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옥씨가 지난 8월20일 밤 자신이 담임목사로 있는 인천시 부평구 임마누엘교회에서 의족을 벗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40년 전 “왜 살렸느냐”며 아버지를 원망하던 민간인 지뢰피해자 이경옥(53)의 삶을 마주했다. 발목 절단으로 남은 상처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심리적 외상, 그가 속한 공동체가 준 깊은 수치심은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네번의 자살 시도는 미수로 끝났다. 마지막 자살 시도 전 14살 소녀 이경옥은 꿈을 꾸다 하늘나라에서 온전한 왼다리가 있는 스스로를 마주한다. 신을 섬기고 하늘나라에 갈 이유가 생겼다. 힘들 때는 마음껏 소리 내어 울어도 뭐라 하지 않는 공동묘지에 갔다. 살기 위해 무덤가로 향해야 했던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강원도에서 집계된 것만 228명이고 전국적인 피해자 수는 그 이상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민간인 지뢰피해자의 존재를 반세기가 넘도록 부정했다. 지난해 10월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올해 4월 국방부는 피해자 접수를 시작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부양가족이 있는 31살 남성이 1953년 지뢰사고로 사망한 경우 총 67만원가량의 위로금이 유가족에게 나온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의족 관련 소모품을 사는 데만도 빠듯하다고 말한다. 정부와 국회에서 특별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그림자처럼 반세기를 살아온 지뢰피해자들의 상처와 생활고를 지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친구도, 남편도, 국가도 그에게 치욕을 줬을 뿐
▶ 밟고 터져야 지뢰가 있는 줄 알았다. 마을 주민 모두가 ‘지뢰받이’였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비인도적인 무기에 희생된 이경옥과 또다른 이경옥들의 삶은 처참했다. 국가로부터 반세기 넘게 외면당해온 이들을 위한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 법안에 따르면 1953년 사고를 당한 부양가족이 있는 31살 사망 남성은 67만원가량의 터무니없이 적은 위로금을 받게 된다. 현재 개정안을 마련중이지만 지뢰피해자들을 위한 법이 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
“내 목을 밟아 죽이지 왜 살렸어!”
지뢰사고를 당한 지 10년이 지나 14살 소녀가 된 이경옥이 집 앞마당에서 왼다리를 절뚝이며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아버지 이희수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목발을 내던졌다. 배로만 닿을 수 있는 파로호의 오지마을. 이웃들의 ‘병신’이라는 욕설과 차별을 담은 돌팔매질은 사춘기 소녀에게 가혹했다. 왼발이 없는 둘째딸에 대한 걱정이 컸던 아버지는 폐암, 위암, 췌장암을 차례로 앓아야 했고, 마음과 몸이 모두 아팠다. 아버지는 산에서 송이를 채취하다 목발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으면 어깨에 지고 집으로 왔다. 주워 온 나뭇가지를 다듬고 니스를 칠해 딸을 위해 목발을 만들어 줬다. 2004년 7월 여름, 68살을 일기로 아버지는 딸의 곁을 떠났다.
지뢰사고로 다리를 잃은 지 50년째인 지난 9월8일, 이경옥(53)은 어머니 이정자(72), 언니 이경숙(55), 여동생 이경자(51), 큰남동생 이광석(49), 작은남동생 이동석(47) 등 여섯 가족이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 묘를 벌초하기 위해 강원도 화천에 위치한 언니 집 거실에 모였다. 아무도 지뢰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거, 지뢰사고 상상 안 돼요? 둘째딸 발목 아래로 너덜너덜한 거. 왜 물어봐요? 너무 괴로워서 다 잊었는데 자꾸 생각하라 그러면 어떡해!”
