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 반올림 활동가와 노무사들이 ‘반도체의 날’인 지난 10월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에스케이하이닉스·아이엠텍 반도체 노동자의 집단 산재 신청을 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슈 포커스 삼성반도체 백혈병 논란 8년째
11월25일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포괄적으로 보상하고 재발 방지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외부 전문가 7명으로 구성된 산업보건검증위원회(검증위)가 지난 1년간 조사해 내놓은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에스케이하이닉스의 발표는, 관련 논란이 불거진 지 1년 만에 비교적 빠르게 대책을 내놓았다는 점, 회사로부터 독립적인 기구에서 내놓은 대책을 회사가 전격 수용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의 백혈병 논란 대처와 비교되며 눈길을 끌었다. 애초 ‘반도체 사업장 직업병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황유미씨가 백혈병에 걸려 숨지면서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회적 지지를 받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갈등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황유미씨 숨진 이후 수년간 공방
삼성·반올림·가족위 세 주체
진통끝에 ‘조정위’ 꾸렸는데
삼성에 독립법인 설립 제시한
‘조정권고안’ 결렬로 갈등 커져 삼성, 가족들에 개별보상 나섰지만
사회적 지지 받는 해결책 못내놔
일각선 “보상·예방문제 분리를”
“삼성, 사회적 대화 더 노력해야” ■ 조정권고안 불발, 핵심 쟁점은 ‘독립 법인’ 황유미씨의 죽음을 계기로 같은 해 11월 여러 노동·시민단체가 결합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결성됐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장과 백혈병의 인과관계’를 부인하고 나섰고, 이후 양쪽의 공방이 수년간 지속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반올림, 가족대책위원회(지난해 9월 반올림과 입장이 다른 피해자 가족들이 꾸린 단체) 등 세 주체는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삼성전자 사업장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를 구성해 3대 의제(보상, 사과, 예방)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많은 시간이 걸려 사회적 대화 창구가 마련된 것이다. 조정위는 8개월의 활동 끝에 지난 7월 조정권고안을 제시했다.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기부해 독립된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피해자 보상과 예방 조처를 하자는 내용이 뼈대였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지난 9월 조정권고안을 거부하고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위원회’(보상위)를 독자적으로 꾸려 개별 보상에 나섰다. 보상위는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위원장으로, 삼성 관계자 2명과 외부 전문가 4명으로 구성됐다. 가장 큰 쟁점은 ‘독립 법인’이다. 삼성전자는 “독립된 상설 법인을 만들겠다는 것은 사실상 영구적으로 삼성전자의 사업장을 감시하겠다는 의미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조정위 쪽에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삼성전자는 1000억원 규모의 ‘사내 기금’을 조성해 ‘보상과 예방 및 연구 활동’에 쓰겠다는 입장이다. 조정권고안이 결렬되면서, 삼성전자와 가대위를 한 축으로, 반올림과 반올림을 지지하는 가족들을 한 축으로 하는 대립과 갈등은 더욱 커졌다. 가대위 송창호 대표는 “별도 법인을 구성하려면, 그 시간만큼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이 연장된다”며 “반올림은 피해자 가족의 입장보다 대의명분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삼성은 사실상 가해자임에도 7년 넘게 책임을 회피하고 문제를 은폐한 전력이 있다. 삼성전자가 보상과 예방을 전담할 경우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독립 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올림은 지난 10월7일부터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 삼성 자체 보상 진행 속 반발도 삼성전자는 자체적인 보상 절차 진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대위와 삼성전자 쪽에 따르면, 보상위 구성 뒤 피해자 가족 130여명이 보상을 신청했으며 50명 이상이 피해 보상금 수령을 완료했다. 가대위 관계자는 “연말까지 80명 이상이 보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논란이 생겨나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26년을 근무한 남편을 뇌종양으로 떠나보낸 최은호(가명)씨는 <한겨레>에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남편은 평일에는 가족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회사에 종속된 삶을 살았다. 이제 와서 회사가 주도하는 보상위원회가 그의 삶을 재평가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최씨는 보상 신청을 거부하고 산재 신청을 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삼성의 문제 해결 방식을 질책하는 ‘낮은 목소리’다. 2005년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서 근무했던 동생을 백혈병으로 잃었다는 김민성(가명)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보상위 안내에 따라 보상을 신청하고 서류도 접수했는데, 일주일 만에 구체적 설명 없이 액수만 통보받았다”며 “무언중에 ‘이 돈 받고 빨리 끝내라’는 태도로 느껴져 보상금 수령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쪽은 “100명이 넘는 피해자 가족이 보상을 신청해 문제없이 절차가 진행 중인데, 몇몇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가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보상과 관련해 모든 피해자 가족에게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백혈병 피해자 중에서는 보상을 거부한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 재개된 조정위 절차, 해결 방안 찾을까 현재로선 양쪽 입장 차이가 팽팽해 해법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올림 관계자는 “조정위에서 3대 의제를 일괄 논의하기로 한 사회적 약속을 삼성전자가 파기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며 “삼성전자 쪽이 개별 보상 활동을 중단하고 조정위 권고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독립 법인을 제외한 조정위의 모든 권고안을 사실상 수용한 상태”라며 “계속해서 독립 법인 설립을 강요하는 것은 논의를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고 맞섰다. 가대위 등 일각에서는 보상 문제와 예방(재발 방지) 문제를 분리하자는 ‘투트랙’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미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삼성의 보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만큼, 조정위에서 예방 대책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 아니냐는 것이다. 보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지순 교수는 “시급한 피해자 보상 절차는 보상위가 서둘러 진행하고, 조정위는 예방 대책 등 장기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해결 방안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예방 대책을 맡을 기구에 대해서도 여러 논의가 나오고 있다. 기존 권고안에 들어 있던 상설 법인 외에 제3의 독립 기구를 만드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다. 