌석마다 통역기가 부착돼 있다. 대다수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통역기 없이는 공연을 관람할 수 없다.

고려극장은 국립극장으로서의 지위를 얻은 민족극장 가운데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1968년 소비에트연방(소련) 정부 시절 국립극장으로 승격됐고 그 지위는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에도 이어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소수민족들이 세운 극장은 고려극장, 위구르극장, 독일극장 등 총 세곳이다.

조국, 1~2세대 고려극장

“모든 것을 죄다 극장을 위해 바칠 것이며 또 극장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 것.”

1세대 고려극장 예술인들이 극장을 세울 때 만든 원칙이다.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학교, 공장, 농촌을 중심으로 연극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모스크바 등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거주지인 ‘신한촌’으로 속속 돌아오면서 연성용, 최길춘, 이길수, 김진, 최봉도, 이함덕 등이 1932년 극장을 세웠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시절은 문화예술이 공산주의 사상 선전을 강요받던 때였다. 얼마나 엄혹한 시대였는지는 고 연성용 극작가가 1993년 발간한 회고록 <신들메를 졸라매며>에 나온다. 스탈린을 격하하기 위해 그의 초상을 훼손해도 살아남기 힘든 시절이었다. 연 작가의 회고록은 1세대 극장 사람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물이다.

“1943년 전쟁 시기였다. (줄임) 순회공연에서 번 돈을 모두 부기원에게 보냈는데 돌아와서 보니 굶다시피 겨우 살고 있었다. 극장 내 식솔들을 어찌 굶게 하였느냐고 다그쳐보았지만 사욕만을 채운 것이 확연하였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옆에 있는 먹통을 들어 앞에 서 있는 극장 부기원을 때리려 하였다. 먹물은 내 머리 위로 뿌려지고 내 뒤 벽에 걸린 스탈린의 초상화를 적시었다. 이제 잘못되었구나 하고 속을 태우고 있는데 피할 길 없이 비밀경찰대에서 나를 부르는 호출장이 날아왔다. 사형이거나 징역 10년이 될 게 뻔했다. 그때 비밀경찰이 내가 입었던 윗도리옷 잔등에도 먹물이 뿌리워져 있는 것을 보고 살아났던 것이다.”

연 작가는 실수로 스탈린의 사진에 먹통을 들이부은 것이 인정되어 풀려났다. 1937년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극장도 크질오르다로 옮겼다. 이동이 금지돼 허가 없이 지정된 거주지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고 강제이주 당시 이산가족이 생겨 생사를 몰라 안타까워하는 고려인들이 많았다. 독일 나치의 소련 침략이 시작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극장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 극장은 배우들을 먹여 살리려 1942년 농촌지역인 우시토베로 이주했다. 연 작가는 “농민들이 낱알을 모아 우리 배우들을 먹여 살렸다”고 회고한다.

극장 사람들은 중앙아시아 전역을 돌면서 고려인들을 위로하고 다녔다. “그 어느 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르겐치 순회공연을 떠났다. 타슈켄트에서 우르겐치까지 가자면 그 거리가 몇백킬로미터나 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굉장히 먼 길이었다. 기차도 없었으며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우리 집단은 화물자동차에 몸을 싣고 우르겐치로 떠났다. 우르겐치로 가자면 카라쿰 사막을 지나야 한다. 도중에 모래에 빠져 고생을 하였으며 또 가노라면 앞에 모래산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 모래산을 뚫고 나갈 수 없어서 모래가 적은 데를 찾아 돌아다니곤 하였다. 사막의 바람은 실로 지독했다. 하루는 광풍이 어찌나 모질게 불었던지 모래가 일어 세상을 분별할 수 없었다. 광풍이 지난 후 살펴보니 사람들은 모래에 파묻혔으며 어린아이들은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소도구들은 광풍에 불려 어디론지 날아가고 말았다.”

1953년 스탈린이 숨지고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가 개인숭배를 배격하면서 해빙기가 찾아왔다. 이 시기에 재소 동포들은 공민증을 받았다. 1958년 다시 크질오르다로 되돌아아온 극장은 10년 뒤에 현재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이전했다. 1세대 고려인 예술가들의 시대가 저물었고 한진이 극장을 이끌어가는 예술인으로 부상했다.