백발노인이 된 어머니가 기력을 다해 목청 높여 화를 내다 오열했다. 잠시 뒤 가족은 지뢰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간인 지뢰피해자 이경옥씨가 8월28일 오전 인천 브래덤기념병원에서 이 병원의 진료센터장인 김성환 지뢰피해자 장애등급판정 실무위원회 위원으로부터 진료를 받던 중 사고 부위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사진 김성광 기자
같은 장소에서 또래 남자아이도 당해
유난히 지독했던 1966년 장마가 지나고, 불어난 물에 떠내려온 쓰레기와 잡목들이 화천 동촌리의 파로호 모래사장에 잔뜩 쌓였다. 비가 걷힌 산촌에는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쓰레기 잔해는 바람에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 앞 밭에서 메주에 쓸 콩 줄기를 꺾는 동안, 20m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네살 이경옥과 두살 위인 언니 이경숙, 두살 아래인 여동생 이경자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병뚜껑을 찾았다. 소꿉놀이 때 그릇으로 쓰려고 했다. 병뚜껑 찾느라 정신이 팔린 오지마을 세 자매는 저녁노을이 질 무렵 자신들의 놀이터에 땅거미가 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지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30여가구가 사는 동촌리 천지가 폭발음에 흔들리고 마을 주민 모두 이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 눈앞으로 둘째딸이 폭발과 함께 하늘로 튀어오르더니 바닥으로 툭 처박혔다. 1㎞쯤 떨어진 밭에서 팥을 뽑던 고모부 최익규(80)도 폭발음을 들었다. 아버지에 이어 고모부도 연기가 치솟는 사고 지점으로 달려갔다. 화약으로 그을린 시커먼 구멍이 지름 1m 정도 크기로 파여 있었다. 아이들 셋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폐지처럼 바닥에 구겨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타버려 벌겋게 익은 두피가 드러났다. 화상을 입은 얼굴은 시커멨다. 그중 둘째딸의 왼발 뒤꿈치가 안 보였다. 굉음을 듣고 모인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의 참상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쯧쯧쯧 사람 꼴 하기 힘들겠어.”
아버지는 왼쪽 다리 아래로 피가 쏟아지는 둘째딸을 안고 고모부와 함께 동촌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88년 서울올림픽 즈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켰던 마을 사람들이 외부와 연락하고 닿을 수 있는 수단은 작은 목선뿐이었다. 번갈아가며 노를 저었다. 3시간 넘게 노를 저어 5㎞ 떨어진 구만리 선착장에 다다랐다. 다시 10㎞가량 버스를 타고 군의관 출신 의사가 있는 화천시내 ‘권의원’에 도착했다. 이경옥의 발을 본 의사가 잘라내야 한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딸이 조금 더 긴 다리를 가지게 해달라고 눈물로 사정했다. 같이 있던 고모부는 말이 안 나왔다. 이경옥은 정육점 돼지 넓적다리처럼 퍼진 다리를 봐도 울음이 나지 않았다.
소녀 이경옥이 사고를 당한 지 20여일 뒤, 마을의 또래 남자아이가 같은 곳에서 또 지뢰를 밟았다. 그 가족은 사고가 나고 얼마 뒤 마을이 지옥 같다고 말하곤 고향을 떴다. 그 뒤 아무도 그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당시 동네에는 지뢰를 밟은 사람들이 많았다. 밟고 터져야 지뢰가 있는 줄 알았다. 마을 주민 모두가 ‘지뢰받이’였다.
이 사고로 언니는 얼굴 파편상을 당해 곰보처럼 파인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녔다. 이경옥은 왼쪽 무릎 아래를 잃었다. 여동생은 얼굴 파편상을 당하고 왼쪽 청력을 잃었다. 지뢰사고에 대한 가족들의 기억을 듣던 여동생이 말했다. “청력 상실은 사범대 입학을 앞두고 신체검사 때 알게 됐어요. 난 사람들이 늘 내 오른쪽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왼쪽 귀가 먹은 줄도 몰라서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원래 오른쪽 귀로만 듣는 건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죽은지도 모르고 산 거야”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지에 살았어. 정부에 사고 보상 신청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지뢰사고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젊을 때는 김일성이랑 북한놈들 다 때려잡겠다고 말했었는데, 북한이 미웠지. 순진했어”라며 잊고 싶은 과거를 회한했다.