가대위 송창호 대표는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유사한 독립적 전문가 기구에서 예방 대책을 맡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사업장과 직업병 관계에 대한 검증은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검증위에서 진행했고, 보상 절차는 노사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원보상위원회에서 시행할 예정이다. 예방 대책은 회사에서 맡되 외부 독립기구에서 이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하겠다는 방침이다. 조정위 내부에서도 새로운 독립 기구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위는 11월25일 삼성전자와 가대위, 반올림을 각각 불러 면담을 했다. 김지형 전 대법관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세 주체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개별 접촉을 진행했다”며 “추가 조정의 여지가 있는지를 판단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삼성전자는 자신들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해 사회적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좀더 노력해야 한다. 이와 함께 반올림도 현실적 여건을 고려한 해결 방안을 깊이 고민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삼성·반올림·가족위 세 주체
진통끝에 ‘조정위’ 꾸렸는데
삼성에 독립법인 설립 제시한
‘조정권고안’ 결렬로 갈등 커져 삼성, 가족들에 개별보상 나섰지만
사회적 지지 받는 해결책 못내놔
일각선 “보상·예방문제 분리를”
“삼성, 사회적 대화 더 노력해야” ■ 조정권고안 불발, 핵심 쟁점은 ‘독립 법인’ 황유미씨의 죽음을 계기로 같은 해 11월 여러 노동·시민단체가 결합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결성됐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장과 백혈병의 인과관계’를 부인하고 나섰고, 이후 양쪽의 공방이 수년간 지속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반올림, 가족대책위원회(지난해 9월 반올림과 입장이 다른 피해자 가족들이 꾸린 단체) 등 세 주체는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삼성전자 사업장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를 구성해 3대 의제(보상, 사과, 예방)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많은 시간이 걸려 사회적 대화 창구가 마련된 것이다. 조정위는 8개월의 활동 끝에 지난 7월 조정권고안을 제시했다.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기부해 독립된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피해자 보상과 예방 조처를 하자는 내용이 뼈대였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지난 9월 조정권고안을 거부하고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위원회’(보상위)를 독자적으로 꾸려 개별 보상에 나섰다. 보상위는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위원장으로, 삼성 관계자 2명과 외부 전문가 4명으로 구성됐다. 가장 큰 쟁점은 ‘독립 법인’이다. 삼성전자는 “독립된 상설 법인을 만들겠다는 것은 사실상 영구적으로 삼성전자의 사업장을 감시하겠다는 의미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조정위 쪽에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삼성전자는 1000억원 규모의 ‘사내 기금’을 조성해 ‘보상과 예방 및 연구 활동’에 쓰겠다는 입장이다. 조정권고안이 결렬되면서, 삼성전자와 가대위를 한 축으로, 반올림과 반올림을 지지하는 가족들을 한 축으로 하는 대립과 갈등은 더욱 커졌다. 가대위 송창호 대표는 “별도 법인을 구성하려면, 그 시간만큼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이 연장된다”며 “반올림은 피해자 가족의 입장보다 대의명분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삼성은 사실상 가해자임에도 7년 넘게 책임을 회피하고 문제를 은폐한 전력이 있다. 삼성전자가 보상과 예방을 전담할 경우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독립 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올림은 지난 10월7일부터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 삼성 자체 보상 진행 속 반발도 삼성전자는 자체적인 보상 절차 진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대위와 삼성전자 쪽에 따르면, 보상위 구성 뒤 피해자 가족 130여명이 보상을 신청했으며 50명 이상이 피해 보상금 수령을 완료했다. 가대위 관계자는 “연말까지 80명 이상이 보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논란이 생겨나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26년을 근무한 남편을 뇌종양으로 떠나보낸 최은호(가명)씨는 <한겨레>에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남편은 평일에는 가족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회사에 종속된 삶을 살았다. 이제 와서 회사가 주도하는 보상위원회가 그의 삶을 재평가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최씨는 보상 신청을 거부하고 산재 신청을 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삼성의 문제 해결 방식을 질책하는 ‘낮은 목소리’다. 2005년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서 근무했던 동생을 백혈병으로 잃었다는 김민성(가명)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보상위 안내에 따라 보상을 신청하고 서류도 접수했는데, 일주일 만에 구체적 설명 없이 액수만 통보받았다”며 “무언중에 ‘이 돈 받고 빨리 끝내라’는 태도로 느껴져 보상금 수령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쪽은 “100명이 넘는 피해자 가족이 보상을 신청해 문제없이 절차가 진행 중인데, 몇몇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가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보상과 관련해 모든 피해자 가족에게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백혈병 피해자 중에서는 보상을 거부한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 재개된 조정위 절차, 해결 방안 찾을까 현재로선 양쪽 입장 차이가 팽팽해 해법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올림 관계자는 “조정위에서 3대 의제를 일괄 논의하기로 한 사회적 약속을 삼성전자가 파기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며 “삼성전자 쪽이 개별 보상 활동을 중단하고 조정위 권고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독립 법인을 제외한 조정위의 모든 권고안을 사실상 수용한 상태”라며 “계속해서 독립 법인 설립을 강요하는 것은 논의를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고 맞섰다. 가대위 등 일각에서는 보상 문제와 예방(재발 방지) 문제를 분리하자는 ‘투트랙’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미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삼성의 보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만큼, 조정위에서 예방 대책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 아니냐는 것이다. 보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지순 교수는 “시급한 피해자 보상 절차는 보상위가 서둘러 진행하고, 조정위는 예방 대책 등 장기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해결 방안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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