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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검찰이 한꺼번에 교수 200명을 잡았답니다

등록 2015-11-27 19:31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저는 한수이북 지역 취재를 맡고 있는 수도권팀 기자입니다. 한수이북이란 고양과 파주, 의정부, 남양주 등 한강 북쪽에 있는 경기 북부지역 10개 시·군을 말합니다.

오늘은 의정부지검에서 조사 중인 ‘표지갈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표지갈이란 남이 지은 책을 표지만 바꿔 자신의 저서로 둔갑시켜 출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국 50여개 대학교수 200여명이 이 수법으로 책을 냈거나 이를 눈감아준 혐의로 최근 무더기 입건됐습니다. 남의 글 일부를 베낀 표절도 지탄받는데,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인 교수들이 남의 연구 성과를 통째로 가로챈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접하고 저는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는 25일치 사회면에 ‘표지갈이 교수 200여명 적발’ 기사를 쓴 뒤, 남종영 토요판팀장으로부터 취재 뒷얘기 등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검찰 쪽 취재 내용에다 다른 언론에 보도된 것을 조금 참고하면 쉽게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점에서 저의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참고’하기 위해 뒤적거린 인터넷 공간에는 수많은 동어반복 기사, 표지만 다른 붕어빵 뉴스들이 제각각 ○○○ 기자 이름을 달고 넘쳐났습니다. 문득 ‘나도 지금 표지갈이를 하려는 거 아닌가, 돌 던질 자격이 있는가’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흔히 ‘우라까이’라고 불리는 기자들의 짜깁기 관행은 글쓰기 종사자의 또다른 불감증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표지갈이는 출판사와 가짜 저자, 원저자 등 3자가 유착돼 1980년대 이후 수십년간 전국의 이공계 대학에서 만연했다고 합니다. 출판사는 전공서적 재고 처리와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가짜 저자는 재임용 등을 앞두고 연구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표지갈이를 감행했습니다. 원저자는 출판사의 사정에 못 이겨, 혹은 인세 수입이나 다음에 이공계 서적을 낼 출판사를 확보하기 위해 이를 눈감아줬습니다. 출판사는 재임용을 앞둔 교수들에게 노골적으로 표지갈이를 권유하기도 했고, 일부는 교수들이 다른 곳에서 책을 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검찰은 전합니다. 표지갈이임을 알면서 새 책인 것처럼 펴낸 출판사 3곳의 임직원 4명도 공범으로 함께 입건됐습니다. 일반 독자도 있는 인문·사회과학 쪽과 달리 이공계 전공서적은 수강 학생 수십명의 수업용으로만 사용되고 대학 구내서점 등에서 한정 판매되는 점도 오랜 기간 적발이 안 된 이유로 꼽힙니다.

당사자 간 저작권법 다툼을 수사하다가 ‘뜻밖에’ 큰 건을 잡은 검찰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유사 이래 첫 사건”이라며 고무적인 분위기입니다. 교수 200여명을 다른 일로 불러 조사했다면 ‘학문의 자유 침해’라며 난리가 났을 텐데, 지금 누구 하나 입 여는 사람이 있냐며 큰소리칩니다. 다음달 중에 입건된 교수 대부분을 기소할 방침이라며 혐의 입증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입건된 교수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사와 각종 학회장도 있다고 합니다.

교수들은 출판사 사정을 봐주다가 발목 잡힌 경우라며, 이공계 서적 출판시장의 영세성, 구조적 한계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수도권 대학교수는 “출판사에서 자꾸 부탁하면 달갑지 않지만 인정상 허락하게 된다. 기껏해야 몇십부 팔리는데 인세 문제는 아니다. 가짜 저자가 이걸 연구실적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은 별개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공계는 제대로 된 책이 거의 없어요. 고작 몇십부 팔리는 데 심혈을 기울여 쓸 수 없기 때문이죠. 과거에는 외국책을 번역해 자기가 쓴 것처럼 냈는데 요즘엔 그렇게는 못합니다.” “재임용을 위해서는 연구실적이 필요한데 논문이 그냥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과 인력이 투입돼야 하는데 전문대나 작은 대학에서는 힘든 경우가 많다”며 현실적인 고충을 이야기하는 교수들도 있었습니다.

박경만 지역에디터석 수도권팀 기자
박경만 지역에디터석 수도권팀 기자
이 사건 수사는 의정부지검 형사5부(부장 권순정)가 맡고 있는데, 권순정 부장검사는 황교안 총리 후보자 청문회 지원을 위해 지난 5월 차출됐던 ‘엘리트 기획통’이라고 하네요. 올 2월 의정부지검에 부임한 뒤 박 대통령 사촌 형부 구속과 프로농구 선수 도박사건 등을 잇따라 수사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표지갈이 사건의 파장이 얼마나 클지 저도 궁금합니다.

박경만 지역에디터석 수도권팀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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