벌초를 마치고 사고 지역을 다시 찾은 세 자매가 호수 옆 모래사장을 밟자 모래흙이 쑥 꺼졌다. 과거 사고가 떠오른 이경옥이 외쳤다. “발이 푹푹 들어간다. 또 지뢰 밟을라 무섭다. 나가자.” 그는 몸으로 사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보여줘선 안 될 한국 역사의 그림자였다. 정부는 비무장지대를 제외한 그 어떤 지역에도 지뢰를 매설한 적이 없다고 주장해왔고, 이 주장에 따라 민간인 지뢰피해자는 존재 자체가 없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1999년부터 해외 지뢰제거 사업 및 피해자 재활치료 사업을 벌이는 유엔에 88억여원을 냈다. 이들이 법적으로 인정된 건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지난 4월 국방부는 새 법에 따라 민간인 지뢰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접수를 받기 시작했다.
화천군 동촌리 파로호 모래사장서
병뚜껑 찾다가 화 당한 세자매
이경옥은 왼쪽 다리 잘리고
언니와 동생도 파편상 입었다
세 자매가 그 자리 다시 찾았다
피해자들 존재 부정해온 정부
해외 지뢰제거엔 88억원이나 내
1년전 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돼
피해자 대상으로 접수받기 시작
이경옥은 ‘위로금 1호 신청자’
이경옥씨가 이날 오후 인천가족공원의 한 묘지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 때 이곳을 찾았다는 그는 “공동묘지나 화장터에서는 큰소리 내서 울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맘껏 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김성광 기자
하늘나라에서 마주친 왼쪽 다리
이경옥은 이 법에 따라 지급되는 위로금의 ‘1호 신청자’다. 받을 수 있는 위로금은 1080여만원으로 추정된다. 매년 의족 관련 소모품에 200만원 이상을 지출하는 그에게 위로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7만원짜리 로션을 사서 환부에 매일 발라야 하는데 보통 한달에 한통 써요. 5개 세트로 된 2만원짜리 스타킹 네트, 1개 55만원 하는 실리콘은 두달이면 구멍 나서 버려야 하는데, 아껴 쓰려고 꿰매거나 때워서 고쳐 신어요. 그렇게 피부에 바로 닿는 실리콘의 구멍을 때우면 그 부분이 딱딱해져서 피부 마찰이 심해지고 곧 상처나요”라고 말했다.
매번 소모품을 사는 게 그에게 큰 경제적 부담이다. 제대로 구비해 쓰면 연 400만원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 의족 비용도 만만찮다. 어릴 적에는 성장기라 1년에 한번씩 맞춰야 했고, 20살 이후에는 3년에 한번씩 맞췄다. 그는 학창시절 결함이 많은 국산 의족이 자주 부서져 망신을 당했다며, 지금은 인천 부평에 있는 ‘의지제작소’에서 독일제 부품을 사용한 455만원 상당의 기능성 의족을 주문해 착용한다. 얼마 전부터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장애등급에 맞춰 3년에 한번 약 95만원의 의족 비용을 보조해주어 부담이 덜해졌다.