가장 오래된 역사의 민족극장
한때 모래바람 맞으며 전국 순회
서툴지만 오직 한국말로만 공연
좌석마다 통역기 부착돼 있었다

1968년 현재의 알마티로 이전
한진은 극장 이끈 2세대 예술인
한야꼬브 등 3세대까지 거친 뒤
지금은 4세대 예술인들의 시대

정체성, 3~4세대 고려극장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1937년 강제이주를 경험하며 소수민족으로서의 설움을 받았던 고려인들에게 춘향전과 심청전을 볼 수 있는 극장은 조국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한진 이후의 세대부터는 극장의 의미가 달라진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고려인들에게 극장은 부모 세대의 뿌리와 다민족 사회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통로였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서 자라나는 폭넓은 문화적 토양을 발전시키는 곳이기도 했다. 극장의 3세대 예술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한 야꼬브(72) 작곡가와 송 라브렌찌(74) 감독이다.

1968년 고려극장의 아리랑가무단 단원으로 들어와 고려극장과 인연을 맺은 한 작곡가의 음악은 제3세계적이다. 재즈적 바탕에 카자흐스탄, 고려인 등 다양한 민족의 리듬과 선율이 덧입혀졌다. 한 야꼬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간행한 세계 유명 재즈인 백과사전에 실린 작곡가다. 한 야꼬브는 고려극장에 새로운 실험을 이어갔다. 1969년 고려극장 아리랑가무단 산하에 최초의 재즈그룹 빅밴드를 만들고 1993년 사물놀이팀을 창단했다. 한 야꼬브는 “1세대 고려극장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사명감으로 일했다. 하지만 소비에트연방 시대에 정치적인 것을 작품에 포함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사셨기 때문에 고려극장도 이념적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중앙아시아 순회공연이 줄어들었다. 한진의 뒤를 이어 새로운 희곡을 쓸 인재가 마땅치 않았다. 이 시기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인물이 영화감독 송 라브렌찌다. 영화만 연출하던 송 감독은 1997년 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했고 강제이주의 아픔을 담은 <기억>을 무대에 올렸다.

현재는 한 야꼬브, 송 라브렌찌에 이어 4세대 예술인들이 극장을 책임지고 있다. 1996년 가수로 극장에 들어와 현재 연출을 맡고 있는 김옐레나(37)는 “극장에 들어오면서 역사적인 조국이 뭔지 알게 됐다. 그 전에는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갈라진 것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극장을 책임질 그다음 세대, 5세대 배우들이 자라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리 류보비 극장장은 “2012년부터 신입 예술단원이 모집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려극장의 문화예술단원은 48명, 사무직을 포함하면 정규직 직원은 총 96명이다.

재정난도 겪었다. 고려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던 극장은 과거만큼 관객이 들지 않는다. 경영난을 겪은 극장은 1994년 건물을 잃었다. 고려극장은 1968년부터 알마티 시내에 자리한 위구르 극장과 같은 공간을 공유해왔다. 그러다 1994년 비용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건물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교육원 등 임시로 다른 공간을 빌려 사용하던 고려극장은 2003년 알마티 시내에서 벗어난 곳에 현재의 소규모 공연장을 소유하게 됐다. 그러나 고려극장 전 직원은 재정난 가운데서도 1997년 한국이 아이엠에프(IMF)를 겪을 당시 하루치 월급을 모아 한국에 보냈다.

통역기 없이 배우들의 한국말을 듣고 관객석에서 웃음과 눈물을 짓던 시절의 극장은 아니다. 현재의 극장은 사라져가는 한국어, 한민족 문화를 지키고 이어가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고려극장은 과거부터 지금껏 한국말로만 공연을 한다. 극장을 조국으로 여기며,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중앙아시아를 순회하며 고려인들을 위로하고 다녔던 작고한 고려극장 사람들은 극장 로비의 빛바랜 사진 속에 걸려 있었다. 지난달 17일 고려극장 로비에서 그 빛바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고려극장 83년의 역사가, 극작가 한진과 그가 사랑했던 동료와 선후배들이 거기 있었다.

알마티(카자흐스탄)/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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