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실씨의 남편 정아무개(55)씨가 1일 전북 장수의 자신의 목장 위를 지나가는 고압 송전선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김영실씨 제공
목장을 운영하는 김영실(가명·40·여)씨 부부는 요즘 송전선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긴 법정싸움 끝에 대법원에서 “한국전력공사(한전)는 송전선을 철거하라”는 확정판결까지 받았지만,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사육 중인 말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잇따라 유산해 35마리에서 12마리로 줄었다.
김씨 부부가 한전을 상대로 소송을 낸 건 5년 전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남편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전북 정읍으로 내려갔다. 부부는 재기를 꿈꾸며 목장 터를 매입했다. 김씨는 “2008년 부지를 살 때 송전선이 지나가긴 했지만 큰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듬해 한전에서 송전선이 지나가는 땅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김씨가 시간을 달라고 하자 한전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높은 보상을 요구한다”며 중앙토지수용위원회(중토위)에 토지 수용 재결 신청을 했다.
목장 운영 40대 부부 5년 싸움 끝에
“송전선 철거” 판결 받아냈지만
한전은 전원개발촉진법 이용
강제집행 결정 취소 받아내
사실상 ‘법위의 법’인 전원법이
한전의 토지 강제수용권 보장
법정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심은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한전은 “김씨가 송전선의 존재를 알고 부지를 샀고, 송전선이 목장 경영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며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판결은 2012년 8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하지만 한전은 꿈쩍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부부는 지난해 11월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일정액을 배상하라”며 ‘간접강제 신청’을 냈고, 법원은 “송전선을 철거하지 않으면 하루 10만원씩 돈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한전은 중토위에 “송전선을 철거하면 안정적 전력 공급이 불가능하다”며 재결 신청서를 냈고, 중토위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결정을 근거로 한전은 강제집행에 불복해 ‘청구이의의 소’를 제기했고, 공탁금 50만원을 낸 뒤 강제집행 결정 취소를 받아냈다. 김씨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한전이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토지 사용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의 허술함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법 위의 법’으로 불리는 전원개발촉진법이 그 핵심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만들어진 이 법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실시계획 승인만 받으면 도로법·하천법·수도법·농지법 등 19개 법령에서 다루는 인허가 사항을 모두 거친 것으로 본다. 인허가 과정에서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배제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해당 주민이 반발하면 토지를 강제수용할 수 있도록 돼 있어 대표적인 악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김씨처럼 한전을 상대로 송전선 철거 소송을 내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음에도 강제수용을 당한 이들은 적지 않다. 연아무개(66)씨 역시 제주도 북제주군 자기 소유의 땅 위를 지나는 고압송전선을 철거하라고 소송을 내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한전은 중토위에 사용재결 신청을 해 강제수용을 받아냈다. 한전 보상지원부 관계자는 “기존의 송전선을 철거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대법원 판결과 별도로 중토위를 통해 행정적 절차를 밟아 보상하고 토지 사용 권한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한전이 스스로 철거하지 않는 한, 이를 강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녹색법률센터 배영근 변호사는 “한전이 강제수용권이 있다는 걸 빌미로 주민들과 협의를 잘 하지 않는다. 주민들에게는 토지를 한번 보러 왔다고 하고, 중토위에 가서는 이 사람이 보상을 거부했다고 하고 그냥 강제수용을 해버리는 식”이라며 “외국처럼 충분히 주민들과 협의를 하는 등의 법 개정이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전원개발촉진법 개정안은 모두 10건에 이른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