이경옥이 말했다. “돈 몇 푼으로 몸과 마음 다 다친 피해자들에게 위로한다는 말을 꺼내는 게 기가 차요. 장애인이 사회적 배려를 받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요. 한센인, 상이군인, 지뢰피해 장애인 등을 보면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했었는데, 저도 1969년도 화천국민학교 입학부터 화천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그 돌에 맞아 온몸이 멍들고 얼굴이 터지기도 했죠.” 이경옥이 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치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걸까. 1976년 14살 이경옥은 자살을 4번 시도했다. 담임 선생님에게 쥐를 잡아 제출해야 집에 갈 수 있던 시절, 이경옥이 학교에서 나눠준 ‘쥐잡기 운동용’ 쥐약으로 두차례 음독자살을 시도하지만 세들어 살던 오빠가 그를 말렸다. 다시 죽기 위해 칼을 집은 왼손잡이 이경옥은 오른쪽 손목을 찔렀다. 깨어나니 가족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마지막 자살 시도를 위해 빨랫줄에 목을 매러 마을 인근 ‘절산’에 올라 만만한 나무를 찾아 신발을 벗었다. 죽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하다가 꿈을 꿨다. 하늘나라에서 온전한 왼다리가 있는 스스로를 마주한다. 그 뒤 그에게 신을 섬기고 하늘나라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인생이 바뀌게 된 계기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성경 ‘사무엘상’의 구절을 외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996년 여름, 가족과 함께 피서를 간 인천 송도해수욕장에서 이경옥씨가 네 살짜리 어린 아들을 안고 있다. 지난 8월28일 늦은 밤 그는 인천 임마누엘교회에서 금요철야예배를 앞두고 옛이야기를 꺼냈다. “다리가 불편해 해수욕을 못하는 제가 불쌍했는지, 아들이 어디선가 주운 페트병에 바닷물을 담아 와 ‘엄마 덥지?’ 하며 태양 볕에 바짝 마른 제 잘려나간 왼무릎 아래에 그 물을 부어주더라고요.” 이경옥 제공
남자친구 앞에서 부러진 의족
이경옥은 1981년 서울의 한 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했다. 그해 가을, ‘넌 소중한 사람이야. 보배로운 사람이야’라며 신입생 이경옥을 늘 응원하는 네댓살 연상의 남자친구 앞에서 그의 의족이 부러졌다. 앞으로 꼬꾸라진 그의 모습을 본 남자친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경옥은 종로 낙원상가까지 악기를 사러 온 게 후회스러웠다. 남자친구의 놀란 얼굴 너머로 그가 군인이었던 시절 주고받은 편지 300여통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여고생 이경옥이 힘들 때 옆에서 손 붙잡고 기도해준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은 서울 정동에 위치한 의족가게로 갔다. 의족을 수리하는 동안 이경옥은 그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짐이 되지 말자, 놓아주자.’ 속으로 몇차례 되뇌었다. 의족 수리를 마치고 가게에서 나온 이경옥은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4년간의 연애를 끝냈다.
대학 졸업 뒤 전도사가 된 그는 10여차례 선을 보면서 매번 모욕을 당해야 했다. 벌떡 일어나 돌아서며 장애를 흉하게 보는 맞선남과 마주했고, 반대로 맞선남의 청혼을 거절했다가 ‘네까짓 게 거절을 해?’라는 폭언을 들으며 뺨을 맞았다. 서른살이던 1992년 8월, 그는 을지로6가에 위치한 국립중앙의료원 옆 천지관광호텔에서 37살 노총각을 소개받는다. 이경옥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두번째 만남에서 보자마자 치마 아래로 왼쪽 의족을 ‘쑥’ 빼면서 장애를 밝혔다. 그러자 그는 ‘다리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해 10월3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인 1993년 7월 아들을 낳았다. 남편과 가족이 함께 사는 인천 부평구 부개동의 한 시유지 무허가 건물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한 주부 이경옥은 시가족의 손발이 되어야 했다. 시어머니는 1200만원가량의 빚이 있었고, 그는 기업체 경리로 일하며 시어머니의 빚을 5년 동안 갚아 나갔다. 알코올중독인 시아버지는 손자가 울면 며느리 이경옥에게 ‘재수없는 년’이라며 폭력을 휘둘렀다. 남편 역시 술만 마시면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다리가 되어 주겠다던 남편의 약속은 없는 이야기가 됐다.
늘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은 ‘애어른’이었다. 어릴 적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 죽은 사람을 본 뒤 정신적 외상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20년 전, 부부관계 중 남편이 아내 이경옥의 자세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한쪽 다리가 없는 그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계속 쓰러졌다. 그러자 남편은 ‘싹둑 잘린 다리로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냐’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하더니 바닥에 처박힌 아내의 목을 발로 짓밟았다. 이경옥은 “그날의 충격으로 여성성을 잃었어요. 이후 호르몬 문제 때문이었는지 급속도로 살이 쪘어요”라고 말했다.
2010년 당시 첫 뇌경색으로 고생한 남편에게 최근 세번째 뇌경색과 함께 인지장애가 찾아왔다. 때로는 화장실에서 세수하기 위해 세면대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사용법을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다. 남편은 이제 아내 이경옥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음독 등 자살 시도 도합 네번
10여차례 선볼 때마다 모욕
“다리 되어 주겠다”던 남편도
평생 폭력을 휘두르다 인지장애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종교적 믿음
“다리를 또 잘라내야 하나요?”
병원에서 방사선 영상을 보는
그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지뢰 밟고 인생 풍비박산 난
이들의 삶은 여전히 누더기다
공동묘지에서 한없이 울다
그러나 이경옥을 버티게 한 건 그를 온전히 보아주는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지난 8월29일 오전, 교회로 가기에 앞서 그는 부평 집에서 잘린 다리에 스타킹 네트를 신고 있었다. 무릎과 의족 사이 마찰로 인한 상처를 막기 위해 신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20년 전에는 기능성 제품이 없어서 30분에 한번씩 스타킹 네트를 갈아신어야 했는데, 제때 안 갈아신으면 왼쪽 사고 부위가 짓물러서 고름이 차고 피가 나요. 어쩔 수 없이 그때마다 장소 상관없이 무릎 아래로 잘려나간 다리를 드러내야 하고, 절반만 남은 다리를 본 사람들은 저를 기피했어요. 당시 교회 안에도 똑같은 차별이 있었죠.”
1985년 봄, 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이경옥은 당시 존경하던 한 목사가 있는 교회에 전도사가 되기 위해 찾아가지만, ‘교회 어린이들이 절뚝걸음을 배운다. 당신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발길을 돌렸다. 늘 사랑의 실천을 설교하던 그의 정반대 모습에 절망감을 느꼈다. 지뢰사고로 다리를 잃은 원망보다 신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그렇게 100곳이 넘는 교회에 전도사 원서를 썼지만 그를 받아준 곳은 없었다.
절망에 빠져 있을 무렵, 그는 지인으로부터 ‘울릉의원’을 소개받고, 1985년 말부터 2년 동안 경북 울릉도로 떠나 원목과 총무로 일했다. 매일 150여명 환자 접수부터 병실 안내, 예배까지 쉴 틈이 없었다. 상처투성이로 자란 이경옥에겐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었다. 결국 2002년 12월, 인천 부평에 이삼십여 가정이 출석하는 ‘임마누엘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한 교단의 지역 노회에 가입하려 했던 2003년, 노회 임원이었던 한 목사의 반대로 그는 마음고생을 했다. 그 목사는 ‘남편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면서 무슨 교회를 세우냐’며 가입에 반대했다. 좌절감을 느낀 목사 이경옥은 부평공동묘지(현 인천가족공원)로 향했다. 한없이 울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공동묘지가 좋았다. 묘지 앞 비석을 보면 삶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다. 목사 이경옥은 “‘다들 죽는데, 나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닌데. 결국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이 세상에서 너무 갈등하고 사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쥐고 있는 걸 다 내려놨죠”라는 말을 마치고 현관을 나섰다. 죽어 있는 사람들이 깃들인 무덤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그는 오히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9월8일 오후 벌초를 마치고 사고 지역을 다시 찾은 언니 이경숙(55·왼쪽부터)씨, 둘째 이경옥(53)씨, 여동생 이경자(51)씨가 파로호 옆 모래사장을 걷고 있다. 이날 사고 기억이 떠오른 이경옥씨는 “발이 푹푹 들어간다. 또 지뢰 밟을라 무섭다. 나가자”고 외치며 모래사장을 빠져나왔다. 사진 김성광 기자
언젠가는 잘라야 할 다리
8월28일 오전, 이경옥은 인천 남동구 브래덤기념병원을 찾았다. 이 병원의 김성환(43) 진료센터장은 국방부 산하 ‘지뢰피해자 장애등급판정 실무위원회’ 위원이다. 민간인 지뢰피해자 등록에 필요한 ‘향후 의료비 추정서’ 서류 준비를 위해 이경옥은 증상을 확인하러 왔다.
“얼마 전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는 왼쪽 무릎 아래 사고 부위에 염증이 심해지면 피부암이 발생할 수 있고, 결국 넓적다리까지 잘라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면서 무릎 관절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어요. 꼭 잘라야 할까요?” 이경옥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방사선 영상에서 눈을 뗀 김성환 센터장이 말했다. “언젠가는 잘라야 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이경옥의 짓무른 왼쪽 다리를 소독했다.
왼쪽 무릎 아래 염증, 연골이 다 닳아 통증이 오는 무릎협착증, 골반 기형, 척추 3·4·5번 디스크 돌출. 이경옥의 진료기록서를 빼곡히 메운 질환들이다. 한쪽 다리만 쓰다 보니 밤이 되면 심하게 붓는다. 체중이 줄면 증상이 완화된다는 말에 돼지감자, 우엉차, 마테차 등으로 식이조절을 해봤지만 신진대사가 안 좋아 효과가 없다. 나이는 들고 운동은 힘든 상황에서 최근 당뇨와 고혈압도 생겼다. 병원에서 나온 이경옥과 식당에서 송이버섯갈비탕을 먹었다. “이렇게 의사 선생님이 직접 소독해주는 경우는 처음이에요. 다른 의사 선생님들은 제 다리를 송충이 본 것처럼 징그러워하고 직접 소독도 안 해주는데….” 그가 말했다. “저는 완전히 누더기예요.”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지뢰는 비인도적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M14’는 탐지조차 안 된다. 지뢰를 밟은 아이들의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긴 세월이었다. 국가는 나 몰라라 했고 주변 사람들은 외면했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2011년 사단법인 ‘평화나눔회’가 발표한 민간인 지뢰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무학, 초교 중퇴, 초교 졸업이 57%에 이른다. 46%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100만원 이하를 번다. 병뚜껑을 주우러 간 소녀 이경옥이 발을 잃고 돌아온 지 50년이 지났다. 수많은 이경옥들이 아직도 누더기 대접을 받고 있다.
화천 인천/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서울서 부산까지 7만5000발…당신도 발목을 조심하라
지난 8월4일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몰고 온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로 중상을 당한 김아무개(23) 하사와 하아무개(21) 하사가 받을 수 있는 보상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국방부의 보상 방안에 따르면, 장애등급에 맞춰 현역 복무 시에는 ‘상해후유 보험금’으로 각각 6000만원과 1억원을 받는다. 전역을 하면 상이·보훈 연금으로 각각 200만원과 530만원가량을 매달 받을 수 있다. 반면 민간인 지뢰피해자들은 한국전쟁 종전 이후 62년이 흘렀지만 어떤 보상도 못 받고 있다.
지난 8월28일 오전 인천시 브래덤기념병원에서 이 병원의 진료센터장인 김성환 지뢰피해자 장애등급판정 실무위원회 위원이 민간인 지뢰 피해자 이경옥씨의 왼쪽 다리 방사선 영상을 살펴보고 있다.
2011년 강원도 지원으로 사단법인 ‘평화나눔회’(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벌인 ‘강원도 민간인 지뢰피해자 전수조사 보고서’를 보면, 강원도에는 228명의 ‘이경옥’이 있다. 정부 조사는 한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다. 최초의 민간인 지뢰피해자 조사였다. 조재국 평화나눔회 이사장은 지난달 29일 “비인도적 재래식무기금지조약(CCW)을 보면 피해자들의 치료, 재활 및 사회·경제적 회복을 위해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조약에 가입한 한국은 이행하고 있는 게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1997년 9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대인지뢰회의에서 “한국에는 대인지뢰로 인한 희생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과 대치선상의 155마일 비무장지대를 제외하면 한국은 그 어떤 지역에도 대인지뢰를 매설해놓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대인지뢰의 사용 금지와 제거를 규정한 ‘오타와 대인지뢰 금지 조약’ 가입을 피하기 위해 정부가 이렇게 주장했다는 게 관련 단체의 해석이다.
현재 비무장지대 108만발 말고도
우면산·문학산·남한산성·태안 등
36곳에 7만5000여발 지뢰 묻혀
1988년에도 지뢰를 심었을 정도
강원도에만 ‘228명의 이경옥’
피해자 접수 시작하긴 했지만
위로금 산정 방식 현실성 없어
‘특별법 개정’ 목소리 높아
2001년 2월 주유엔 대한민국 대표부의 요청으로 국방부가 답변한 자료를 보면, 현재 비무장지대에 묻혀 있는 108만3000여발의 지뢰 말고도 서울 우면산, 인천 문학산, 경기 성남 남한산성, 충남 태안, 대구 최정산, 부산 장산 등 36곳에 7만5000여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국에,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민통선에,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개최 당시에는 후방지역 방공포 기지 주변에 지뢰가 매설됐다. 국방부는 2010년 미확인지뢰지대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약 489년이 걸린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15일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민간인 지뢰피해자 문제의 실마리가 풀렸다. 지난 4월16일 국방부는 민간인 지뢰피해자의 접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행령에 따라 사고 당시 평균 명목임금 기준으로 호프만 계수를 적용하여 ‘위로금’을 계산하면, 1953년 사고를 당한 부양가족이 있는 31살 사망 남성(월평균 임금 110원)은 67만원가량의 위로금을 받게 된다. 반면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2012년에 사고를 당할 경우 3억4494만원가량의 위로금을 받는다. 둘의 위로금 차이는 512배다. 조 이사장은 위로금 산정 문제에 대해 “과거의 명목임금이 아닌 현재의 실제 임금 기준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7월8일 기준으로 지뢰피해 위로금 신청자는 180명이다. 이 가운데 임금 상승률이 둔화되기 이전인 1980년 이전 피해자 131명(72.8%)은 상당히 적은 위로금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게 관련 단체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현실에 맞게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해자 단체는 치료 및 의료소모품 비용에 5천만원 정도의 위로금 지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국방부는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시행령에서 사망자에 대한 최소 위로금 지급 기준이 2천만원이라는 점을 들며 2천만원 미만으로 지급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국방부는 관련 부처 협의를 통해 이런 내용의 법 개정안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13일 국회에서 열린 ‘지뢰피해자 지원대책 간담회’에서 한기호 의원은 “개정안에 나온 그 지급액 내용은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것”이라며 “국방부 시설기획관에 ‘지급액을 2천만원으로 못박지 말라’고 전하며 기획재정부와 더 협상해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재민 국방부 시설기획관은 지난달 30일 “기재부와 예산 협의를 해보니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보상 기준과 형평성 문제가 있다면서 기재부가 원칙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고 밝혔다. 반면 기재부 국방예산과의 이철영 사무관은 “법이 시행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그 내용이 타당한지 아직 알 수 없다. 국방부와 협의는 해봤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국방부가) 떠미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재국 이사장은 “두 부처가 예산 문제를 놓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광주민주화운동 보상 심의를 국무총리실 산하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위원회가 하는 것처럼 지뢰피해자를 위한 지원심의위원단도 관계 기관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